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7)화(127/171)
마를렌 지구에 잠행을 나갔다 돌아온 뒤 샤테이안이 가장 먼저 받은 소식은 황제가 직접 연회를 연다는 이야기였다.
황제는 심지어 연회장에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참석하겠다는 의지까지 보였고, 샤테이안은 코웃음을 쳤다. 누가 봐도 연회의 실질적 주인공인 일황비와 딜리언 황자에게 힘을 실어 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황후 소생의 적통 황자임에도 지금껏 황태자의 자리를 약속받지 못한 샤테이안은 다음 날까지도 무척이나 심기가 불편했다.
“일하기 싫군.”
서류를 뒤적이던 그가 감흥 없는 얼굴로 의자에 늘어졌다. 루드밀이 그의 곁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빨리 처리하셔야 일황비 세력을 와해시킬 수 있습니다, 전하.”
“잘 알고 있으니 보채지 말게.”
샤테이안이 투덜거리며 책상 위에 엎어졌다. 변화무쌍한 그의 자세에 루드밀이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차라리 발라크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함께 귀국할 걸 그랬다.
그의 속도 모르고 샤테이안은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그의 손짓에 맞춰 책상 위에 여러 모양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나비, 여우, 그리고 새. 두 손을 퍼덕거리던 샤테이안은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붉은 눈이 천천히 정원 쪽으로 난 통창을 향해 움직였다.
하얀 커튼 너머로 가녀린 인형이 언뜻 보였다.
‘제가 가겠습니다.’
어느샌가 책상 앞으로 걸어 나온 루드밀이 소리 없이 말했다. 샤테이안은 느리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앗, 하는 미성이 울려 퍼졌다. 샤테이안은 불청객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따로 손질을 하지 않은 검은 머리칼을 어깨 뒤로 길게 늘어트린 순진한 외모의 여성은 어제 하레스의 기행을 살피러 갔다가 보았던 이였다.
‘시골 남작가의 고명딸이라던 여자인가.’
챙이 큰 모자를 푹 눌러쓰고 종종걸음으로 하레스 삼황자를 따라다니던 여인. 정보책에게 듣기로는 여행을 하던 중 만나 첫눈에 반해 데려왔다고는 하나, 너무 낭만적이라 오히려 못 믿을 이야기였다.
“길을 잘못 들었나 보군요, 영애. 이곳은 삼황자가 기거하는 은백합궁이 아니라 붉은 수정궁입니다.”
“아, 저를 알고 계시는군요.”
여인이 탄성을 흘렸다. 샤테이안은 잠시 침묵했다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흠. 알다마다요. 곧 내 동생과 혼약을 올리실 분이 아닙니까.”
여인은 그 말에 뺨을 붉혔다가 상대가 누군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레스 삼황자를 동생이라고 지칭할 만한 상대는 딱 두 명이었다.
“황자 전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로잘린 발레리라고 합니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기품을 잃지 않는 모습에 샤테이안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일개 시골 남작가의 여식이 가지기에는 너무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그가 고개를 돌려 루드밀을 불렀다.
“영애를 은백합궁까지 모셔다드리게.”
“그런 폐를 끼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조심치 못해 발길을 잘못 들였는걸요.”
“곧 한 가족이 될 사이 아닙니까. 그리고 혼자 보낼 수 없는 제 사정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여인은 눈을 크게 뜨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길을 잃은 건 자신이었으나, 이 모습이 혹여나 다른 이의 눈에 잘못 띈다면 서로에게 불편한 소문이 돌 수도 있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전하.”
뒤늦은 깨달음이 쑥스러운 듯 그녀가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가느다란 속눈썹 아래 햇빛을 받은 눈동자가 반짝였다.
“천만에요, 당연한 일인 것을요.”
샤테이안은 웃으며 그녀를 배웅했다. 그는 여인이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발칙한 도발일까 아니면 어쭙잖은 경고일까.’
긴 소파에 몸을 던진 샤테이안이 나른하게 눈을 깜빡였다. 태양 같은 눈동자가 그의 머릿속에 또렷이 남았다. 다시 한번 터지려는 실소를 막으며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은백합궁으로 향하는 자는 결코, 자신의 궁에 닿을 수 없다. 황자들의 거처는 황후의 궁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니까.
그러니 오늘 영애의 방문은 분명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혹시…….’
그날, 눈이 마주쳤던 게 우연은 아니었던 건가. 널따란 모자 아래서 잔잔히 빛나고 있던 금빛 눈동자를 떠올린 샤테이안의 눈에 흥미로움이 감돌았다.
* * *
와병 중인 황제가 직접 연회를 열겠다는 소식이 정식으로 공표되었다. 이는 귀족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들 황실이 웨든 후작가의 추문과 거리를 두기 위해 벌이는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싫지는 않아 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피해자들의 가족은 대부분 탐탁지 않아 했다. 그러나 샤테이안이 나서서 황제의 뜻을 지지하자 불만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는 황제가 자신에게 사건을 맡겨 주었기 때문에 네이튼을 쉽게 잡아넣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만일 이 일을 제 형님께 맡겼더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리 말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황제가 강제로 부여한 휴식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들도 은연중에 조금씩 지치던 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삼황자가 외유를 끝내며 함께 데려온 인물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실 삼황자가 손위 형제에 비하면 원체 존재감이 없는 탓도 있었지만.
“약혼녀라고요?”
“예, 푹 빠졌나 봅니다.”
세벨리아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해 듣기로 삼황자가 외유 중 만나 데려온 여인은 한미한 시골 남작 가문의 영애였다.
그림 솜씨가 뛰어나 후원 목적으로 함께 수도로 상경했다 들었는데, 다른 목적도 있었나 보다.
“시골 아가씨와 황자님의 만남이라. 굉장히 낭만적인 이야기네요.”
자극적인 스캔들 외에도 이런 간질간질한 이야기는 수도에서 꽤나 좋아하는 소재였다. 디하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다들 은연중에 기대하는 것도 있었으니, 환영하는 분위기더군요. 삼황자는 처음부터 황권에 욕심이 없다고 알려져 있으니 오히려 잘됐다는 느낌이랄까요.”
“아, 이미 세간에서는 두 사람 사이를 짐작하고 있었군요?”
“이황비가 직접 그녀를 챙긴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으니까요.”
“어머.”
세벨리아는 조금 놀랐다. 이황비는 욕심이 없고 소극적인 성정이라 궁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여인이 드러내 놓고 남작 가문의 영애를 데리고 다니며 아끼는 모습을 보여 줬다면 상당히 마음에 든 것이리라.
“두 분의 결혼식이 기대되네요. 장담하건대 그 이후로 두 분을 주인공으로 한 동화책이 서점에 가득할 거예요.”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디하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려 시계를 확인했다.
“슬슬 사람들이 올 시간이군요.”
“벌써 그렇게 됐나요?”
황제가 주최하는 연회다. 새로 옷을 맞추는 건 당연한 일. 세벨리아는 조금 질린 얼굴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데니사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까.
세벨리아는 데니사가 되도록 늦게 돌아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응접실을 나섰다. 디하트는 그녀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다 소매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눈을 내렸다.
피이-.
“……?”
세벨리아의 환영마, 에티라였다. 이름을 부여 받았음에도 아직 말문을 트지 못한 작은 새를 바라보며 디하트가 눈썹을 찌푸렸다.
“뭐지?”
손등 위를 종종거리던 새는 날개를 펴고 날아올라 익숙하게 디하트의 머리 위에 착지했다. 디하트가 황망함에 헛웃음을 내뱉기도 전에 에티라가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윽!”
마치 방향을 지시하듯 문 쪽으로 잡아당기는 힘에 디하트는 어쩔 수 없이 이를 갈며 문을 열었다. 그리고 긴장된 얼굴로 복도를 걷는 일레이와 마주쳤다.
“공작님.”
“무슨 일이지?”
에티라를 겨우 손안에 가둔 디하트가 물었다. 일레이는 딱딱해진 입매를 풀지 못하고 그에게 다가갔다. 나지막한 속삭임이 디하트의 귓가에 닿았다.
“그렌 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그동안 그렌은 림스 후작의 영지로 몸을 피한 뒤 저택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그 안에 틀어박힌 채로 인버네스 가문의 중역들을 불러들여 저들끼리 시커먼 꿍꿍이를 꾸몄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저택 밖으로 나올 만큼 중차대한 일이라. 디하트의 머릿속을 스친 건 로덴의 얼굴이었다.
“가까이서 지켜볼 수 없는지라 확실한 정황을 포착한 것은 아닙니다만, 혹시 로덴이 잡혔다는 걸 알아차린 게 아닐까요?”
일레이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디하트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녀의 정보통이 수도까지 퍼져있다는 소리인데. 그렌 부인에게 그 정도로 많은 수족들이 있던가?’
차분한 금색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사라졌다. 그의 머릿속에 타다 만 편지 봉투가 떠올랐다. 세벨리아의 암살을 사주하기 위해 지하조직에 보내려던 그렌의 편지였다.
‘아무래도 그렌의 주위를 더 깊게 살필 필요가 있겠군, 그리고…….’
디하트가 돌연 일레이를 위아래로 훑었다. 뭔가를 재보는 듯한 시선에 일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디하트가 흠,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승마술이 제법이라고 들었는데.”
“아, 라이언 경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부끄럽지만 제가 한 실력 좀 하지요.”
뜬금없는 칭찬을 기다렸다는 듯 받아넘기는 일레이를 보며 디하트가 말했다.
“믿음직스럽군. 그럼 힐렌드 홀까지 나흘이면 충분하겠지.”
“……예?”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빤히 응시하며 디하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자네 입으로 한 실력 한다고 하지 않았나?”
일레이는 갈등했다. 그의 상관은 지독하게도 딱 가능한 수준의 일을 내주었다. 자신의 실력이면 힐렌드 홀까지 나흘이면 충분했다. 문제는 그게 말잔등 위에서 먹고 자고 쉬며 미친 듯이 달려야 가능한 일이라는 거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만 할 수 있는 일이야. 당장 힐렌드 홀로 달려가 라이언에게 라쉬 경과 결탁했던 지하조직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라고 해. 이미 확보해놓은 증거들이 있으니 어렵지 않을 거야.”
싱긋 웃은 디하트가 일레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에게 고민할 시간 따위 주지 않겠다는 듯, 집무실을 향해 걷는 걸음걸이가 단호했다.
“고, 공작님.”
“난 자네가 해낼 거라 믿어, 일레이. 라이언이 겨우 그 정도 일도 못 해내는 사촌 동생을 내 곁으로 밀어 넣었을 리 없지. 안 그런가?”
완전히 잘못 걸렸다. 파랗게 질린 일레이의 낯빛을 흘끗 본 디하트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어느새 그의 어깨 위에 올라탄 에티라가 즐거운 듯 꽁지깃을 흔들었다.
* * *
며칠 뒤, 바야흐로 수도 전체가 기다리던 연회 날이 도래했다. 디하트는 마차 앞에서 세벨리아를 기다렸다. 잠시 뒤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디하트가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