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3)화(123/171)
충격적인 사실을 떳떳하게 밝힌 뒤, 발라크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벨라, 다른 사람도 아닌 그의 집에 머무는 건 말도 안 된다. 네가 무슨 이유로 그를 참아 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은 그러지 않아도 돼.”
안타까운 눈으로 세벨리아를 바라보던 발라크가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두 팔을 벌렸다.
“우리 집으로 오렴.”
“네?”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집, 집이라고? 우리 집?
세벨리아는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의 연속에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촌 오빠를 만나고, 그로부터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심지어 자신이 러크우드 대가문의 일원이라는 것보다 지금 그 말이 더 충격적이었다.
“우리, 집…….”
세벨리아의 눈꺼풀이 빠르게 떨렸다. 그녀가 비틀거리는 몸을 붙잡고 과부하 된 머리로 발라크의 말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찰나였다. 디하트가 그녀의 손목을 거머쥐더니 제 뺨에 가져다 댔다.
“디하트?”
“내 앞에서 무슨 파렴치한 짓을!”
디하트는 뻔뻔한 얼굴로 사촌 오빠의 격노를 무시했다. 그렇게 한동안 세벨리아의 손에 제 뺨을 지그시 누르던 디하트가 돌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럴 줄 알았습니다.”
옅은 한숨을 내쉰 디하트가 세벨리아의 손목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발라크는 안도할 수 없었다. 그가 이번엔 제 손등을 세벨리아의 뺨에 대는 게 아닌가.
그 행동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아무렇지 않아 보여 발라크는 속이 탔다. 그는 태연하게 디하트의 행동을 받아 주는 사촌 동생의 모습을 보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릴 지경이었다.
한편, 그의 애타는 속사정 따위 모르는 세벨리아는 의구심에 눈을 깜빡였다.
“왜 그래요?”
디하트는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샤테이안이 느릿느릿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디하트가 기다렸다는 듯 그를 불러 세웠다.
“전하.”
“음?”
“불쾌한 손님을 만나게 해 주신 김에 방 하나만 더 내어주시면 참 감사하겠군요.”
“어렵지 않은 부탁이긴 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비꼬는 말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샤테이안이 물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여 시종을 부르자 디하트가 말했다.
“벨라 양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인지 겨우 잠재웠던 열이 다시 오르는 것 같군요.”
디하트의 말에 세벨리아는 뒤늦게 제 뺨을 감싸고 탄성을 질렀다. 그의 말대로 다시 미열이 오르고 있었다.
‘어떻게 안 거지?’
세벨리아가 신기하다는 듯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찰나, 발라크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더 지체할 수 없지. 샤테이안, 마차를 대기시켜 주게. 지금 당장 벨라와 함께 떠나겠네.”
발라크의 말에 디하트가 코웃음을 쳤다. 그가 노려보자 디하트가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열이 내리기 전까지 가까이 오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그쪽이 어떤 병을 옮겼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뭐?”
“환자를 마차에 태워 떠나겠다니. 어처구니없는 계획에도 정도가 있지.”
아득 이를 가는 발라크를 지나치며 디하트가 클로드에게 말했다.
“가서 주치의를 궁으로 불러요. 벨라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말도 하고.”
“알겠습니다.”
디하트가 시종을 따라 사라진 뒤 클로드는 황폐해진 응접실을 한 번 쓱 둘러보았다. 발라크와 샤테이안이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다 말고 그를 응시했다.
“따로 내게 할 말이 있는가, 어펜츠?”
“아닙니다, 전하.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클로드는 애매한 작별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등 뒤가 몹시 따가웠다.
* * *
방으로 들어온 세벨리아는 침대 대신 긴 의자에 기대앉았다. 그녀를 눕히고 싶었던 디하트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잔소리를 하는 대신 시종에게 이것저것 시키고는 돌아왔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직 아닌 거겠죠.”
건강 문제에 있어서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세벨리아는 이상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환자인 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몸은 안 챙기면서…….’
세벨리아는 튀어나오려는 본심을 삼키고 땀이 나는 이마를 손으로 훔쳤다. 디하트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종이 가지고 온 수건을 대야에 넣었다.
“직접 할 생각은 아니죠?”
“…안 됩니까?”
그렇게 풀 죽어서 물어보면 안 된다고 할 수가 없잖아. 세벨리아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건을 손에 들고 처량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디하트의 얼굴에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 보면 무릎 꿇는 것부터 못 하게 막았어야 했다.
“마음대로 해요.”
세벨리아는 자연스레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물기를 짜낸 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등을 닦았다.
팔목까지 꼼꼼히 닦아 낸 수건은 허공에서 잠시 머무르는가 싶더니 천천히 이마에 닿았다. 식은땀을 닦은 자리에 바람이 불자 열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
세벨리아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낸 순간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허공에서 튀어 오른 불꽃처럼 타닥, 하는 소리가 들린 것만 같았다.
“…….”
디하트는 수건을 움켜쥔 채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금빛 눈동자 가운데 은빛 기운이 소용돌이쳤다.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라 세벨리아는 멍하니 그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래서 첫마디를 놓치고 말았다.
“…갈 겁니까?”
“네?”
정신을 차린 세벨리아는 다시금 뜨거워진 목덜미를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그녀가 당혹스러움을 느끼기도 전에 디하트가 재차 물었다.
“정말 그와 함께 갈 겁니까?”
살짝 찡그린 눈매 아래, 흔들리는 눈동자가 더없이 초라하고 안타까웠다.
조심스럽게 이마를 닦던 손이 힘없이 내려왔다. 툭 하고 물수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디하트의 두 팔이 그녀의 양 무릎 옆을 짚었다.
“벨라.”
마치 이대로 팔 안에 가두고 싶다는 듯, 온몸으로 그녀를 껴안고 싶다는 욕망을 풀풀 풍기면서도 금빛 눈동자는 끝까지 그녀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그런 그를 말없이 응시했다. 푸른 눈동자 안쪽으로 새까만 감정이 넘실거렸다. 짧은 침묵 뒤, 세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평생에 걸쳐 날 찾았다고 했어요.”
“…….”
“이름도, 생김새도 제대로 모르면서 살아 있을 거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쥐고 하염없이 나를 찾아 헤맸다더군요. 언젠가는 나를 데리고 돌아갈 거라는 마음 하나만으로… 버텼대요, 디하트. 그들도 버텼대요. 내가 그 긴 시간을 버틴 것처럼. 그 사람들도.”
나긋한 목소리는 발라크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고 그래서 디하트는 더욱 절망스러웠다.
가족, 진짜 가족. 그들을 상대로 디하트는 맞설 수 없었다. 한때 그는 그녀의 가족이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아마 앞으로도 다시 가족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잘못으로 놓쳤으니까.’
드득. 천 뜯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그의 손 아래 소파가 우그러졌다.
당황한 듯, 금빛 눈동자가 수차례 깜박였다. 소파 아래 굴러떨어진 수건은 이미 먼지투성이였다.
“미안합니다.”
디하트가 떨어진 수건을 주워 들며 속삭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을, 아니. 전부 다 갈아 오죠.”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디하트가 고개를 숙인 채 몸을 돌리려는데 세벨리아가 그의 손목을 낚아챘다. 단단한 손목은 어울리지 않게 미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놔요. 당신 손에도 먼지가 묻을지 모릅니다. 수건이, 더러워져서.”
디하트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그럴 정신이 없었다. 자책감과 후회가 가슴을 찌르는 가운데, 호흡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하지만 세벨리아는 그런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디하트.”
“…….”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내게 그럴 수 있는 자격이 있나 묻는다고 해도 답할 수 없는데.”
뚝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붙잡힌 손을 내려다보는 금빛 눈동자엔 시린 빛이 가득했다. 얼핏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세벨리아는 그 차가움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을까. 붙잡은 손 아래 이리도 힘차게 뛰는 맥박이 그의 진심을 말해 주고 있는데.
그래서 세벨리아는 조금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아니, 용기가 아니었다. 클로드의 말대로 그녀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내가 듣고 싶어요.”
“무슨 말을요.”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요.”
세벨리아가 덧붙였다.
“당신이 날 붙잡기 위해 해야 하는 말. 그게 듣고 싶어요.”
디하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벙긋거리던 그는 이게 현실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다.
망상도, 꿈도 아니었다. 뚜렷한 형체와 윤곽을 지닌 채 자신을 에워싼 현실에 디하트는 심장이 뚝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습니까?”
“클로드처럼 귀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맞을 거예요.”
세벨리아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고양이가 두 발로 붙잡은 것처럼 미약한 힘이었다. 하지만 디하트는 스르르 이끌려 그녀 옆에 앉았다.
“벨라, 나는.”
우그러진 소파 위에 앉은 그가 조심스럽게 세벨리아에게로 고개를 돌릴 무렵이었다.
“많이 기다렸지!”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클로드가 벌컥 문을 열었다. 그의 뒤에는 피곤한 낯의 워츠와 뚱한 얼굴의 발라크가 함께였다.
“…이야기는 진찰을 받은 뒤에 해야겠군요.”
조곤조곤 귓가로 흘러드는 목소리가 불퉁했다. 세벨리아는 웃음을 삼키며 자신의 호적상 삼촌과 진짜 사촌 오빠를 맞이하러 간 디하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워츠 선생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돌아가 주시죠. 그리고 어펜츠 씨, 아무리 조카가 걱정된다고는 하나 이게 무슨 짓입니까.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건 절대 안정이라는 것도 모르는 겁니까?”
적수를 맞이하니 기운이 살아나는 모양이다. 세벨리아는 열 오른 이마에 손등을 대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펄펄 날뛰는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었다.
그래, 저 남자에게 시무룩하게 처져 있는 모습은 어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