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5)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5)화(125/171)
“죽은 공작 부인과 똑같이 생긴 여자가 환영술사라고?”
들고 있던 신문을 내동댕이친 그렌의 눈이 일그러졌다. 녹색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신문에는 네이튼 웨든과 그의 악행을 밝힌 최대 공로자, 벨라 어펜츠에 대한 특집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신문사는 아예 작정을 한 듯 이번 호 전체를 환영술사에 대한 이야기로 할애했다.
[권능에 가까운 능력, 환영술! 그 능력의 끝은 어디인가?]이미 한 차례 검열당했음에도 자극적인 표제였다. 신문사는 벨라 어펜츠는 ‘기억 속의 장면을 구현했을 뿐’이라 했지만 실은 사람과 비슷한 환영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을지 모른다며 은근슬쩍 말을 흘렸다.
신문이 나가고 난 뒤 신문사는 디하트에 의해 한바탕 뒤집혔으나 북부, 그것도 림스 후작의 영지에 콕 박혀 있는 그렌이 그것까지 알 리 없었다.
그녀의 정신을 사로잡는 건 오직 단 한 문장이었다.
[사람과 비슷한 환영.]그렌의 눈동자가 그곳에 머물러 떠나질 못했다. 간단하지만 너무나도 충격적인 문구가 머릿속에 또렷이 박혔다.
“설마.”
마음속에 억지로 묻어 두었던 의혹이 다시금 꼬리를 치켜들었다. 그건 웨든 후작이 잃어버린 딸을 찾는다며 낸 광고를 보았을 적 그녀의 가슴속에 파고든 불안의 싹이었다.
‘살아 있었나!’
그렌이 신문을 구기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간교한 계집. 그렌은 치욕스러움에 몸을 떨었다. 살아 있는 걸 알았다면 디하트에게 그런 수모를 당할 일은 애초부터 없었을 텐데.
억울함과 분노가 번갈아 목구멍을 달구었다.
“악독한 년. 이런 식으로 내 뒤통수를 쳐?”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누르며 그렌은 응접실을 나섰다. 그녀의 머릿속으로 세벨리아와 사일러스의 얼굴이 교차했다. 감히 나를 속이다니. 역시 그 아비에 그 딸이었다.
걸음을 바삐 옮기며 복도를 도는데 플로라가 해맑은 얼굴로 그녀를 반겼다.
“어머니, 어딜 가세요? 오늘 같이 옷을 맞추기로 하셨잖아요.”
플로라의 어여쁜 웃음에 그렌은 빠르게 심호흡했다. 딸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분노를 억누른 그렌은 언제나처럼 다정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플로라에게 말했다.
“아가, 미안하지만 혼자서 옷을 맞추지 않겠니? 바삐 시간을 내야 할 일이 생겼지 뭐니.”
“하지만.”
“보석상을 불러 주마. 그러고 보니 목걸이를 맞춘 지도 오래되었지?”
불만스럽게 눈살을 찌푸린 건 한순간이었다. 보석상이라는 말을 들은 플로라는 금세 눈을 반짝이며 그렌의 팔에 매달렸다.
“어머니는 어쩜 그렇게 제게 필요한 걸 잘 아세요?”
생글거리는 플로라의 뺨을 토닥인 그렌이 부드럽게 그녀를 떼어 놓았다. 플로라는 별말 없이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이 꼭 예전과 같아 그렌은 저도 모르게 눈가가 시큰거렸다.
림스 후작에 의해 구출된 뒤, 플로라는 정신적 충격에 한동안 말을 잃었었다. 초췌해진 딸아이를 본 순간 어찌나 화가 나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지.
그렌은 지금도 선명히 떠오르는 그날의 끔찍한 광경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 아이에게 다시는 그런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환영술사, 환영술사라.’
플로라를 돌려보낸 뒤 그렌은 기억을 뒤졌다. 마법사와 달리 환영술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그녀는 신문에 실려 있던 기사를 떠올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충격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환영술사라는 것에 사로잡혀 흘려보냈던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벨라 어펜츠는 인버네스 공작의 보호 하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죽지 않고 살아 있는 세벨리아. 새로운 신분으로 나타난 그녀를 내치지 않고 곁에 두고 있는 디하트.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렌의 눈이 분노로 불타올랐다.
“설마 그 둘이 처음부터 나를 속이고…!”
오해는 그렇게 그렌의 머릿속에 깊숙이 박혔다.
까득, 입술을 깨문 그녀가 머리를 짚었다. 어쩐지 너무 일이 잘 풀린다 싶었다. 디하트가 돌아오지 않는 틈을 타 림스 후작과 함께 인버네스 가문을 먹어 치우려던 그렌은 신음을 흘렸다.
‘이럴 시간이 없다.’
가문의 원로들을 설득하기도 전에 두 사람이 돌아온다면 일이 어떻게 풀릴지 몰랐다.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원인을 제거하는 수밖에.
* * *
수도를 휩쓴 스캔들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중앙 귀족 중에서도 명망 높은 웨든 후작가의 후계자 네이튼 웨든의 잔혹하고 끔찍한 행각에 많은 이가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 뜨거운 열기에 답하듯, 드디어 사일러스 후작이 침묵을 깼다. 그리고 오늘 린 포스트에 그의 인터뷰가 실릴 예정이었다.
세벨리아는 아침 일찍 일어나 디하트의 집무실로 향했다. 일레이가 신문들을 한데 모아 그의 책상 위에 가져다 두기 때문이었다.
달칵.
“벨라? 어쩐 일입니까.”
디하트가 놀란 눈으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세벨리아는 가볍게 웃어 보이고는 책상 한편에 치워져 있는 신문을 눈짓했다.
“아.”
“방해가 안 된다면 여기서 읽고 가도 괜찮을까요?”
세벨리아가 자그마한 의자로 향하며 하는 말에 디하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푹신한 소파에 걸쳐져 있는 일레이의 외투를 저 멀리 내던지고서 직접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다과를 가져오라 할 테니 원하는 만큼 있다 가요.”
“고마워요.”
세벨리아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편히 머무르기로 했다. 따뜻한 차와 달콤한 디저트 또한 거부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들이 있어야 기사를 읽으면서도 차분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
작게 심호흡한 세벨리아는 신문을 펼쳐 들었다. 이윽고 굵게 인쇄된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그의 열변이 지면을 가득 채웠다.
디하트는 자리로 돌아가 앉아 어쩐지 초조한 눈으로 흘긋 그녀를 건너다보았다.
예상대로 기사는 철저히 사일러스의 편에서 쓰여 있었다.
‘황실치안국의 편파적 처사에 사일러스 웨든 후작은 맹렬히 분노했다.’, ‘환영술사라는 믿을 수 없고 허무맹랑한 존재에 다들 속아 넘어가는 것.’,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수사를 바란다.’
“흐음.”
기사를 읽어 내리는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차갑게 빛났다.
‘쉽게 엮어 넣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
네이튼은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웨든 후작가에 폐를 끼칠 수 없다며 모든 건 자신의 일탈이라 말했다.
“사전에 입을 맞춰 둔 건가…….”
웨든 후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이황자와 황실치안국을 지탄하면서도 네이튼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개인적 일탈이라 선을 그었다.
그래서 디하트는 로덴을 증인으로 내놓지 않았다. 지금 자칫하면 네이튼의 선에서 모든 일이 끝나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골치 아프네. 세벨리아는 신문을 내려놓으며 손에 턱을 괴었다.
“네이튼은 어떻게든 아버지가 자신을 구해 줄 거라 믿는 걸까요?”
냉정한 목소리에 디하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아버지의 곁에서 보냈을 텐데… 그의 비열하고 더러운 면을 수없이 겪었을 텐데. 그럼에도 자처해서 모든 걸 뒤집어쓰다니. 네이튼은 어째서 아버지가 자신을 절대 버리지 않을 거라 믿는 걸까요.”
세벨리아의 어조에는 약간의 동정심이 담겨 있었다. 디하트는 오랫동안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펜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행이네요.”
“네?”
“예전의 당신이었다면 그가 사일러스에게 가지는 맹목적인 신뢰에 상처받았을 겁니다. 당신은 받지 못했던 애정을 넘치도록 받았다는 증표나 마찬가지니까.”
낮은 목소리가 차분하게 집무실을 울렸다. 세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의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자신이 변했음을 깨달았다. 예전이었다면 부자간의 애정을 질투하며 불우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곱씹었을 텐데, 방금 전 그녀는 한순간도 과거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녀가 탄식하는 사이, 디하트가 뻔뻔한 얼굴을 기울이며 말했다.
“사일러스를 교수대에 세울 날이 기대되는군요.”
“…….”
“놀란 눈 하지 말아요, 벨라.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요.”
세벨리아가 느리게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잇새로 잔잔한 숨이 새어 나갔다. 어둠 저편에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과 어머니를 죽이려 한 자의 얼굴이었다.
가녀린 눈꺼풀이 들리며 푸른 눈이 디하트를 직시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 아래, 선명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미소 지었다.
“당신 말이 맞아요.”
푸른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머물렀다. 그녀는 손을 들어 디하트가 살펴보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는 제지하지 않았다.
“사실 기사를 읽을 때부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서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매가 서늘했다.
“네이튼은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분노한 제가 그를 처리하길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아요.”
딱 아버지다운 깔끔한 방법이죠. 나지막이 방을 울리는 목소리에 디하트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당신 손을 빌려 꼬리를 자르려 한다는 겁니까?”
그렇게까지 비열할 거라 생각해 보지 못했다. 디하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자 세벨리아가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나서지 않으면 아버지가 직접 나서실 수도 있어요. 네이튼에게는 충격적이겠지만 아버지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믿기 힘들지만, 그라면 가능할 것 같긴 하군요.”
“후작가의 명예를 위해서라며 고통을 감내하는 척 아들에게 사형을 내려 달라고 무릎 꿇으실 수도 있을걸요?”
“정말 떠올리기도 싫은 광경이군요. 끔찍합니다.”
디하트가 구역질이 난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세벨리아 또한 그에 동의했다.
“그런 역겨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 빨리 추가 수사를 마무리 지어야겠군요.”
“그래야죠.”
세벨리아는 아픔이 담긴 눈으로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또박또박 적힌 낯선 이름들이 눈에 들어와 박혔다.
그건 아직 사체를 발견하지 못한, 네이튼 웨든의 피해자로 추정되는 이들의 가족이 보낸 탄원서였다.
샤테이안은 네이튼의 신병을 치안국에 넘긴 뒤 그녀에게 직접 의향을 물어 왔다. 원한다면 사형까지 언도할 수 있다는 그의 제안을 세벨리아는 거절했다.
아직도 사체를 찾지 못한 피해자들이 있었다. 그날 지옥도에 불려 나오지도 못한, 네이튼의 머릿속에서조차 중요하게 기억되지 못한 여인들. 네이튼의 머리를 샅샅이 헤집어 그녀들을 찾아낼 때까지, 그는 죽을 수 없었다.
긴 한숨을 내쉬며 세벨리아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가슴 위를 묵직한 돌덩이가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