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6)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6)화(126/171)
유족들은 세벨리아와 디하트에게 전적으로 협조했다. 그들의 수가 불어날수록, 그들의 의지가 단단해질수록 불리해지는 건 웨든을 비롯한 일황비파였다.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어요.”
일황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우아한 자태로 부채를 펼쳐 든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결혼식은 미뤄야겠어요. 웨든 가의 상황이 정리되기를 기다린다는 핑계라면 그쪽도 순순히 받아들이겠지요. 황자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딜리언은 어머니가 생각하는 바를 쉽게 알아차렸다. 그녀는 웨든 후작가의 존망을 지켜볼 셈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하던 참이었습니다.”
딜리언은 오늘 아침 저택으로 돌아간 넬리아를 떠올렸다. 사과를 하지 않으면 끝까지 가지 않을 거라는 으름장에 결국 뜻대로 어울려 줘야만 했다.
‘귀찮은 여자.’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게 된다면 언제든 다시 그녀를 구슬려야 했다. 지금 당장 곤경에 처한 건 네이튼 웨든이지 웨든 후작가가 아니니까. 그는 넬리아에게 무슨 선물을 보낼까 생각하며 티스푼으로 찻잔을 휘저었다.
“후후.”
일황비가 곤란함으로 짙게 물든 아들의 얼굴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은쟁반 위를 굴러가는 구슬처럼 곱고 낭랑한 웃음소리였다.
“이제 보니 황자가 넬리아 영애에게 꽤나 시달렸나 보군요. 무리도 아니지요. 남자였다면 분명 네이튼 웨든을 제치고 그녀가 후계자 자리를 차지했을 거랍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그렇게 될 가능성도 큰 것 같습니다.”
간당간당한 네이튼의 목을 가리키는 말에 부채 너머에서 일황비가 눈웃음을 쳤다. 사일러스가 어딘가에서 새 사생아 딸을 데려오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었다.
황실에는 황녀가 없으니까.
‘이황자가 황녀였다면 좋았을 것을.’
일황비는 언제나처럼 덮쳐 오는 안타까움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가 황녀로 태어났다면 황후도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이미 태어난 것을 어찌하겠는가. 잔인한 운명의 농락 앞에서 일황비는 선택했다. 그녀 자신과 소중한 아들을 지켜 내는 길을. 그리고 이번에도 그녀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끔찍한 기억은 즐거운 기억으로 덮어야 하는 법. 전시회의 악몽을 지우기 위해 새로이 연회를 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요.”
동시에 황실의 건재함과 자신들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위축된 모습은 보일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기회를 위해서라도.
“황자가 가서 폐하께 청을 드려 보세요.”
묵묵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을 향해, 일황비가 달콤하게 웃었다.
“아, 누구를 초대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죠?”
* * *
언뜻 평화로운 날이 지속되었다. 세벨리아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발라크와 몇 번 만났고, 그가 위장 신분으로 벨크람에 체류 중임을 알게 되었다.
“제게 애쉬렌트의 이름을 사용하라는 건 허풍이었나요?”
세벨리아가 살풋 이마를 찌푸리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탁 하고 테이블을 때리는 소리에 발라크의 어깨가 튀었다.
“그, 그럴 리가 없잖느냐.”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걸요.”
고요한 눈으로 집요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발라크는 백기를 들었다.
“애쉬렌트의 일원으로 들어오려면 이것저것 처리해야 할 서류나 절차가 있어서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 후에 귀국했다가 원래의 신분으로 돌아올 계획이었어.”
“흐음.”
“정말이란다.”
간절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에 세벨리아는 흘기던 눈을 원위치시켰다. 찻잔 대신 포크를 거머쥔 그녀가 케이크를 자르며 물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 신분을 갖고 계신 거예요?”
“글쎄, 그건 루드밀이 정확하게 알고 있을 텐데…….”
말끝을 흐리는 발라크에 세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루드밀이라면 그가 데려온 호위로 지금은 샤테이안 곁에 있는 환영술사였다. 샤테이안이 초대장에서 언급한 손님이 그일지 모른다고 클로드가 잘못 추측한 인물이기도 했고.
“아마도 가장 편한 방법을 골랐을 테니, 무역상이나 돈 많은 여행객이겠지.”
어설픈 대답에 세벨리아는 잘라 낸 케이크 조각을 꿀꺽 삼켰다. 푸른 눈이 또르르 굴러가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멈췄다.
“왜 그러니?”
구슬처럼 반짝이는 눈을 마주한 발라크는 잠시 당황했다. 세벨리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기대하는 얼굴로 말했다.
“애쉬렌트의 영지가 서리숲과 얼마나 가까운지 물어도 되나요?”
“서리숲? 아, 혹시 약재 때문에 그러는 거니?”
로덴이 만들어 웨든에 공급한 강력한 자백제. 그 자백제에는 제국에서 금지된 약재 말고 다른 희귀 약재가 여럿 쓰였는데, 그 중 하나가 서리숲에서만 채취되었다.
만약 워츠가 아니었다면 로덴이 제조법을 알려 줬어도 그에 대한 해독제와 감별 시약을 제때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걸 해독하는 데에도 러크우드 산 희귀 약재가 필요했으니까.
‘여러모로 운이 따랐지.’
하지만 지금 세벨리아가 묻고 싶은 건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의문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발라크에게 고개를 저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이렇게 되기 전에는 러크우드와 교역을 하려고 했었어요.”
“무역상을 하려고 했단 말이니?”
“음, 네.”
예상외의 격렬한 반응에도 세벨리아는 크게 개의치 않아 하며 말을 이었다.
“복수가 끝나면 더 이상 인버네스 가에 머무를 이유가 없으니…. 저도 제 살길을 따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얌전한 귀족 영애이던 시절에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음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벨라 어펜츠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담담한 목소리에는 그 어떤 억울함도 없었다. 그녀는 평민으로서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하…….”
하지만 발라크는 그 모습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그는 수치심과 자괴감, 그리고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건 자신이 보살펴야 할 어린아이가 제 앞에서 먹고 살 걱정을 토로하는 걸 지켜보는 기분과 동일했다.
‘조금만 더 일찍 널 찾았더라면.’
아니, 처음부터 널 뺏기지 않았더라면. 아버지를 조금만 더 빠르게 무너트렸더라면.
모두 쓸데없는 가정이었다. 하지만 괴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꽉 쥔 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려는 때, 그를 막아선 건 익숙한 손길이었다.
“그만하지 그래.”
어깨를 토닥이는 손등에는 오래된 상흔이 남아 있었다. 세벨리아는 손의 주인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눌러쓴 모자 아래, 하얀 머리칼이 몇 가닥 튀어나와 있었다.
“전하.”
“아, 됐어. 지금 나는 한 푼이 아쉬워 친구 집에 밥이나 얻어먹으러 온 배고픈 예술가니까.”
샤테이안 이황자는 넉살 좋게 자리를 빼 앉았다. 그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다가올까 말까 고민하는 루드밀을 손사래 쳐 보내 놓고 발라크의 찻잔을 빼앗았다.
“향 좋네. 자네 취향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공작가에서 챙겨 준 꽃차예요. 마음에 드시면 황궁에서 받아 보실 수 있도록…….”
“무슨 말 한마디를 못 하겠군. 벨라 양,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요. 당신이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황실치안국은 네이튼 웨든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을 테니까.”
찻잔을 휘휘 저으며 샤테이안이 말했다. 둥둥 떠다니는 탐스러운 꽃송이들을 들여다보던 그가 돌연 고개를 들었다.
화살처럼 꽂혀 드는 시선에 발라크가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 할 말이 있다면 해.”
“음? 아냐. 몇 년을 알고 지냈지만 이렇게 얼굴색이 좋은 자네는 처음이라. 신기하군. 자네 돌아가면 형님께서 못 알아보시는 거 아닌가?”
“…….”
발라크가 뭐라고 받아칠까 골몰하는 사이 세벨리아가 화제를 돌렸다.
“옷이 잘 어울리세요. 방금 전에 예술가라고 하신 건, 잠행을 나올 때의 신분이신가요?”
“응, 그렇지. 황궁에 있다 보면 밖이 그리워지거든. 벨라 양은 마를렌 지구에 가 봤나? 이번에 빵집이 하나 새로 문을 열었는데 말이야, 남부에서 시작된 가게라 그런지 못 보던 게 많더군.”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세벨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대화에 참여했다. 그러다 문득 위화감이 들었다. 왜 그럴까, 생각하던 세벨리아는 곧 단서를 찾아냈다. 평범한 차림새, 잠행, 마를렌 지구. 머릿속으로 디하트가 스쳐 지나갔다.
‘황자나 되시는 분이 고작 빵집 하나 보러 잠행을 나올 리 없지.’
세벨리아는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샤테이안의 능란함에 하마터면 휘말릴 뻔했다. 적당한 정보를 내어주고 원래 목적은 숨기다니. 그녀는 상대가 만만치 않은 자임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샤테이안 벨크람 이황자. 그는 어릴 적 어머니인 황후를 잃고 혼자 힘으로 지금 이 자리까지 살아남은 강자였다.
강한 외척을 가진 딜리언과 달리 그의 외가는 아무런 힘도 보태지 못했다. 아니,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다는 게 더 옳은 말이리라.
‘황후는 바다 건너 왕국 출신이니까. 일황비가 견제하기 쉬웠겠지.’
세벨리아는 상처투성이인 그의 손등을 바라보며 그가 견뎌 내야 했을 시간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왜 마를렌 지구에, 굳이 예술가의 복장을 하고 잠행을 가야 했을지를 생각했다.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발라크와 헤어져 인버네스 저택으로 돌아올 때까지도 그 문제는 세벨리아를 괴롭혔다. 그리고 답은 의외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이게 뭐예요?”
“오늘 새로 연 빵 가게에서 사 왔습니다. 처음 보는 것들이 많길래 아예 종류별로 담아 왔어요.”
디하트가 커다란 봉투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세벨리아는 봉투에 찍힌 문양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오늘 샤테이안이 말한 남부에서 시작되었다는 빵집이었다. 세벨리아는 믿을 수 없는 우연에 놀라워하며 봉투를 들었다.
그때, 디하트의 배는 될 법한 봉투를 내려놓으며 클로드가 툴툴거렸다.
“인파에 짓눌려서 내가 반죽이 되어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디하트가 날을 어찌나 잘 잡았던지.”
“무슨 일 있었어요?”
세벨리아의 물음에 디하트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더니 순순히 답했다.
“수도를 떠났던 삼황자가 돌아왔다더군요. 이유는 모르지만 마를렌 지구부터 들른 모양입니다.”
“흐음…. 그래요?”
그 순간, 샤테이안이 떠오른 건 우연이 아니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