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15)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15)화(115/171)
한 사람의 야욕이 얼마나 많은 이의 인생을 망가트릴 수 있을까. 세벨리아는 이제껏 생각해 본 적 없던 질문에 대한 답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답은 셀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자신과 디하트 둘뿐이라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그렌 인버네스가 망가트린 사람들이 튀어나올지 몰랐다. 당연한 말이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어쩌면 일황비와 손을 잡고 오랜 시간 동안 무슨 짓을 꾸몄을지 모르니까.
그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 세벨리아는 헛웃음만 나왔다.
“하…….”
그저 내가 중앙 출신 사생아라 마음에 들지 않는 줄로만 알았지. 어리석었던 과거가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악의가 단순히 나에게만 향하는 줄 알았어.’
자신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렌 인버네스는 힐렌드 홀의 어엿한 안주인이었으니, 그 권력과 명예를 하룻강아지나 다름없는 자신에게 넘기고 싶어 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렌에게 세벨리아는 하찮은 장애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아마도.
세벨리아는 답을 찾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한낮의 태양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디하트.”
세벨리아가 낮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디하트는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할까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그의 모습에 세벨리아는 조금 당황했다. 저리도 담담한 태도와 흔들림 없는 목소리라니.
세벨리아는 일순간 그가 상처받은 걸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 앞에서 힘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거라고. 하지만 그의 눈을 깊게 살핀 순간 그 생각은 씻은 듯 사라졌다.
강렬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은 충심이라기엔 지나치게 맹목적인 감정을 담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앞의 상대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 심지어 그게 자기 자신이어도 상관없다는 듯 소름 끼치기까지 한 그 무구한 눈빛에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당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렌 부인을 말하는 거라면, 네, 그다지.”
지나치게 빠른 대답이었으며 성의조차 없는 대꾸였다. 그녀는 오히려 제가 더 당황스러웠다. 세벨리아가 주저하는 걸 알아차린 디하트가 메마른 얼굴로 읊조렸다.
“그다지 놀라지도, 상처받지도 않았으니 혹여나 내 걱정을 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애초에 그녀가 당신을 죽이려 했다는 걸 안 순간부터 이미 그녀는 내 가족이 아니었어요.”
“네? 그게 무슨…. 잠깐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세벨리아가 머리를 짚으며 되물었다.
“그렌 부인이 날 죽이려 했다고요?”
“아.”
디하트가 입술을 깨물더니 등 뒤의 워츠와 클로드를 흘끗 살폈다. 머뭇거리는 태도에 세벨리아가 그냥 말하라는 듯 강렬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디하트는 잠시 주저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저주를 받았다는 소문이 퍼지기 전의 일입니다. 지하조직에 암살 의뢰를 넣어 자살로 위장하려고 했더군요.”
디하트는 그렌 부인의 방에서 암살 의뢰서를 발견했다며 털어놓았고, 세벨리아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제게 가진 악의는 생각보다 더 끈질기고 악독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세상에.”
반사적으로 닭살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세벨리아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마터면 끔찍한 계획의 희생양이 될 뻔했다니, 소름이 끼쳤다.
‘이런 걸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불치병이라고 믿었던 가시나무병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저택을 떠나지 않았을 테다. 그러면 아마도 그렌 부인에게 살해당했겠지.
하지만 그렌 부인은 다행히도 제게 마수를 뻗지 않았다. 당연히 그녀가 갑자기 제게 동정심을 품어서는 아니었다.
‘내가 초대 공작 부인의 저주를 받아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해서였겠지.’
그렇지 않아도 죽이려던 상대였는데 알맞은 때에 저주를 받았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제 손을 더럽히지 않고 알아서 자멸할 게 분명하니 그렌 부인은 분명 뛸 듯이 기뻤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별장에 계속 하인들을 보내 내 상태를 보려 했구나…….”
저도 모르게 잇새로 흘러나온 말에 세벨리아는 흠칫했다. 아주 작은 소리였으나 디하트는 이미 그녀의 말을 들은 뒤였다. 까득, 이 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가까스로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겨우 감정을 추스른 디하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벼락이 내리치듯 번쩍거리는 금빛 눈동자가 집무실 한가운데서 빛을 발했다.
디하트가 세벨리아의 손끝을 조심스레 붙잡으며 말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낮은 목소리가 마치 어두컴컴한 동굴을 울리듯 깊고 묵직했다.
“당신을 절망에 빠트린 건 웨든이지만, 당신을 죽음으로 몰고 간 건 힐렌드 홀의 모든 이들이니까. 그들도 죗값을 치러야만 해요.”
세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지금 그건 내가 쓴 유서의 마지막 구절이잖아.’
설마 그걸 내내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세벨리아는 쿵쿵 뛰는 심장을 느끼며 놀란 얼굴로 디하트를 바라보았다. 커다랗게 뜨인 푸른 눈동자와 황금 원반처럼 빛나는 금빛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큼큼.”
내내 소외되어 있던 클로드가 헛기침을 하며 손을 들었다.
“슬슬 본론에 들어가도 될까요?”
“아, 네!”
세벨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디하트에게 붙잡힌 손을 조심스럽게 빼냈다.
“일단 전시회에서 네이튼이 제게 약물을 먹이려는 건 확실해요. 문제는 그게 어떤 방식이냐는 거죠.”
“흠, 아예 전시회에 분신을 보내는 건 어떱니까?”
“그건 힘들어요. 제가 상대해야 하는 건 네이튼뿐만이 아니니까요. 분신은 기껏해야 인사말 한두 가지만 반복할 수 있는데, 자칫하다간 그에게 환영이라는 걸 들키기나 하겠죠.”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는 분신을 대역으로 세우는 것조차 안 되겠군요. 아, 그거 아쉽네요. 차라리 당신 특기가 분신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데.”
“특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늘 밤 안으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혹시 모르잖아요. 그게 내일 일에 도움이 될지.”
클로드와 세벨리아가 열심히 대책을 논의하는 동안 디하트는 텅 빈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 느지막이 일어났다. 한편, 클로드는 그가 자리로 돌아가는 내내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걸 느끼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왜 나한테 난리야, 저 멍청한 조카 녀석이.’
파란 새를 이용하는 건 어떠냐는 의견을 내며, 클로드는 억지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대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내내 침묵하던 워츠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는 왜 부르신 겁니까?”
“아, 그건 말이죠.”
세벨리아가 자연스레 디하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디하트가 품에서 피 묻은 종이를 꺼내더니 워츠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부스럭대며 종이를 펼친 워츠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었다. 그가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한 건 약재 창고가 불탄 이후로 처음이었다. 세벨리아가 눈을 깜빡거리는데, 워츠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이걸 만들어 달라 청하는 건 아니겠지요. 만약 그렇다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벨라, 당신 부탁이어도 마찬가지예요.”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세벨리아가 손사래를 치며 워츠의 오해를 풀려 애썼다. 그리고 새삼 그가 얼마나 자신들의 일에 관여해 오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그럼 뭡니까.”
“그건 제가 강제로 먹을 뻔한 약의 제조법이에요. 사람의 이지를 잃게 하고 명령에 쉽게 휩쓸리게 만드는 약인 것 같더군요.”
일레이가 폭력과 협박을 이용해 찬탈해 낸 로덴의 제조법. 워츠가 손에 쥐고 있는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 약물의 해독제를 만들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자초지종을 다 설명한 건… 아무 말 없이 다짜고짜 해독제를 만들어 달라하면 어떤 의심이 들지 알고 있으니까요.”
세벨리아의 고백에 워츠의 눈이 충격에 떨렸다. 그는 종이가 구겨지도록 힘주어 쥐더니 세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으면…….”
“워츠 씨?”
“당신은 아직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라는 걸 잊은 겁니까? 대외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당신의 주치의는 나예요.”
어째선지 그는 조금 배신당한 얼굴이었다. 처연한 얼굴로 심호흡을 하던 그는 이내 비통에 가득 찬 잔소리를 시작했다.
이런 심각한 약물을 두고도 어떻게 지금까지 자신에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느냐, 벨라 당신은 이걸 먹을 뻔했으면서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냐, 등등.
일부러라도 웨든 후작에 대한 복수 계획에 엮이지 않으려던 사람치고는 격한 반응이었으나 세벨리아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약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네, 다행이야.’
사실 세벨리아는 워츠에게 제조법을 건네 해독제를 만들게 하자는 디하트의 말에 조금 고민했었다. 희귀병 연구와 새로운 약 개발에 집착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는 워츠가 제조법을 악용하지는 않을까, 혹시 모를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을 보아하니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게 판명되었다.
세벨리아가 걱정을 내려놓는 사이, 워츠의 잔소리를 듣다 못한 디하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해독제를 만들 수 있다는 건가 없다는 건가?”
“내가 이런 더러운 약 하나 해독하지 못할 것 같습니까?”
“그래? 다행이군. 그런데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어.”
의자 팔걸이를 툭툭 내려치던 디하트가 흘끗 시선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전시회까지 이제 하루밖에 남지 않았거든.”
“……!”
경악에 가득 찬 워츠를 바라보며 디하트는 손가락을 튕겼다. 곧 옆방에서 대기 중이던 일레이가 기다렸다는 듯 들어왔다.
“자아, 가시죠. 의원 선생님. 저택에서 놀고먹었던 시간을 보상하실 시간입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들어온 일레이는 워츠를 번쩍 일으켜 세우더니 그의 팔짱을 끼고 어딘가로 향하려 했다. 당황한 클로드가 그를 붙잡으려 하자 디하트가 막아 세웠다.
“화실을 치우고 그곳에 의원 나리를 위한 연구실을 꾸몄어. 약재란 약재는 모두 긁어모아 그곳에 채워 넣었으니 기뻐하면 기뻐했지 화를 내지는 않을걸.”
그건 그렇지. 클로드는 빠르게 납득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들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찰나,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거세게 창문 안쪽으로 들이닥쳤다.
“제가 닫을게요.”
창가로 다가간 세벨리아는 문을 닫고 커튼을 치려다 멈칫했다.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착각인가.’
세벨리아는 커튼을 닫고 돌아섰다. 그렇지 않아도 클로드가 그녀에게 ‘특기’를 다시 찾아보자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노력하면 될지도 모릅니다!”
세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시회까지는 남은 시간은 하루. 허투루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