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1)화(121/171)
검은 마차가 황궁의 문을 넘은 건 오전의 일이었다.
“인버네스 공작의 마차로군요.”
“네이튼 웨든과 관련해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궁정을 한가로이 산책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마차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피어오르는 속삭임 속에서 마차는 머뭇거림 없이 제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황후를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살아남은 이황자 샤테이안. 그가 기거하는 붉은 수정궁. 장밋빛 지붕이 인상적인 목적지에 가까워지자 세벨리아는 고개를 돌려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알아차린 디하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금빛 눈동자에 약간의 의문이 스치고 기다렸다는 듯 그가 말했다.
“어디 불편합니까?”
“이보다 더 편할 수는 없을걸요.”
세벨리아가 푹신하다 못해 몸이 빠져들 것 같은 쿠션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대로 누워서 자도 되겠어요. 작게 속삭이는 그녀의 곁에서 클로드가 큭큭 웃었다.
“동의해요. 그렇지 않아도 마차에 타자마자 그대로 잠들어 버릴 뻔했지 뭐예요.”
“클로드 씨도요?”
“그럼요. 다만 그렇게 했다간 누군가가 날 마차 밖으로 쫓아내 버릴까 봐 열심히 두 눈 부릅뜨고 버텼죠.”
클로드의 장난스러운 어조에 디하트가 눈에 힘을 줬다.
“벨라 양은 몸이 좋지 않으니 이 정도 준비는 당연한 거야.”
“누가 뭐랬나? 그냥 푹신푹신해서 잠이 온다는 소리였어.”
“…….”
디하트가 눈썹을 치켜올리자 클로드가 두 손을 들며 항복 표시를 했다. 디하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벨리아는 특기를 발현한 이후 몇 번이나 열이 올랐다. 그의 걱정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었다.
“벨라, 클로드 말은 신경 쓰지 말아요. 피곤하다면 한숨 자는 게 당신 건강에도 좋을 겁니다. 의자 밑에 담요를 챙겨 놨으니 그걸 덮어요.”
“진심은 아니죠? 지금 막 샤테이안 황자님께서 창가에서 우리를 바라보신 것 같은데.”
세벨리아가 창밖을 흘끗거리며 말하자 디하트가 여상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서요?”
세벨리아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알 수 없는 눈빛에 디하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원한다면 이대로 황궁을 한 바퀴 구경한 뒤 다시 와도 되고, 아니면 피곤하다는 이유로 돌아가도 상관없어요. 내가 원한다면 언제든 그를 만날 수 있으니.”
담담한 목소리와 차분한 눈동자는 사실만을 읊고 있었다. 그는 북부를 이끄는 인버네스 가문의 수장이자 권능의 주인이었다. 그에 비하면 샤테이안은 비록 황후 소생이었으나 아직 황위에도 오르지 못한 한낱 황자일 뿐.
아무리 이번 사건의 수사 일반을 그가 맡았다고는 하나 권력과 힘에서는 이쪽이 압도적이었다.
‘지금까지는 협력적이었지만 그것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이유 모를 호의는 불쾌하기 마련이다. 그만큼 샤테이안에 대한 디하트의 태도는 냉소적이었다.
“그래서 어떤 걸 원하죠?”
여차하면 마차를 돌릴 태세로 디하트가 물었다. 세벨리아는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흔들었다.
“잘 보여야 하는 입장인데 굳이 적대감을 살 필요는 없죠.”
“알았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당신 상태가 나빠지면 바로 돌아갈 거라는 건 염두에 둬야 해요.”
세벨리아는 오늘 아침에도 해열제를 먹고 왔다. 디하트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세벨리아는 그 시선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벨라? 역시… 몸이 안 좋은 거죠?”
“아니에요!”
세벨리아가 튕기듯 몸을 뒤로 기대며 손사래를 쳤다. 디하트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녀를 훑었다. 세벨리아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정말이에요?”
“그럼요. 아, 봐요. 샤테이안 황자님께서 직접 마중 나오시네요.”
세벨리아는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디하트의 시선이 따라붙는 걸 느꼈지만 마주할 자신은 없었다.
세벨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네.’
미련인지 뭔지 모를 마음을 자각한 뒤로 내내 이 모양이었다.
“동석한다는 손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걸. 안에 들어가야 만날 수 있다는 건가.”
클로드의 낭랑한 목소리가 긴장감을 깨트렸다. 그사이 마차는 궁 앞의 너른 분수대를 지나 속도를 줄였다.
“돌아가는 건 텄군요.”
디하트가 혀를 차는 동안 샤테이안이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하나로 단정히 묶은 하얀 머리칼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예상대로 복작복작한 모습이로군. 어서 오게.”
마차 안을 훑은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 * *
색다른 분위기의 궁이었다. 세벨리아는 내부를 장식한 이색적인 흉상과 도자기들에 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모친께서 루브라디의 공주라고 하셨지.’
바다 건너 남쪽에 위치한 루브라디에서 오신 아름다운 황후. 세벨리아는 앞서가는 샤테이안의 하얀 머리칼을 보며 그녀를 떠올렸다.
어린 샤테이안을 두고 급하게 세상을 떠나 버린 황후.
‘그래서인가.’
붉은 수정궁은 본래 황후의 거처지, 황자에게 주어지는 곳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었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꽤나 힘겨운 투쟁을 벌였을 게 분명했다.
세벨리아는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황후의 손길을 통해 그녀를 향한 샤테이안의 애정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샌가 울적함을 느끼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놀랐다.
아직도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접지 못했나. 세벨리아는 아연한 감정으로 터덜터덜 복도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샤테이안이 걸음을 멈췄다.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대에게 일러 줄 것이 있어.”
휙 하고 몸을 돌린 샤테이안이 부드럽게 웃었다. 디하트가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를 응시했으나 샤테이안의 시선은 오로지 세벨리아에게만 향해 있었다.
“사실 자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손님이 독대를 원해서 말이야.”
“벨라,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세벨리아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디하트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처음부터 이쪽이 목적이라고 미리 말씀하시지 그랬습니까, 이황자 전하. 그리했다면 헛걸음할 일도 없었을 텐데.”
“다른 목적도 없던 건 아니야. 폐하께서는 그날 벌어졌던 일에 아주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시거든. 죽은 이들이 산 자들의 땅을 밟은 일에 누가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을까?”
샤테이안은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운 시커먼 남자의 낯에도 놀라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다만 나는 아가씨를 배려하고자 했을 따름이야. 누가 떠올리든 충격적인 광경이었지. 그러니 당사자에게 굳이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할 필요가 있나.”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샤테이안이 말했다.
“그녀의 충실한 대변인이 바로 곁에 있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말하자면 자신은 디하트와, 세벨리아는 손님과 각자 따로 시간을 보내자는 말이었다.
디하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헛웃음만 내뱉는 그의 앞에서 샤테이안은 능청을 떨었다.
“됐습니다. 그날 일과 관련해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서면을 통해 제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차갑게 일갈한 디하트는 세벨리아와 클로드를 데리고 돌아서려 했다. 그때, 내내 상황을 지켜보던 세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어째서 그 손님이라는 분이 제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신 건가요?”
“벨라.”
세벨리아가 손을 들어 디하트의 만류를 막아서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샤테이안이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 모습에 세벨리아는 그 손님이 단순한 환영술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고작 그런 이유로 나를 이곳까지 불러 대면시키려 할 리 없어.’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환영술사를 동석시키고자 했다면 처음부터 그를 데리고 나왔으면 될 일. 하지만 샤테이안은 일부러 까다로운 방식을 자처했다.
세벨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조용히 샤테이안을 지나쳐 그의 뒤에 있는 문을 응시했다. 굳게 닫힌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은 분명 평범한 이가 아니리라.
‘하지만 동시에 내게 도움이 될 이라는 거지.’
과연 그는 누구일까. 그리고 이황자는 도대체 왜 이 만남을 원하는 걸까. 세벨리아의 마음속에 의문이 솟아올랐다. 그때, 샤테이안의 미성이 복도를 울렸다.
“그날 전시회장에서 분노한 건 그대만이 아니었네.”
“무슨 말을…….”
“네이튼 웨든이 데려온 ‘그녀’ 말일세.”
어머니를 언급하는 샤테이안의 말에 세벨리아의 낯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가 호흡을 멈추자 디하트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샤테이안은 흥분한 짐승을 피하듯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거야 원, 나는 분명히 말했어. 그대에게 도움이 될 이라고 말이야.”
손등으로 문을 툭툭 두드리며 샤테이안이 말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섬뜩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결정하게, 벨라 어펜츠. 진실로부터 눈을 돌린 채 안온한 삶을 살아갈지, 아니면 다시 한번 풍랑에 몸을 맡길지.”
“…….”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세벨리아는 성큼 걸음을 옮겼다. 파도치듯 넘실거리는 푸른 눈동자가 새파란 궤적을 남기며 움직였다.
“벨라, 괜찮겠습니까?”
“그 아수라장 속에서도 전 괜찮았어요.”
“그건…. 하아.”
“전하의 권유를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느새 문 앞에 당도한 세벨리아가 샤테이안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와 같은 분노를 품었다는 그자가 과연 누구인지, 만나 봐야겠습니다.”
문을 열라는 듯 바라보는 당돌한 시선에 샤테이안은 작은 웃음을 삼켰다.
“좋아요, 좋아.”
화난 모습이 꼭 발라크를 닮았군. 샤테이안은 자신이 찾아낸 공통점에 자그마한 즐거움을 느끼며 직접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이런 유쾌한 순간을 시종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길.”
가볍게 등을 떠미는 손에 세벨리아는 눈 깜짝할 사이 응접실 안에 서 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부드러운 빛에 잠시 적응하는 도중,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벨라, 벨라 어펜츠 양이십니까?”
군청색 머리에 하늘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가 어쩐지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