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12)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12)화(112/171)
클로드가 희희낙락하며 구겨진 서류들을 뒤지는 동안 디하트는 전시회장을 몰래 한 바퀴 훑은 뒤 도심으로 나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꺼림칙한 장치나 수상쩍은 흔적 같은 건 아무 데도 없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돌아갈까요?”
눈살을 찌푸린 디하트는 팔짱을 낀 채 노을에 붉게 물들기 시작한 광장을 노려보았다. 사일러스를 비롯한 동부 귀족들에게 붙인 첩자들의 보고가 올라오는 시간은 새벽. 아직 여유가 있었다.
고민하던 디하트는 타이를 끄르더니 일레이에게 손짓했다. 아무 의심 없이 다가온 일레이는 곧장 제 머리를 헝클이는 손가락에 비명을 질렀다.
“으악, 무슨 짓입니까!”
“잘 어울리는군.”
일레이의 머리카락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디하트는 흡족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더니 몸을 돌려 바로 보이는 의상실로 들어갔다. 일레이는 툴툴거리면서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흠.”
잠시 뒤, 모자를 푹 눌러쓰며 나온 디하트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무직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문제는 특유의 후끈한 분위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이지만.
“가자.”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디하트의 목적지는 제4구역의 마를렌 지구. 통칭 예술가들의 성지라 불리는 곳이었다. 뒤늦게 그가 향하는 장소를 알아차린 일레이가 물었다.
“전시회 참가자들을 살펴보러 가시는 겁니까?”
디하트는 대답 대신 고개를 까딱였다. 이번 전시회는 일황비가 총애하는 동부 출신 예술가들이 주축이 되는 행사였다. 만약 그들에게 무언가 수작을 부려 놨다면 전체적인 분위기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곳은 세벨리아가 이전부터 방문하고 싶었던 장소이기도 했다. 디하트는 두 번째 이유를 속으로 삼킨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마를렌 지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천카페와 술집들이 줄지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고, 자랑스레 내건 입간판에는 수도라고는 믿을 수 없는 가격이 쓰여 있었다. 일레이는 새삼 감탄하며 디하트의 뒤를 따랐다.
주머니가 가벼운 예술가들과 젊은 사상가들로 활기가 넘치는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한 블록을 지나가는 데 수 분 이상이 걸렸으니 마를렌 지구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쯧.”
디하트는 자꾸만 부딪혀 오는 사람들에 혀를 찼다. 수많은 인파는 정체를 숨기는 데에 확실히 탁월했다. 문제는 이 불쾌함을 계속 견뎌야 한다는 거지만.
디하트는 느리게 걸으며 노천카페에 앉아 있는 예술가 중 전시회에 이름을 올린 이들을 하나둘씩 찾아냈다. 그들은 저마다의 화제로 난상 토론 중이었다.
“요새 삼황자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군. 그분께서야 말로 우리와 같은 영혼의 모양을 가지신 분인데 말이야.”
“산이야 들이야 허송세월 보내며 교외로 나도는 우리 삼황자님 말이신가? 내가 전해 듣기로 시골에서 어떤 아름다운 여성과 정분이 났다던데.”
“그런… 낭만적인 일이 있나!”
‘딱히 수작을 부린 것 같지는 않군.’
평화롭다 못해 나태한 분위기에 디하트는 자리를 옮기려 했다. 마침 네이튼이 패거리와 함께 밤 나들이를 즐기는 곳이 이 근방이었으니 그곳으로 가 보려던 순간이었다.
거리를 지나가는 이들 중 한 명이 유독 디하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손자를 여럿 봤을 법한 나이대의 남자였다. 희게 센 머리를 짙게 물들인 사내는 눈이 좋지 않은지 연신 거리의 간판을 확인하며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디하트의 시선이 그에게 닿은 건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건 우연이 아닌 직감이었다. 디하트는 어느새 비뚤어진 모자를 푹 눌러쓰며 사나운 미소를 가렸다.
“참 운도 좋지.”
북부로부터 멀리 떨어진 랑그 엘리사, 그중에서도 이질적인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독특한 마를렌 지구. 이곳에서 저 사람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로덴 알드라이트.
그는 디하트에게 오랫동안 심각한 부작용이 수반된 약을 먹여 온 장본인이었다.
“하.”
뭐가 그리 바쁜지 창백한 안색으로 걸음을 옮기는 남자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인상이었다. 뭐, 직접 얼굴을 마주한 게 육칠 년은 되었으니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면 못 알아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덴 알드라이트는 겉으로 보기에도 꽤나 단정한 차림새였다. 물론 주치의라는 예전 직업을 떠올리면 별로 어울리는 차림새는 아니었지만.
일변한 디하트의 분위기를 알아차린 일레이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몸을 붙이며 속삭였다.
“쫓을까요?”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와라.”
디하트는 차갑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로덴의 뒤를 밟았다. 툭툭 어깨를 건들며 스쳐 지나가는 인파도 이번에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등골이 쭈뼛할 정도로 짜릿했다.
두근, 두근. 디하트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로덴을 쫓았다. 로덴은 여러 번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목적지를 찾았는지 거침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디하트는 먹이를 쫓는 짐승처럼 숨을 죽인 채 그의 뒤를 밟았다. 사람들로 붐비는 마를렌 언덕 중심가에서 살짝 벗어난 구역이었다.
그림자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어느새 밤의 초입이었다. 순식간에 뚝 떨어진 기온을 느끼며 디하트는 어둠 속에서 눈을 빛냈다.
‘여기는…….’
익숙한 간판들이 주위에 가득했다. 틀림없이 보고서에서 한 차례씩 언급되었던 곳들이었다.
디하트가 어느새 차분해진 눈으로 주위를 훑는 사이 로덴이 걸음을 멈췄다. 그는 차분히 주위를 살폈다. 당연히 그의 눈에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디하트와 일레이는 보이지 않았다.
“흠.”
로덴은 머리를 손으로 빗어 올리더니 평범해 보이는 술집의 문을 열었다. 축축한 거리에 순식간에 왁자지껄한 소음과 온기가 확 풍겼다.
그러나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것들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아하.”
그리고 디하트는 그림자 속에 숨어 차가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가만히 앉아서 보고를 기다리지 않고 직접 행동에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셨습니까?”
“그래.”
디하트는 내뱉듯 답하고는 바로 뒤를 돌았다. 비좁은 골목으로 들어선 그는 곧 로덴이 들어간 술집의 뒷문을 찾았다.
낡은 철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기며 그는 방금 전 제가 본 것을 떠올렸다.
입구 가까이 앉아 여자를 품에 끼고서 흥청망청 술을 마시던 사내. 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언제 취했냐는 듯 기다렸다는 듯 로덴을 향해 시선을 돌리던 남자.
그는 바로 네이튼 웨든이었다.
* * *
저녁이 한참 지나서도 디하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죄책감에 집무실을 뒤지는 클로드를 말리던 세벨리아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이유 모를 화가 나기 시작했다.
실은 그녀에게 뻔뻔함과 담대함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불어넣은 클로드의 성과였지만 말이다.
“네이튼이 이런 짓을 저지르고 다니는 줄은 몰랐네요.”
“괜찮습니까, 벨라?”
“아, 충격받은 건 아니에요. 그냥, 명예를 그리 중요시한다는 사람이 하고 다니는 짓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세벨리아는 지난날 가문의 명예를 땅에 떨어트렸다며 자신을 찾아와 손찌검을 하려던 네이튼을 떠올렸다.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내게는 그래놓고 이런 더러운 짓을 저지르고 다녔단 말이지….”
클로드가 찾아낸 서류들은 디하트의 행방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으나 그녀의 오라버니가 얼마나 위선적인 인물인지 낱낱이 까발려주었다.
‘일부러 시골에서 갓 올라온 물정 모르는 아가씨들만 골라 유혹한 뒤에 비참하게 버렸다니.’
첩자는 소문이라고 적었으나 그가 중요 사안으로 보고할 정도면 분명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정보일 게 분명했다. 세벨리아는 머리를 짚으며 신음했다.
사교계에 이제 막 발을 들인 순진하고 사람 좋은 아가씨들에게 웨든 후작가의 후계자는 분명 매력적인 남편 후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슬프게도 네이튼은 못난 마음씨에 비해 제법 훤칠한 생김새의 사내였다.
세벨리아는 아가씨들이 속절없이 그의 마수에 걸려들었으리라는 생각에 울적해졌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내가 보기에도 이건 좀 심각하군요. 상대 부모가 강경하게 나온 경우 피해자들이 갑자기 소리소문없이 실종되었다라.”
어떻게 여태껏 잠잠할 수 있었던 거지? 클로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했다.
세벨리아는 탄식을 흘렸다. 소중한 딸을 농락한 사내를 상대로 강경하게 나서는 부모라면 한 가지 경우밖에 없었다. 그들은 사일러스에게 자신의 딸과 네이튼을 결혼시키길 요구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딸은 갑자기 실종되었다. 그야말로 흔적도 없이, 유령처럼.
세벨리아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분명 그들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게 틀림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클로드가 그녀를 걱정하며 다가오던 그때, 세벨리아가 갑자기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하나의 가정이 떠올랐다.
“그 약물.”
“예?”
“내게 먹이려 했던 그 약물을,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 먼저 사용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이지를 잃게 하고 특정 인물의 명령에 따르게 만드는 그 무색의 약물. 그 정도로 강력한 효과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번의 시험을 거쳤겠지.
‘그리고 그에 따른 실험 대상이 필요했을 거야.’
만약 그들에게 약물을 먹이고 자결하라 명령했다면. 세벨리아는 이를 악물더니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넘어지려는 그녀를 가까스로 붙든 클로드가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들어오지 않을 걸 그랬어요.”
“아뇨. 아니에요.”
세벨리아가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만약 클로드가 억지로 그녀를 집무실에 들이지 않았다면 이 사실을 영원히 모를 뻔했다.
세벨리아는 집무실에 들어온 걸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클로드의 말처럼 때로는 무모한 줄 알면서도 용기를 내야 할 순간이 있었다. 뻔뻔함과 담대함은 위험하기도 하지만… 세상에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니까.
세벨리아는 천천히 숨을 고르더니 클로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확고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등 떠밀어 줘서 고마워요, 클로드. 하마터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어요.”
“표현이 참 과감하지만 마음에 드는군요.”
그렇게 스승과 제자가 사이좋게 의기투합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좁은 골목.
어둠 속에서 디하트가 사람 한 명 정도는 너끈히 들어갈 만한 마대 자루를 짊어진 채 저택으로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