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2)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2)화(122/171)
“이렇게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아, 인사가 늦었죠. 발라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사실은 그때 인사를 건네고 싶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발라크라고 소개한 남자는 어딘가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횡설수설하다 못해 허술하게까지 느껴지는 모습에 세벨리아는 자연스레 맥이 풀렸다.
샤테이안의 말을 듣고 경계심을 한껏 올렸는데… 적대시하기엔 너무 겁을 먹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정말로 날 만나고 싶었나 봐.’
하얗게 질린 얼굴과 잔뜩 팽창한 눈동자에 세벨리아는 그의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 차를 따라 주는 손은 덜덜 떨리다 못해 금방이라도 곤두박질칠 것만 같았다.
세벨리아는 테이블 위로 튀어 오르는 찻물을 가만히 보다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제가 할까요?”
“아니, 아닙니다. 아, 미안해요. 언제 이렇게……!”
세벨리아의 손등을 적신 찻물을 본 발라크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당황한 그는 손수건을 꺼내다 불현듯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미안합니다.”
어딘가 들떠 있던 하늘색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억지로 흥분을 가라앉힌 그가 천천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다면 이걸 써 주시겠습니까?”
“고마워요.”
세벨리아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걸 거두고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손수건 귀퉁이에는 발라크라는 이름과 그 위를 장식한 은색 잎이 작게 새겨져 있었다.
‘은색 잎?’
가만히 보니 월계수 잎으로 보였다. 은색 월계수 잎을 상징으로 쓰는 가문이 어디인가 생각하며 세벨리아는 손등에 튄 찻물을 닦았다. 애초에 발라크가 느릿느릿 차를 따르던 터라 찻물은 모두 식어 있었다.
그사이 테이블을 정리한 발라크가 시종에게 무어라 지시를 내리고 돌아왔다. 세벨리아가 의문 섞인 눈으로 그를 응시하자 발라크가 간단히 답했다.
“차와 함께 다과를 새로 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필요까지야…….”
“처음 뵙는 자리인데 당연한 일이지요.”
방금 전까지 입술을 떨던 사람은 어딜 간 걸까. 단호한 눈빛으로 잘라 내는 발라크에게서는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가 풍겼다.
세벨리아가 그 익숙함의 근원을 찾기도 전에 발라크가 목을 울려 헛기침을 했다. 슬슬 본론을 꺼내려는 낌새에 세벨리아가 자세를 곧게 폈다.
“황자 전하로부터 미리 언질을 받으셨겠지요.”
“네, 그래서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어요. 이렇게 따로 자리를 마련해 주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요. 제가 돌아가려 하자 황자님은 이런 말까지 하며 저를 붙잡으시더군요.”
세벨리아는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제 어머니를 찾았다는 네이튼 웨든의 말에 왜 발라크 씨께서 분노하셨던 건가요?”
발라크는 눈꺼풀을 가늘게 떨더니 탄식했다. 꾹 다문 잇새로 샤테이안 이 자식, 이라는 음성이 살짝 들린 것도 같았으나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요. 전하께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군요…….”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은 채 발라크는 침음했다. 세벨리아는 차가운 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발라크가 먼저 답하기 전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을 태세였다.
발라크는 고개를 들어 냉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벨리아를 마주했다. 그 고집스러운 얼굴이 꼭 아버지에게 맞서던 고모님을 떠올리게 해 그는 자신도 모르게 흐린 미소를 지었다.
“……?”
세벨리아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깐의 일이었다. 발라크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더니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벨라 양, 그대가 들은 대로입니다. 그날 샤테이안이 날 말리지 않았더라면 전시회장은 소동이 일어나기도 전에 무너졌을 겁니다. 그만큼 분노를 참을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도대체 왜, 발라크 씨가…….”
“왜냐하면 그대의 어머니가 저의 하나뿐인 고모님이기 때문이지요.”
무거운 정적이 어깨를 짓눌렀다. 발라크는 그에 지지 않고 손 아래 놓인 펜던트를 꽉 붙들었다.
“벨라 양, 그대의 어머니는 그대를 낳으시고 지금껏 잠들어 계십니다. 그분은 결코, 단 한 번도 당신을 버린 적이 없어요. 그 어떤 순간에도, 내 아버지가 당신을 죽이고자 한 순간에도 온몸으로 당신을 지켜 내셨습니다.”
달칵. 손끝으로 펜던트를 연 발라크가 갈라지는 목소리를 끝까지 붙들며 말했다.
“그러니 내가 분노하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죽음에 맞서 당신을 지키신 분을 감히 그런 식으로 모욕하는 걸, 참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흐트러지는 목소리 앞에서 세벨리아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발라크는 뒤이어 믿지 못하겠다면 다른 증거를 더 줄 수 있다며 품에서 뭔가를 더 꺼내고 있었다.
그러나 세벨리아는 그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펜던트가 열린 뒤 세벨리아는 그저 가만히,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 안의 자그마한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나이 들면 저 모습이 되겠구나.
내 눈은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니었구나.
강렬한 확신이 몸을 감쌌다. 심장이 덜컹거리고 눈가가 홧홧해졌다. 울컥 뜨거운 무언가가 차오르는 목덜미를 붙잡고서 세벨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까?!”
우당탕 소리와 함께 발라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그가 잔뜩 쌓아 둔 편지며 종이 뭉치가 흩날렸다. 세벨리아는 발치로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그것들을 흐릿한 눈으로 보며 탄성을 흘렸다.
[사일러스, 난 아직도 궁금해. 그날 당신은 왜 그랬을까?]힘 있고 기품 어린 필체로 써 내려간 부드러운 문장들. 그 궤적에서 느껴지는 무거운 감정들을 보며 세벨리아는 따가운 눈을 깜빡였다.
그건 어머니가 아버지와 나누었던 연서와 그에게 배신당한 뒤 홀로 써 내려간 편지들이었다.
‘당신은 나를 버린 게 아니었구나.’
나는 적어도 어머니에게는 미움받지 않았구나. 빛바랜 편지 위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 * *
쿵쾅거리는 소리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발라크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이런.”
샤테이안이 탄성을 흘렸다. 그들은 세벨리아가 들어간 응접실 바로 옆에 위치한 방에서 숨 막히는 침묵을 공유하던 중이었다.
“이미 늦었나.”
샤테이안이 손에 턱을 괴며 뛰쳐나가는 디하트의 등을 바라보았다. 클로드는 한숨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잘 막아 보게. 내 궁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이 없길 바라거든.”
가볍기 그지없는 조언에 클로드는 할 말이 많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사이 디하트는 이미 응접실 문을 산산조각 냈다.
“벨라!”
디하트의 눈이 번쩍였다. 그의 시야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세벨리아의 모습이 잡혔다. 그녀의 곁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발라크는 알 바 아니었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디하트는 조금도 참지 않았다. 뒤따라온 클로드가 그를 말리기도 전에 무언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미쳤다는 소문이 정말이었군.”
날아오는 단검을 튕겨 낸 발라크가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온몸으로 뿜어내는 살기에 클로드가 다 숨이 막힐 정도였다.
“다치기라도 했으면 어쩔 셈이었지?”
“네가 어쭙잖게 튕겨 내는 바람에 다칠 뻔한 거겠지. 보아하니 제국인이 아니군. 벨라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집착한다는 소문도 사실인 것 같고.”
낮게 읊조리는 발라크의 말에 디하트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말로 할 때 그녀에게서 떨어지는 게 좋을 거다. 오늘은 이황자의 손님이더라도 내일은 강변에서 목 꺾인 이름 모를 시체로 발견될 수도 있으니.”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
발라크가 세벨리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질적인 하늘색 눈이 고집스레 빛났다. 새끼를 지키는 부모 같은 모습이었다.
디하트는 불쾌함이 목 끝까지 차오르는 걸 느꼈다.
아니, 이건 불쾌함이 아니다. 디하트는 이를 사리물었다. 두 사람이 기 싸움을 벌이는 내내 세벨리아는 발라크의 뒤에 있었다. 그의 보호를 받는 아이처럼 몸을 웅크린 채 뺨을 닦아 내고 있었다.
디하트는 이유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몸집을 부풀렸다. 그 누구도 그의 흔들림을 느낄 수 없게 사나운 껍데기를 둘렀다.
“내가 누군지 안다면 더 이상 시간을 끌 필요 없겠군. 그래, 미치광이 공작이 궁에서 사람 하나 찢어 죽인다 해도 더 놀랄 사람도 없을 거야.”
디하트가 으르렁거리며 한 걸음 내딛자 발라크가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응접실 구석에서 검은 그림자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 세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해요.”
아직도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였다. 디하트는 반사적으로 발라크를 밀치고 눈물 젖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벨라. 저 개자식이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어찌나 빠르고 거센 힘이었는지 발라크는 바닥에 나동그라진 채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방금 전 디하트가 던진 단검은 단순히 위협용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그가 온 힘을 실어 검을 던졌다면 자신은 그리 쉽게 튕겨 낼 수 없었으리라.
‘미친놈이 힘은 좋군…….’
순발력과 판단력 또한 생각보다 괜찮았다. 연이은 도발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대체로 차분함을 유지했고.
‘하지만 그래도 안 돼.’
발라크가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정신이 나갔다고 온 제국에 소문이 자자한 반반한 미친놈이 사촌 여동생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무어라 속살대고 있었다.
사랑에 미치는 건 납득할 수 있었다. 연심에 눈이 멀어 과보호하는 걸 문제 삼는 게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저 미친놈이 사촌 여동생을 홀대했다고 악명이 자자한 그 전남편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떨어져.”
짓씹듯 내뱉으며 발라크가 몸을 일으켰다. 세벨리아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디하트가 혀를 차며 그녀를 제 뒤로 숨기려는 순간이었다.
믿을 수 없는 말이 디하트의 귓가를 찔렀다.
“도대체 무슨 염치로 그 애 곁을 맴도는지 모르겠군. 내가 살아 있는 한 절대로 허락 못 한다.”
“뭐?”
“자기소개가 늦었군, 인버네스 공작. 내 이름은 발라크 애쉬렌트. 러크우드를 통치하는 일곱 개 가문의 일원이자 네가 붙들고 있는 아이의 사촌 오빠다.”
하늘색 눈동자 안쪽에 자리 잡은 분노는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