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1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13)화(113/171)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은데. 디하트는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미간을 찌푸렸다. 홧김에 나갔던 외출은 로덴과 웨든이 유착 관계라는 풍족한 성과를 거두었다.
‘헌데 왜 자꾸만 무언가를 놓친 것처럼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 건지 모르겠군.’
“커헉!”
디하트는 마대 자루를 지하실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아무래도 정말 뭔가를 놓친 게 틀림없었다.
“자, 자네는 누군가. 내가 뭘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네. 미안해, 응? 하지만 잘 보게,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야.”
“…….”
“이보게, 거기 아무도 없나? 들린다면 한 번만 생각해 보게. 나 같은 노인을 해친다 해서 좋을 것 하나 없어. 게다가 이런 말 하기 뭣하지만 내가 사라지면 가만 놔두지 않을 윗분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네……!”
디하트가 고민하고 로덴이 구구절절 이름 모를 납치범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열쇠를 가져온 일레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철컹. 소름 끼치는 소리에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로덴의 어깨가 화들짝 튀어 올랐다.
“아.”
그 무렵 디하트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러고 보니 마를렌 지구에 들른 김에 세벨리아가 먹고 싶어 하던 타르트를 사 왔어야 했는데. 디하트는 자신의 뼈아픈 실책에 신음을 흘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이제 슬슬 협박을 하기 시작한 로덴에게 작은 벼락을 떨어트렸다.
“커헉!”
척추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감각에 로덴은 그대로 벌레처럼 몸을 웅크렸다. 이대로 내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당장 황실기사단이 너희 목을 매달 거라느니 줄줄이 떠벌리던 입이 딱하고 다물렸다.
결박 도구를 가져오던 일레이가 그 모습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누굴 상대로 무슨 협박을 하는 건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거요, 영감.”
“이 개잡놈들이! 지금 너희들이 누굴 건드린 건지 알기나 하는 거냐!”
회유와 협박이 먹히지 않자 로덴은 슬슬 발악하기 시작했다. 원체 골방에 틀어박혀 약물 조제에나 골몰하던 늙은이이니, 이 정도까지 버틴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디하트는 그의 얄팍한 인내심 따위에는 하등 관심 없었다. 그가 바라는 건 오직 하나.
“오랜만이군, 로덴.”
“……!”
마대 자루가 벗겨지고 파렴치한 납치범의 정체를 목도한 로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방금 전까지 떵떵거리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사시나무처럼 파들파들 떨기 시작한 사내를 내려다보며 디하트가 차갑게 웃었다.
“그래, 내가 누굴 건드린 건지 설명해 주겠나?”
“고, 공작님. 어떤 오해를 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너무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가. 그대는 내가 그 오해라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이야.”
일레이가 건네주는 장갑을 어깨 너머로 받아 든 디하트가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하지만 그대가 아주 오랜 세월 나를 위해 그 빌어먹을 약을 만들어 줬으니, 한 번쯤은 기회를 줘도 괜찮겠지.”
탁. 팽팽하게 잡아당긴 가죽 장갑을 놓으며 디하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제가 지은 죄를 아는 로덴은 이제 거의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눈을 까뒤집으며 넘어가려는 그의 멱살을 붙잡으며 디하트가 으르렁거렸다.
“누구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그리고 네이튼 웨든에게 건넨 게 무엇이고 그걸로 뭘 하려는 건지 바른대로 불어.”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햇빛을 못 보게 만들어 주지. 서슬 퍼런 속삭임이 지하실 바닥을 울렸다.
* * *
새벽빛이 랑그 엘리사를 감싸 안을 무렵, 네이튼은 저택으로 복귀했다. 그의 귀환을 내심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사일러스는 그를 곧장 집무실로 불렀다.
“어찌 되었느냐.”
“보시는 대로 무사히 받아 왔습니다.”
네이튼이 뻐기듯 말하며 작은 병 하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푸른 크리스털 병에 들어 있는 건 일전에 넬리아가 세벨리아에게 사용하려던 그 무색의 약물이었다.
“헌데 굳이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무엇이?”
사일러스의 무관심한 되물음에 네이튼이 눈매를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이렇게 귀찮은 방식을 고수해야 하냐는 말입니다. 어차피 세벨리아가 살아있다는 걸 숨기고 있는 마당인데, 그냥 그 늙은이를 이쪽으로 회유하거나 제조법을 빼돌리면…….”
“네이튼 웨든.”
“…예, 아버지.”
“어려서부터 누누이 말했건만 고쳐지는 법이 없구나. 어찌 된 게 날이 갈수록 상황을 보는 눈이 안 좋아지는 거냐.”
네이튼이 욱하는 얼굴로 사일러스를 바라보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수치심과 분노에 절절 끓는 그의 목덜미를 본 사일러스가 한숨을 쉬었다.
“네 말대로 그 노인네를 손에 넣었다 치자, 그럼 그다음 수순이 뭘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거냐? 그렌 부인이 순순히 납득하고 우리에게 그자를 넘길까? 그럴 리가 없지. 그녀는 우리가 왜 그런 멍청한 선택을 했는지 알아보려 들 거다.”
그럼 그렌 부인은 세벨리아가 살아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네이튼은 깨달음에 입을 꽉 다물었다. 반박할 만한 거리가 없었다.
사일러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안 봐도 뻔했다.
‘힐렌드 홀에서 쫓겨난 뒤로 이제 그렌도 별 볼 일 없어졌다고 생각한 거겠지.’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쓸모가 있었다. 사일러스는 아들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다 손을 내저었다.
“이만 나가 봐라. 다음부터는 너 대신 다른 이를 심부름꾼으로 보내도록 할 테니 그렇게 알고.”
“하지만, 아버지……!”
“대업을 코앞에 두고 뒤통수칠 생각만 하는 놈을 그럼 내가 가만히 두고 봐야 하느냐!”
큰소리를 내는 법 없던 사일러스의 급작스러운 불호령에 네이튼은 그 자리에서 창백하게 굳었다. 겁먹은 어린아이처럼 가늘게 떠는 그를 싸늘한 눈으로 훑은 사일러스가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툭.
두꺼운 양탄자 위로 무언가 떨어져 내렸다. 홀로 남은 네이튼의 주먹 끝에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한편 인버네스 저택의 지하에서는 몇 번의 으름장과 수차례의 벼락, 이대로 북부로 돌아가 네 가족마저 같이 지하에 파묻어 줄까 하는 진심 어린 협박에 굴복한 로덴이 모든 진실을 토해 내고 있었다.
시작은 그가 왜 부작용이 있는 걸 알고도 신경안정제의 처방을 바꾸지 않았냐부터였다.
“부작용이라 해봤자 목숨에 위협이 가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공작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저는, 저는 그저 그렌 부인께서 처방을 바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셔서 그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그분께서 공작님을 친아들처럼 여기고 아끼시지 않습니까.”
부들부들 떨며 말하던 로덴이 자비를 구하듯 디하트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새, 생각해 보십시오, 공작님. 저는 한낱 고용인일 뿐입니다. 그렌 부인의 명령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요.”
십 년 넘게 끔찍한 부작용을 수반하는 신경안정제를 처방해 온 주제에 이제 와서 자기는 책임이 없다며 발뺌하는 로덴을 바라보며 디하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제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다고 착각한 로덴은 이어서 높으신 분들에게 시달리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잘도 늘어놓았다.
하지만 디하트가 궁금한 건 그따위 것들이 아니었다.
쾅!
“아악!”
매캐한 냄새와 함께 바짓단이 새카맣게 탔다. 너덜너덜해진 천 너머로 그을린 살갗을 본 로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기회는 한 번뿐이라 분명히 말했을 텐데.”
묵직한 목소리가 지하실을 울렸다. 서늘한 어둠 너머, 금빛 눈동자가 가볍게 움직였다. 시선을 받은 일레이가 상쾌한 미소와 함께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로덴에게 다가갔다.
“이제 제 차례입니다, 노인장.”
잠시 뒤, 로덴으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알아낸 일레이가 상큼한 얼굴로 피 묻은 손을 털었다.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린 로덴은 죽다 만 사람 같은 몰골이 되어 짚더미 위에 던져졌다.
“백부님이 아니라 그렌 부인이었단 말이지.”
그의 곁에서 디하트가 읊조렸다. 일레이는 바닥에 널브러진 로덴을 흘긋 쳐다보았다가 디하트에게 물수건을 건넸다. 중간중간 심문에 참여한 디하트의 뺨과 턱 부근에 핏물이 튀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렌 부인께서 동부 출신이셨죠.”
“…그래. 너무 오래전 일이라 이제는 그 누구도 그녀의 출신을 떠올리지 않게 되었지만, 그랬었지.”
마른 피를 닦아 낸 디하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지하실 문을 열었다. 끼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서늘한 새벽 공기가 물밀듯 들어와 뺨을 할퀴었다.
* * *
새벽의 저택은 적막했다. 일레이는 잠이 오지 않는다며 자발적으로 저택을 순찰하러 자리를 떴다. 디하트는 사람 한 명 없는 복도를 걸었다.
“하아.”
뭐가 뭔지 모르겠군. 디하트는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분명 시작은 세벨리아를 위한 일이었다. 그녀의 자존감을 무너트리고 이용한 웨든 후작가의 민낯을 밝히고 그들에게 복수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갑자기 그렌이 튀어나오다니.’
이렇게 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그렌이 도대체 언제부터 웨든 후작과 손을 잡고 있었는지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관계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던 일이라면…….
디하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심란한 마음을 떨쳐 내려 억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다 보니 처음 보는 구역에 이르렀다.
“여긴.”
미간을 찌푸린 그는 주위를 살피다 제가 어디까지 온 건지 깨달았다. 평소에 들르지 않는 주방 근처였다. 디하트는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에겐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아주 쓴 커피 한 잔이 필요했다.
“윽.”
처음으로 직접 내려 본 커피는 그의 의도에 맞게 아주 끔찍한 맛이었다. 디하트는 머릿속을 가득 메우던 안개 같은 혼란이 바로 사라진 걸 느꼈다.
“하아.”
그러고 나니 이제 당장 집중해야 할 목표가 보였다. 그래, 그렌이니 북부니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한번 실패한 계획을 다시 시도하려 한다라.’
로덴으로부터 캐낸 함정에 대한 정보. 그건 바로 일황비의 힘을 빌려 세벨리아를 전시회에 불러낸 뒤 네이튼이 다시 한번 그녀에게 약물을 먹인다는 계획이었다.
“교활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군.”
쯧, 혀를 찬 디하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세벨리아와 마주쳤다.
“디하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