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4)화(124/171)
세벨리아는 침대에 누워 워츠의 진찰을 받았다. 그가 준 약을 먹고 열이 가라앉고 난 뒤 발라크가 찾아왔다.
“잠시 대화할 수 있을까?”
더는 내보낼 구실이 없던 디하트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그의 방문을 허락했다. 문제는 샤테이안 이황자를 달고 왔다는 점이지만.
“황자님께서는 할 일이 그리도 없으십니까?”
“바빠 죽겠지, 그대들이 벌인 일 때문에 말이야. 황실치안국이 아니라 내가 직접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감사해하라고.”
“하.”
“내가 싫은 건 알지만 너무 티 내지 말게, 공작. 우리 못다 한 이야기가 있지 않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상대는 당신이 아닌데. 디하트는 목 끝까지 올라온 진심을 삼키며 팔짱을 꼈다. 샤테이안은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발라크와 대화 중인 세벨리아를 돌아보았다.
“네이튼 웨든의 처벌을 마무리 지어야지.”
바로 결론으로 치닫는 대화에 디하트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날 일에 대한 상황 설명이 필요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입 아프게 그럴 필요 있나? 그대들이 초대에 응한 시점에서 결백은 밝혀졌어.”
싱글싱글 웃는 얼굴은 이미 세벨리아의 환영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시체들이 돌아다니는 그 현상을 설명하라며 소환장을 보낸 건 그냥 핑계였다. 처음부터 이황자는 발라크와 그녀를 만나게 해 주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디하트는 그 얄미운 눈웃음을 슥 훑고 발라크를 노려보았다. 이글이글 타는 눈을 몇 번 깜빡인 디하트가 툭 하고 내뱉었다.
“그래서 전하의 호위로 알려진 환영술사는 어디 있습니까?”
“음? 저기 앉아서 벨라 양과 함께 담소를 나누고 있지 않나.”
입술 위에 비웃음을 얹은 디하트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뻔뻔한 건 천성이로군요. 세간에 알려진 전하의 환영술사와 저자는 다른 인물이라는 걸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흠, 수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그도 아니었나.”
샤테이안이 피식 웃었다. 디하트의 말처럼 세간에 알려진 이황자 곁의 환영술사는 발라크가 아니라 루드밀이었다. 초대장에 일부러 자세히 적지 않은 건 그냥 비뚤어진 성격 때문이었고.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세벨리아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디하트가 성큼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 그게.”
“자네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발라크가 냉정하게 디하트를 밀어냈다. 디하트의 금빛 눈동자에 노기가 들어찼다. 두 사람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멍하니 있던 세벨리아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아뇨, 아니에요. 그럴 수는 없어요.”
세벨리아는 손까지 내저으며 무언가를 거절했다. 디하트의 마음속에 의혹이 싹텄다. 설마 제집으로 오라는 그런 얼토당토않은 제의를 또 한 건가. 이번에는 좌시하지 않겠다며 그가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러크우드로 갈 수는 없어요.”
“뭐라고요?”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 디하트가 기함했다.
“벨라를 러크우드로 데려가려는 생각이었던 겁니까?”
“그게 뭐가 어때서 그런 반응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발라크는 꿋꿋하게 제 태도를 견지했다. 겨우 찾아낸 사촌 여동생이었다. 어린 시절에 버려진 것만 떠올려도 가슴이 아픈데, 심지어 가족에게 모진 수모를 당한 것까지 알아 버렸다.
‘그런 녀석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행복했을 리가 없지.’
발라크는 당장 씹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네이튼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오빠라는 놈이 그 모양이니 다른 가족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세벨리아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게 분명했다.
“이런 썩어 빠진 곳에 두기엔 벨라의 일 분 일 초가 아까워.”
발라크는 강경했다. 그는 세벨리아를 그녀의 집인 러크우드로 데려가고자 했다. 그녀를 사랑하고 아끼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는 진짜 집 말이다.
이 이야기를 몇 시간 전에 들었다면 디하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게는 자격이 없다는 자책감에 그저 입술만 깨물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푸르게 빛나는 세벨리아의 눈을 보고 확신을 얻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재차 말하지만 자네는 끼어들 권리가 없어!”
“아뇨, 있어요.”
발라크의 외침을 끊으며 세벨리아가 입을 열었다. 그녀의 말에 발라크는 당황한 눈치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러크우드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이상 더더욱… 그럴 수 없어요.”
이불을 움켜쥔 손등의 뼈가 새하얗게 두드러졌다. 열이 가라앉아 한결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가 읊조렸다.
“복수할 거예요. 내가 아니라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할 거예요.”
어찌 그리 똑 닮은 부자지간일까. 세벨리아는 가슴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네이튼에게 속은 불쌍한 영애들처럼 아버지에게 배신당했다. 벨크람의 휴양지에서 만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사랑에 빠졌으나 그건 어머니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녀를 책임질 생각이 없었다. 아버지와의 결혼을 꿈꾼 건 오직 어머니 한 사람뿐이었다. 불쌍한 어머니. 그가 이미 결혼한 남자라는 것도 모르고, 자신을 가지고 놀 생각뿐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나를 가졌다는 고백을 한 뒤 청혼이 아니라 암살자를 받으셨지.’
사랑의 대가는 쓰라렸다. 그녀는 가까스로 도망쳐 국경을 넘었고, 가주인 오라버니의 저주와 음습한 폭력 속에서 자신을 낳았다. 그리고 그 뒤는 그녀가 아는 그대로였다.
“아버지를, 아니. 아버지라 부르기도 아까운 그 쓰레기를. 사일러스 웨든의 모든 걸 짓밟을 거예요.”
“벨라!”
“그러니 그를 자꾸 내 곁에서 떼어 내려 하지 마세요, 발라크. 디하트는 내 복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에요. 내게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사람.”
커다래진 하늘색 눈동자를 직시하며 세벨리아가 말했다.
“그는 내 칼이에요. 나를 대신해 피를 묻히고, 내가 뒤집어써야 할 오명을 기꺼이 받아 드는 존재. 그래서 그 누구보다 내 가까이 있는 사람이죠.”
발라크가 헛숨을 삼켰다. 그녀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니. 복수를 원한다는 말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겨우 심호흡한 그가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내가, 내가 있잖니.”
말을 하면서도 발라크는 제가 섣불렀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 세벨리아는 평생을 찾아다닌 소중한 존재였지만 그녀에게 자신은 갑자기 허공에서 튀어나온 낯선 존재였다.
하지만 이대로 그녀가 진창으로 들어가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네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다. 인버네스 공작에게 팔려 가듯 결혼한 뒤 네게 어떤 추문이 붙었는지도 알고 있어.”
“…….”
“제발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보렴. 복수를 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왜 저자여야 하느냐. 저 남자는 이미 한 차례 너를 상처 입힌 사람이고, 남이다. 하지만 나는, 나는 네 가족이란다.”
“당신이 내 가족이라는 걸 부정하려는 게 아니에요. 어머니의 소식을 알려준 순간부터, 날 오래도록 찾아왔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당신은 이미 내게 소중해졌는걸요. 하지만… 그게 디하트를 저버려야 할 이유는 되지 못해요.”
흔들림 없는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며 발라크는 깨달았다. 그의 진심은 분명히 세벨리아에게 닿았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돌릴 정도는 아니었다.
“미안해요.”
이 순간, 발라크는 세벨리아가 그녀의 어머니를 쏙 빼닮았다는 걸 느꼈다. 이목구비의 생김새와 분위기로는 설명할 수 없는, 피를 타고 이어지는 강인함.
“…그래.”
격렬히 흔들리던 하늘색 눈동자가 차차 가라앉았다. 꼭 붙잡은 제 손을 내려다보던 발라크가 고개를 들었다. 미안한 듯 미소 짓고 있는 세벨리아의 얼굴에 제가 다 속이 쓰렸다.
이런 얼굴을 만들게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는 조급하기 짝이 없는 제 성정을 탓하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
“복수를 하고 싶은 거라면, 뜻대로 하렴. 다만 저자가 네 곁에 붙어 있는 걸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다.”
“네?”
“칼만이 널 대신해 피를 뒤집어쓸 수 있는 건 아니지.”
엄숙한 눈빛으로 발라크가 말했다.
“나를 마음껏 이용하거라, 벨라. 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언제 어디서든 내 이름과 가문의 이름을 사용하고 사람들을 멋대로 휘둘러. 너는 그래도 된다.”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놀라 고개를 내젓는 세벨리아를 향해 발라크가 단호히 말했다.
“가족이란 원래 그런 거야. 제멋대로 굴어서 가족을 곤란하게 해 놓고 뻔뻔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그래서 날 버릴 거냐고 뻗대는 거지. 피를 뽑아 교체할 수도 없는데 어쩔 거냐고 콧방귀를 뀌는 게 매일 일어나는 일이야.”
세벨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디하트와 그 뒤에 서 있는 샤테이안에게 시선을 던졌다. 진짜냐는 듯 묻는 눈빛에 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 봐라.”
무언의 공모 사이에서 세벨리아가 혼란을 겪는 사이, 발라크는 결심했다.
‘지금 확실하게 새겨 놔야 해.’
그는 가족 간의 끈끈하고도 짜증 나는 불문율을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세벨리아에게 그것을 가르쳐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슬슬 로스엘을 만나러 잠깐 벨크람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꾸나. 네가 내 이름을 대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건 분명 다른 이의 악의 때문이겠지.”
“…….”
“제국민이 곤란해지면 곤란해졌지, 나와 애쉬렌트가 고개를 숙여야 할 일은 없을 거다. 내가 틀렸니?”
세벨리아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못 당하겠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발라크가 후련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오늘은 이만 가마. 또 만나자꾸나.”
세벨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배웅했다. 한편, 샤테이안은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발라크와 함께 떠났다.
“눈물 나는 가족 이야기를 들은 대가로 복수의 첫 단추는 내가 확실히 꿰매 주지.”
다음 날, 세벨리아는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침 일찍 샤테이안 이황자는 환영술사 벨라 어펜츠의 증언을 수렴함과 동시에 황실치안국에 네이튼의 신병을 넘겼다.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리는 기습적인 발표였다.
수사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네이튼은 벨라 어펜츠의 납치, 감금 및 살인미수 혐의에 더해 결혼 빙자 간음 및 연쇄살인 혐의를 지게 되었다.
사일러스 웨든의 손이 닿지 않는 그곳에서 네이튼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례적으로 빠르고 지나칠 정도로 간단한 처리였다.
웨든 후작가는 강력히 반발했으나 하인들의 자백 및 연이은 시체들의 발견으로 네이튼 웨든은 혐의를 피할 수 없었다. 시끌벅적한 가운데 일황비 측은 조용히 한발 물러나 사건을 관망했다.
그리고 이 소식은 돌아오지 않는 로덴을 애타게 찾던 그렌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