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16)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16)화(116/171)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여우비가 거센 소나기가 되어 수도를 덮친 건 점심나절의 일이었다. 바람이 동반된 장대비에는 우산도 소용없었다. 하지만 발라크는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고모님과 닮았구나.”
옅은 안개 속에 숨은 듯 서 있는 인버네스 저택. 그로부터 두세 블록 떨어진 골목 안에서 발라크는 멍하니 커튼이 쳐진 창문을 응시했다.
그곳에 제 사촌 동생이 있었다. 푸른 눈이 아름다운 아이는 어디 하나 아픈 곳이 없어 보였다. 그것이 못내 다행스러우면서도 서글픈 마음에 발라크는 홀로 숨죽여 고통을 삼켰다.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아이는 제 어머니를 똑 닮아 있었다. 살아생전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어머니를 말이다.
[고모 배 속에 자고 있는 건 남자애예요?] [글쎄, 그건 태어나 봐야 아는 거라 지금 이야기해 줄 수가 없네.] [남자애였으면 좋겠다. 그럼 같이 놀아 줄 수 있는데.]그때는 네가 여자아이인지도 몰랐지. 발라크는 얼굴을 적시는 빗물을 훔치며 저도 모르게 웃었다가 다시 싸늘한 낯을 취했다.
이렇게 추억할 수 있다는 것조차 사치나 다름없었다. 자신과 달리 고모님은, 그녀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조차 몰랐다. 아이의 첫 울음소리를 듣기도 전에 의식을 잃어버려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했으니까.
“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 모든 걸 내줘도 아깝지 않을 내 소중한 아이. 발라크는 어릴 적 잠결에 들었던 속삭임을 떠올리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갈무리하고 날카로운 눈으로 굳게 닫힌 대문과 그 안팎을 철통같이 지키는 기사들의 면면을 훑었다.
혼자 힘으로 저 철통같은 경계를 뚫는 건 무리로 보였다.
‘역시 내일을 노려야 하나.’
세벨리아가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 뒤 발라크는 그녀와 만나기 위해 샤테이안의 힘을 빌려 여러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인버네스 공작의 철통같은 반대에 부딪혀 매번 실패만 반복했다.
결국 그에게 남은 길은 내일 열리는 예술전시회에서 그녀를 만나는 것뿐. 하지만 그 전시회는 일황비의 덫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발라크는 되도록 그 전에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를 이 아수라장에서 빼낸 뒤 함께 러크우드로 떠나고 싶었다.
뭐, 그 계획은 이제 물거품이 되었지만… 발라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너를 꼭 집으로 데려가 줄게.’
발라크는 천천히 몸을 돌리며 내일 어떤 식으로 그녀에게 제 정체를 밝힐지 고심했다.
‘역시 갑자기 사촌 오빠라며 다가오는 낯선 사내보다는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실은 사촌 오빠였다는 전개가 더 감격스럽겠지.’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는 세벨리아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는 게 중요했다.
‘가능하면 내내 곁을 떠나지 말아야겠어.’
인버네스 공작이 아무리 눈총을 줘도 꿈쩍도 하지 말아야지. 발라크는 샤테이안이 비밀리에 내준 저택으로 들어서며 결심했다. 헌데 생각을 하고 보니 좀 짜증이 났다.
“그 자식은 도대체 무슨 낯짝으로 옆에 붙어 있는 거지?”
그 미친 공작 놈이 무슨 생각으로 그녀의 곁에 머물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죽음을 가장하고 도망치게 했다는 점에서 그는 제 사촌 동생의 곁에 있을 자격이 없었다.
발라크가 낮은 욕설을 지껄이는 사이 어느새 비가 멎었다. 먹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내는 태양을 바라보며 발라크는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이 더럽고 지저분한 벨크람에서 세벨리아를 구출해 내겠다고, 그리하여 그녀의 ‘진짜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러크우드로 데려가고 말겠다고 말이다.
* * *
예술전시회가 열리는 당일, 사람들은 맑게 갠 하늘에 안도했다. 거리마다 아직 옅은 물안개가 껴 있긴 했지만 비가 내릴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전시회관의 문을 열고 들어간 건 당연히 전시회의 후원자인 일황비였다. 그녀는 문전성시를 이루는 전시회를 뿌듯한 눈으로 바라보고 제 측근인 동부 귀족들과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그대로 퇴장을 선언했다.
“오늘 이 자리는 촉망받는 예술가들을 위한 자리이니 나는 이만 자리를 비울까 해요.”
그리고 세벨리아에겐 그것이 몹시 의외로 다가왔다. 디하트도 마찬가지인 듯,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당신을 따로 불러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러게요. 역시 예상대로 쉽게 움직이지는 않네요.”
가장 뻔한 시나리오는 제국의 황비라는 자격으로 사교계에 갓 데뷔한 거나 다름없는 자신을 따로 불러내는 것이었다. 황비를 독대하는 자리에 다른 이를 동석시킬 수는 없으니, 약물을 먹이기에는 최적의 기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일황비는 그렇게 하는 대신 자리를 떠나는 선택지를 골랐다. 세벨리아는 소매에 구슬 장식처럼 꿰맨 해독제 알약을 만지작거리며 아쉬움에 한숨을 삼켰다.
‘얄팍한 수는 쓰지 않겠다는 거로군.’
이렇게 되면 네이튼과 일황비를 한꺼번에 잡는 건 불가능해졌다. 역시 제국의 황비답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그만큼 꼬리를 잡히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그리 유쾌하지는 않아.’
알면서도 걸려 줘야 하는 덫이라는 건 참 불쾌한 경험이었다. 들리지 않게 혀를 찬 세벨리아가 서늘한 눈으로 일황비를 응시했다.
그녀는 아들인 딜리언 황자와 곁에 있는 넬리아에게 따로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미련 없이 전시회장을 나서고 있었다.
“오늘 이 무대의 주역은 네이튼인가 보군요.”
디하트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고개를 돌리자 그의 말대로 네이튼이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당도한 네이튼이 아련한 분위기를 있는 힘껏 뿜어내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몸은 괜찮니?”
“저희가 언제 인사를 나누었던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걱정해 주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건강하다는 건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아아, 그렇지. 나는 그때 쓰러지는 네 모습을 봤을 뿐이니까. 그래, 그렇구나…….”
벌써 수작질이었다.
“그래도 건강하다니 다행이다. 공작님께서 잘해 주시나 보구나. 사실 그렇게 널 보내고 많이 걱정했어.”
자신과 디하트를 번갈아 바라보며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네이튼의 모습에 세벨리아는 소름이 돋았다. 어디서 감히 자신을 위하는 척하냐며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일단은 장단에 맞춰 주며 그가 제 무덤을 파게 만들어야 했다. 세벨리아가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겨우 내리누르는 것도 모르고 네이튼은 연기를 계속했다.
“세벨리아를 그렇게 잃어버리고 너라도 지켜야 한다는 욕심에 내가 네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다. 미안하구나. 지금이라도 사과하마. 네가 그렇게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서 이성을 유지하는 게 고역이었지만…….”
참고로 이 연기의 이름은 ‘잃어버린 여동생이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는 끔찍한 비극에 처해 버린 나’였다.
‘이런 걸 보고 가지가지 한다고 하는 건가?’
세벨리아는 일단 그가 어디까지 지껄이나 지켜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대체 어떻게 자신에게 약물을 먹이려나 궁금한 것도 있었다.
그녀의 궁금증은 곧 해결되었다. 구구절절 제 억울함을 늘어놓으며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던 네이튼이 갑자기 말문이 막힌 듯 마른세수를 했기 때문이다.
“아니, 아니다. 이런 말을 하려고 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게 아니야.”
기다렸던 순간이 도래했다. 세벨리아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네이튼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실은 네게 줄 선물을 준비했단다.”
“…선물이요?”
“그래. 아마도 네가 평생토록 그리워하고 바랐을 선물.”
쓰게 웃은 네이튼이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어머니를 모셔 왔단다, 코넬리아.”
세벨리아는 그 자리에서 네이튼의 목을 조를 뻔했다.
네이튼의 개소리는 발라크의 귀에도 들렸다. 그는 분노했고, 겨우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을 그대로 놓아 버렸다.
“영웅이 아니라 범죄자가 될 셈인가!”
정신을 차리니 샤테이안이 그를 말리고 있었다. 붉은 눈은 평소답지 않은 노기를 띠고 발라크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생을 찾아다닌 사촌 동생이라며. 그녀를 위기에서 구출해 낸 영웅이 되어야지, 갑자기 전시회장에 나타나 귀족들을 도륙한 정체불명의 괴한이 되고 싶은 건 아니겠지.”
음산한 읊조림에 발라크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검은 기운이 소용돌이치던 하늘색 눈동자가 다시 잠잠해졌다. 샤테이안은 한시름 놓은 얼굴로 허리춤에 얹었던 손을 다시 내려놓았다.
이성을 되찾은 발라크는 어째선지 욱신거리는 뺨을 문지르며 낮게 읊조렸다.
“미안하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자가 감히 고모님을 입에 담았지 않은가. 감히 그분을 미끼로 삼아서…….”
눈앞으로 화살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섬뜩한 깨달음이 그를 덮쳤다.
“그 아이는, 어디 갔지.”
말을 할 여유는 거기까지였다. 발라크는 바로 이전 상황을 기억해 냈다. 네 어머니를 찾아서 수도로 데려왔다던 네이튼의 말과 창백하게 얼어붙던 세벨리아의 모습.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그녀는 심호흡을 하고 네이튼의 제의를 수락했다.
[삼촌과 함께 가고 싶어요.]그제야 사람들은 그 자리에 법적으로 그녀의 혈육인 칼 어펜츠 또한 함께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네이튼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유는 너무나 명확했다.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 코넬리아. 그분은… 홀로 너를 낳으신 분이란다.]그의 말을 풀이하자면 이러했다. 세벨리아의 어머니는 다른 이들에게 제 정체를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는 사생아를 낳은 여인이니까.
[제게만 정체를 알리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좋아요. 그렇다면 공작님께서 문 앞까지 절 에스코트해 주시는 건 개의치 않아 하시겠군요.] [그, 그건… 그래.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구나.]그렇게 세벨리아는 용감하게도 네이튼의 덫으로 걸어 들어갔다.
“젠장!”
회상을 끝낸 발라크는 바로 회장을 뛰쳐나갔다. 그들이 어디로 향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발라크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샤테이안도 이번에는 그를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루드밀을 시켜 약속한 시각이 지나면 제 휘하의 귀족들을 데리고 그들이 향한 방향으로 오라 지시했다.
그들이 디하트가 있는 복도를 발견했을 무렵이었다.
“꺄아아악!”
“아아악! 그만둬. 저리 가!”
사람들의 비명이 문틈 새를 뚫고 복도를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