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1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17)화(117/171)
시간은 발라크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무렵으로 돌아간다. 세벨리아는 네이튼의 제의를 수락하고 그의 뒤를 따라 전시회장을 나왔다.
“괜찮습니까?”
앞만 보고 걷는 그녀의 귓가에 디하트가 속삭였다. 세벨리아는 네이튼의 등에 계속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디하트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네이튼을 비롯한 일황비 측이 준비한 함정이 그만큼 치졸하고 추악한 수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라니.’
디하트는 혀를 찼다. 그래, 꼴에 가족이라 이건가. 그들은 세벨리아에게 어머니가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매력적인 미끼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으니까.
‘이럴 때가 아니지. 다시 한번 복기해 봐야겠어.’
디하트는 자꾸만 세벨리아의 안색을 살피기 위해 돌아가는 제 고개를 억지로 고정하며 계획을 한 번 더 되짚었다.
일단 네이튼은 어떤 핑계를 대서든 세벨리아에게 약물을 먹이려 들 것이다. 세벨리아가 그에 저항하지 않고 약물을 먹는 척하며 해독제를 함께 삼키고 제게 신호를 보낸 후 때를 맞춰 들어가면 네이튼은 분명 강경하게 나올 것이다. 그녀가 코넬리아임을 인정했다며 뻗대겠지.
‘그때 클로드가 기사와 귀족들을 이끌고 이곳으로 올 거고.’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이고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었을 때. 네이튼은 세벨리아에게 명령을 내려 사람들 앞에서 그녀가 코넬리아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해독약이 없을 때의 이야기야.’
네이튼이 그녀에게 인정하게 만들려는 그 순간, 세벨리아는 멀쩡한 얼굴로 그의 말을 반박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제게 대접한 차와 구금 중인 로덴의 증언으로 웨든 후작가의 실체를 낱낱이 밝힐 예정이었다.
그게 디하트와 세벨리아가 머리를 맞대고 짜낸 시나리오였다.
‘그 의원의 능력이 생각보다 출중해서 다행이군.’
워츠는 고작 하루 만에 해독제로도 모자라 약물의 원재료인 환각제를 감별해 내는 시약까지 만들어 냈다. 그 덕에 약물의 원재료가 제국에서 금지된 것임을 알았으니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다.
‘돌아가면 사례라도 해야겠어.’
짧은 한숨을 뱉은 디하트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 순간이었다. 세벨리아가 잠깐 그를 돌아보았다. 찰나의 순간 마주친 푸른 눈은 투명한 얼음처럼 차갑고 냉혹했다.
그저 우연인 듯, 세벨리아의 시선은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순간 디하트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차갑고 냉혹한 눈빛. 분명 자신이 아닌 네이튼을 향한 것임을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디하트는 심장이 옥죄는 기분이었다.
“후…….”
디하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자신의 역할이었다. 그러던 와중 어느덧 앞서가던 네이튼의 걸음이 멈췄다.
“이곳이야. 안쪽에서 널 기다리고 계신다. 참, 공작께서는 이곳에서 용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시지요.”
상아를 깎아 조각을 새긴 화려한 문이었다. 세벨리아는 새삼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어머니라.’
세벨리아는 천천히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았다. 힘을 주려는데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녀는 헛웃음을 삼켰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 한 자락 희망을 품은 꼴이라니. 차갑게 가라앉았던 푸른 눈의 온도가 한층 더 내려갔다.
이 문 안쪽에 정말 그녀가 있을까.
‘아니.’
세벨리아는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 안에 있는 건 어머니의 대역일 것이다. 그녀는 제가 들어가자마자 눈물을 흘리고 껴안으며 미안하고 사랑한다 속삭이겠지.
그래, 이건 함정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마주하는 상대가 누구든 상처로만 남을 게 뻔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때때로는 마주해야만 하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바로 지금처럼.
세벨리아는 거침없이 문을 열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네이튼이 따랐다.
* * *
‘아, 어쩌면 이리도 뻔할까.’
결말을 아는 연극을 지켜보는 기분이 이러할까. 세벨리아는 눈물을 흘리며 제게 다가오는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며 속이 뒤엉켰다.
“내 아가, 불쌍한 내 딸!”
엉엉 울던 중년 여인은 세벨리아를 껴안더니 그녀를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그렇게 두서없는 말을 내뱉으며 울기를 한참. 여인은 겨우 손수건을 내려놓고 세벨리아와 얼굴을 마주했다.
그 순간 세벨리아는 아버지가 굉장히 고심해서 이 대역을 골라 왔다는 걸 깨달았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힌 세벨리아가 애써 말을 꺼냈다. 그러자 여인은 우는 듯 웃더니 세벨리아의 손을 붙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엄마라고 불러야지, 아가. 그래 우리 딸이 엄마 이름이 궁금했구나. 그것만 궁금했겠어? 다른 것도 묻고 싶은 게 많겠지.”
“…….”
“무엇이든 괜찮아. 원망해도, 화를 내도 괜찮단다. 너는 그래도 돼, 아가. 그러니 오늘 하루만큼은 마음대로 하렴. 너를 혼자 내버려 둔 죗값을 그렇게라도 받을 수 있다면 나는 그걸로도 족하단다.”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의 여인이 가짜라는 걸 알면서도 붙잡힌 손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런 세벨리아를 구원한 건 우습게도 그녀의 지나친 다정함이었다.
“참, 좋은 소식이 있단다 얘야. 네 아버지께서 우리가 같이 살 수 있도록 해 주신다는구나. 원한다면 수도가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조용히 살게 지원해 주시겠대.”
‘어머니’가 아버지란 단어를 꺼내는 순간 현실감이 물밀듯 밀려와 그녀를 덮쳤다.
“아.”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야, 하고 누군가 그녀의 등에 칼을 찌른 것 같았다. 세벨리아는 고통 속에서 안도했다.
‘그래, 그녀는 가짜였지.’
안심한 세벨리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어머니의 손을 맞잡았다. 참 이상했다. 친아버지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한 뭉클한 애정을 한순간이나마 가짜 어머니를 통해 느꼈다니.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이었다. 세벨리아는 잠깐이나마 부모님의 애정을 체험한 거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가 어머니를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저와 어머니를 보내 주실 생각이라면… 지금 저 문과 창가를 가로막은 자들은 누구죠?”
“…….”
길게 속일 생각조차 없었구나. 세벨리아는 어느새 비열한 빛을 띤 중년 여인의 눈을 보며 소리 없이 탄식했다. 처음부터 그녀는 시간 끌기용이었던 것이다.
“잠깐이지만 즐거웠지요?”
여인이 웃으며 스스럼없이 세벨리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세벨리아는 미동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다시 다정한 어머니의 얼굴로 돌아온 여인이 부드러이 웃으며 차를 따랐다.
“곧 전시회 개최를 축하하는 성대한 불꽃놀이가 열릴 거예요. 일황비 전하께서 손수 준비하신 일이죠.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늘을 수놓는 아름다운 불꽃을 보기 위해 자리를 비울 테고… 남는 건 단란한 우리 가족뿐이겠네요.”
작게 웃은 여인이 찻잔을 들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는 듯 찻잔을 내밀었다.
“마셔요, 아가씨. 지금 마신다면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을 테니까.”
여인은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세벨리아에게 약을 탄 차를 권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세벨리아는 무심한 어조로 툭, 질문을 던졌다.
“내가 이곳에 혼자 오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강행하겠다는 건가요?”
“어머. 같이 온 분이 계셨구나.”
중년 여인은 잠시 고개를 기울이는가 싶더니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도 모르고 아가씨를 이리로 데려왔을 것 같아요?”
“무슨…….”
불현듯 드는 안 좋은 예감에 세벨리아가 환영을 일으키려던 순간이었다. 네이튼이 그녀의 뒤에서 나타나 어깨를 붙들었다.
“불쌍하고 오만한 내 동생, 주술사의 결계에 발을 들였으면서도 그것 하나 눈치채지 못하니.”
“……!”
“마음껏 소리 질러 봐라, 세벨리아. 그 같잖은 환영도 원하는 대로 불러내 봐. 그 누구도 네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멍청한 환영들은 너를 지키다 산산이 부서지게 될 테니.”
푸른 눈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수였다. 북부의 주술을 천대하던 이들이 주술사의 결계를 이용하다니.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노릇. 세벨리아는 즉각 환영을 만들어 냈다. 곧 수백 마리의 작은 새가 허공을 휩쓸었다.
푸드덕, 날개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네이튼이 광기 어린 웃음을 쏟아 냈다.
“하하…! 제법 하는데! 그래, 이 정도 능력은 되어야지!”
방 안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몸통을 부딪쳐 오는 새들 때문에 누구 하나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다. 세벨리아는 단숨에 방을 가로질렀다.
“저리 비켜!”
끝까지 제 앞을 가로막으려는 하인들을 향해 커다란 환영을 날려 보낸 세벨리아는 금세 문까지 닿았다. 등 뒤에서는 네이튼이 연신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입이 바짝 말랐다. 지금 당장 이 문을 열어야 했다. 문 너머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를 향해 가야 했다.
“디하트!”
세벨리아는 있는 힘껏 그를 부르며 문고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차가운 감각이 손끝을 적시고, 그녀의 눈에 환희가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악!”
그녀의 시도는 어느샌가 발밑에서 기어 나온 검은 밧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윽……!”
카펫 밑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결계는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다.
‘방심했어.’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며 어깨를 떨었다. 눈앞에 멋지게 광을 낸 구두가 보였다. 엎어진 세벨리아의 앞에 보란 듯이 선 네이튼이 오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디어 아버님이 만족할 만한 보고를 드릴 수 있겠군.”
세벨리아는 점차 제게 다가오는 하인들을 바라보며 몸부림쳤다. 그들의 손이 세벨리아의 팔다리를 붙잡고 억눌렀다. 턱이 붙잡히고 입술이 열리는 와중에도 세벨리아는 저항을 포기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아주 잠깐이라도 이 결박이 풀린다면……!
‘제발!’
그때,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그녀를 중심으로 새하얀 빛이 터져 나가며 그녀를 붙잡은 하인들을 감쌌다.
화아악-!
세상이 뒤집혔다. 아름답게 꾸며져 있던 실내는 마치 실력이 형편없는 화가가 제 작품을 한데 모아 붙인 것처럼 여러 광경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었다.
“이게 무슨……!”
네이튼의 경악에 뒤이어 끔찍한 비명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꺄아아악!”
“아아악! 그만둬. 저리 가!”
“너, 너는! 아냐, 내가 한 게 아니라고!”
바닥을 기어 오는, 천장에서 뚝 떨어져 내리는, 발목을 적시는 강물 속에서 튀어나오는 이름 모를 시체들. 그러나 네이튼과 하인들의 기억 속에서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그들이 희롱하고 농락한 불쌍한 이들.
그들이 세벨리아를 통해 실체를 가지고 다시금 현실에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