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0)화(120/171)
[벨라 어펜츠 양, 몸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네만 슬슬 약속을 지킬 때가 되지 않았나? 늦지 않게 찾아와 줬으면 좋겠는데. 가능하면 편지를 받고 삼 일 내로 답장을 보내 날짜를 잡았으면 좋겠군.]제국의 이황자라기엔 가볍게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러나 무례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무거움을 덜어 낸 문장들은 어딘가 일방적인 친밀함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세벨리아는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구름처럼 하얀 머리칼과 토끼처럼 붉은 눈동자를 가졌던 샤테이안 벨크람. 전시회관에서 만나기 전까지 그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던 탓이었다.
‘생각보다 수더분한 성격이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성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세벨리아는 아수라장 속에서도 내내 냉정함을 유지하던 붉은 눈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평범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차가운 눈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다. 아무래도 수상했다. 세벨리아는 경계심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해서 편지를 읽어 내렸다.
“흐음.”
편지는 끝까지 동일한 기조를 유지했고, 그래서 세벨리아는 속이 불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편지에서 묻어나는 이 미묘한 호의의 출처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세벨리아는 첨언에 이르러 마음이 편해졌다.
[아, 한 가지 더 덧붙일 게 있는데. 그대와 나 외에도 한 명이 더 자리를 채울 것이니 놀라지 말았으면 좋겠군. 그대에게 도움이 될 만남이기도 하니까 걱정 말고.]앞에서 구구절절 이어지던 친근하다 못해 자못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들은 다 이걸 위한 발판이었나 보다. 세벨리아는 말없이 쌓여 가던 불편함이 일순간 소거되는 걸 느꼈다.
“무슨 내용이길래 표정이 일 초마다 달라져요?”
“아.”
클로드는 궁금증이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편지를 건네줄까 하다가 관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과보호 상태인 그가 샤테이안 황자의 친밀한 어조를 어떻게 해석할지 몰랐다.
“삼 일 내로 답장과 함께 입궁할 날을 정하라는 내용이었어요.”
두 번 접은 편지를 봉투 안으로 넣으며 세벨리아가 말했다.
“벨라, 거짓말을 하려면 좀 더 뻔뻔하게 해야죠.”
“…티가 났어요?”
“손끝이 흔들리잖아요. 그러다 종이에 손 베여요.”
한숨을 내쉰 세벨리아가 봉투를 내려놓았다. 스승의 눈치인지 뭔지 클로드는 다른 사람보다 더 정확하게 자신을 파악하곤 했다. 마치 데니사가 둘로 늘어난 느낌이라 세벨리아는 조금 소름 끼쳤다.
“회동 자리에 손님 한 분이 더 참석할 거래요. 그리고 그 손님이 제게 도움이 될 거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적지 않으셨네요. 그게 다예요.”
“도움이 될 손님이라고요? 흐음…….”
펄쩍 뛸 줄 알았던 클로드는 의외로 담담했다. 그는 손등에 턱을 대더니 무언가를 깊이 고민했다.
의외의 반응에 세벨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클로드가 화르륵 불타올라 자신도 같이 입궐해야겠다며 난동을 부릴 줄 알았다. 근래 들어 클로드와 디하트는 제 안전에 대해 극히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저택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말아요. 아니, 나가도 되지만 무조건 우리 둘 중 한 명과 동행해야 해요.]물가에 내놓은 세 살짜리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태도에 어처구니가 없기도 했지만… 그 속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일황비 측이 주술사를 끌어들여 이중함정을 설치했을 거라는 예측은 그 누구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두 남자의 자책감은 끝을 모르고 깊어져만 갔다.
어제저녁에도 갑자기 열이 오른 자신 때문에 디하트는 혼비백산해서 워츠를 거의 둘러메듯 데려왔었다. 단순히 능력을 과용한 탓이라고 말하기도 전에 뛰쳐나간 그 때문에 얼마나 놀랐던지.
‘그러고 보니 디하트는 어디 있지?’
급작스러운 불안함에 세벨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천천히 시간을 뒤로 돌려 보았다.
아침 식사를 함께한 뒤 오전에 잠깐 정원에서 스쳤고 그 뒤로 모습을 보지 못했다. 클로드도 워츠도 그가 어디로 갔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 말없이 나간 거야?’
세벨리아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새벽 복도에서 그를 마주친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자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았다.
평범한 옷으로도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그 파렴치한 몸. 서류 더미에 파묻어 놓아도 그것을 뚫고 나올 만큼 강렬하고 압도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 기묘한 조합이 이끌어 내는 불순한 감상까지.
‘그게 어딜 봐서 일반 사람들 속에 섞여 들 수 있는 모습이야.’
변장이라기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모습으로 그는 로덴을 붙잡아 왔었다. 그것도 술집이 즐비한 밤의 뒷골목에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환한 대낮이다. 하늘 높이 눈 부신 태양이 떠 있고 거리마다 사람들이 즐비한 화창한 주말의 낮.
“…안 돼.”
그 남자를 그런 모습으로 저잣거리에 풀어 둘 수는 없었다. 그건 걸어 다니는 덫이나 다름없었다. 세벨리아는 제발 제 추측이 틀렸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생각을 끝마친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손님의 정체를 알 것 같은데 말이죠.”
“네?”
디하트를 잡으러 가야 한다는 생각에 빠진 세벨리아는 클로드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녀가 되묻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알음알음 퍼진 소문이지만 아마 확실할 겁니다. 이황자 곁에 환영술사가 있다는 이야기가 예전부터 돌았다더군요.”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세벨리아는 문과 클로드를 번갈아 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황자가 저와의 만남에 그를 동석시킬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이 크죠. 그렇게 생각하면 왜 그때 이황자가 당신의 편을 들었는지도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확실히 그러네요. 단순히 일황비파인 네이튼을 견제한다기에는 제게 너무 우호적이었어요.”
사전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지옥도를 마주했을 경우, 다른 사람이라면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그 끔찍한 광경이 가해자들로부터 끌어 올린 것이라 하더라도 그걸 현실화한 건 자신의 능력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샤테이안 황자의 침착한 반응과 대처도 이해가 가네요. 그때는 단순히 사람들을 빨리 되돌려 보내려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찌 되었든 그는 일황비의 가장 큰 적이니 큰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클로드가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아, 물론 혼자 입궁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예요.”
“그럴 줄 알았어요.”
세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태연한 그녀의 반응에 클로드는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무력감을 또다시 맛보고 싶지는 않으니.
그가 무거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이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일레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공작님, 혹시 여기 계십니까?”
“여기에는 나와 벨라 양 둘 뿐이네만. 공작님께서 또 자리를 비우셨는가?”
“아, 용무가 있어서 외출하신 건 아닙니다. 그런 일에는 절 데려가시니까요.”
일레이의 단호한 대답에 클로드는 조금 당황했다.
“그, 그렇군. 내가 마지막으로 공작님을 본 건 집무실에서였네만. 그곳에도 계시지 않으면 다른 곳을 찾아보는 게 좋겠네. 그런데 급한 용무인가?”
클로드가 문간에서 일레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세벨리아는 자리에 앉아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조용히 주워들었다.
“아! 그럼 저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으음?”
“사실 바로 수도경비대에 들를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이걸 공작님께 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로만 전달해 주시면 괜찮습니다!”
“그래도 상관없는 거라면…. 알겠네.”
“감사합니다!”
경쾌한 작별 인사와 함께 문이 닫히고 클로드가 무언가를 한 아름 품에 든 채 돌아왔다. 세벨리아는 돌아가려는 고개를 억지로 고정한 채 우아한 태도로 차를 마셨다.
“이것 참.”
클로드가 자리에 앉아 테이블 위에 그것들을 쏟아 놓고 나서야 세벨리아는 자연스럽게 그를 향해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테이블 위에 산을 이룬 건 보기에도 화려하고 아름다운 초대장들이었다.
“디하트의 앞으로 온 것들인가 봐요?”
요란스럽지 않은 색깔의 봉투 위에는 가지각색의 잉크로 화려한 이름들이 새겨져 있었다. 하나같이 수도에서 내로라하는 가문에서 보내온 것들이었으며…….
“낯익은 이름들이 몇 있네요.”
과거 북부와 중앙 간의 정략결혼의 대상으로 물망에 올랐던 영애들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이런 식으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세벨리아는 조금 묘한 감정이 들었다.
북부 공작가의 안주인이 된다는 건 생각 외로 탐나는 일이었나 보다. 그 무심한 남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공을 들이다니.
치를 떨며 결혼을 거부한 넬리아의 경우만 보아 왔던 세벨리아는 뒤통수를 한 대 엊어 맞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새삼 디하트와 제가 더 이상 부부가 아니라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그를 원하는 여성은 이리도 많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부와 명예에 눈이 멀어 탐욕스러운 손을 뻗는 사람들이 세상천지에 널려 있었다.
정작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가 어떤 고통을 견디며 살아왔는지, 끔찍한 과거가 그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는 하나도 모르면서.
‘디하트의 진짜 모습을 아는 건 나뿐이야.’
그를 무릎 꿇리고, 눈물 흘리게 하고, 밤잠을 못 이루게 할 만큼 걱정하게 만들 수 있는 건 나뿐이라고.
“……!”
“벨라, 왜 그래요?”
“아뇨, 아니에요. 자, 잠시 더워서. 먼저 나가 볼게요. 미안해요.”
“벨라?”
자리를 박차고 나온 세벨리아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며 정원으로 달려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때리고 입 안으로 파고들어 헛구역질이 나왔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도대체……!”
무심코 튀어나온 본심.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숨기고 있었던 이기적인 욕심. 그것과 눈이 마주쳐 버린 세벨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후…….”
그녀는 분수대에 이르러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물방울들이 얼굴까지 튀어 올라 붉게 달아오른 뺨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아래에 앉아 열을 식히던 세벨리아는 곧 다시 한번 낮은 비명을 터트려야 했다.
분수대 너머 작게 세워진 온실. 그 안에서 꽃을 다듬던 디하트가 마치 계시를 받은 것처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세벨리아는 보고 말았다.
무심하고 차가운 그의 얼굴에 환희가 차오르는 광경을, 그의 금빛 눈동자 안에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애정이 가득 담기는 모습을 말이다.
“아…….”
끝까지 몰랐어야 했는데.
그러나 이미 늦어 버렸다. 세벨리아는 온실의 문을 열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장미 다발이 선명하게 남았다.
“벨라.”
달콤한 꽃향기가 사방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