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8)화(128/171)
현기증에 시야가 흔들렸다. 송곳으로 머리를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을 견디고 난 뒤에야 세벨리아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염탐용 환영의 힘이 회복된 것이다. 세벨리아는 뛰어 올라온 디하트의 팔에 기대며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지금 당장 감각을 공유해도 될까?’
남은 기회는 앞으로 한 번뿐이었다. 세벨리아는 빠르게 현 상황을 되짚었다.
‘아냐. 지금 쓰기에는 너무 아까워.’
게다가 감각을 공유하면 무조건 탈진 상태에 빠지게 된다. 겨우 연회에 참가할 수 있을 만큼 체력을 회복한 데에만도 한세월이 걸렸는데, 지금 당장 쓰러진다면…….
“연회에 가는 건 취소하도록 합시다.”
그래, 이런 식으로 나올 게 뻔했다.
‘이 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면서.’
오늘 연회는 일황비파를 비롯한 제국의 주요 세력을 한꺼번에 관찰할 중요한 기회였다.
특히 일황비파는 웨든 후작가의 처참한 실패로 인해 내부 세력 간에 균열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도 이번 연회는 꼭 참석해야만 했다.
“들어가서 쉬어요, 벨라. 의원은 내가 불러오죠.”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이 남자는 그저 걱정만 앞섰다. 세벨리아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금빛 눈동자가 고통에 찌푸려진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햇빛이 강렬해 잠깐 눈이 부셨을 뿐이에요.”
“눈이 시린 사람이 머리를 붙잡으며 쓰러집니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자기혐오가 넘실댔다. 고통 어린 음성에 놀란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디하트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몸이 얼마나 아프든, 집에서 쉴 생각은 없는 거겠죠.”
“디하트, 빠질 수 없는 자리라는 거 당신도 알잖아요.”
“알겠습니다. 그럼 잠시 기다려요. 의원을 찾아 상비약이라도 받아올 테니. 이것마저 못 하게 하려는 건 아니죠?”
“언제는 내가 제멋대로 군 것처럼 말하네요.”
태연하게 받아치는 대답에 디하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더니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세벨리아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문에 몸을 기댔다.
다행히도 현기증은 일시적이었다. 세벨리아는 가늘게 연결된 염탐용 환영과의 끈을 느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후우.”
하늘은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가장자리부터 번져 나가는 노을을 바라보던 세벨리아는 시선을 내렸다.
격식 있는 제복을 입고 마차를 둘러싼 기사들을 본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세벨리아가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했을 무렵, 디하트가 타이밍 좋게 내려왔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혹여나 그녀가 쓰러졌을까 걱정에 시달린 금빛 눈동자가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혹시 모르니 이것부터 먹어요.”
이런 데 있어서는 칼 같다니까. 세벨리아는 방금 전의 위화감을 잊어버리고 디하트가 건네는 약을 받아 마셨다. 그녀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전부 삼키는 걸 확인한 디하트는 그제야 조금 안심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어쩔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본 세벨리아가 낮은 한숨과 함께 그의 손을 잡았다.
“자, 이제 그만 출발해요. 이러다 연회에 늦겠어요.”
“……!”
디하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잡힌 손에서부터 뜨거운 무언가가 타고 올라와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는 마차에 올라타고서도 한동안 세벨리아를 마주 보지 못했다. 한껏 달아오른 목덜미가 그녀에게 보일까 몹시 신경 쓰일 뿐.
* * *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의 행렬이 거리를 수놓았다. 사일러스는 저택에서 가장 높은 곳, 자신의 집무실 창가에 서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 행렬을 지켜보았다.
“다들 신이 나셨군.”
내뱉는 어조가 사나웠다. 까득, 잇새로 살벌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실 황제는 웨든 후작가에도 초대장을 보냈다. 그를 거절한 건 순전히 사일러스 그 자신의 의지였다. 넬리아는 그 결정에 울며 난동을 부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분간은 몸을 사리는 수밖에 없어.’
네이튼을 잃게 된 건 뼈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잃어버린 것에 매달리고 있을 수는 없는 법. 그는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 해서든 세벨리아를 손에 넣기로 했다.
다소 과격한 수단이라도 이제는 상관없었다.
‘주술사들로부터 비책이란 것도 받아 냈으니 숨만 붙어 있다면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들인 노력만큼 뭐라도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살면서 이렇게 수지맞지 않는 일은 처음이었다.
“빌어먹을.”
거칠게 돌아선 그는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보고서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사실 받은 건 어제였는데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내버려 뒀다는 걸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아주 사방에서 귀찮게 구는군.”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옅은 녹색의 편지 봉투. 그 귀퉁이에 보란 듯 찍혀 있는 세 개의 별. 그건 지하조직을 통해 전달된 그렌의 편지였다.
다른 방식으로 보낼 수 있음에도 굳이 이 방식을 고수했다는 건, 자신의 행적이 그녀 손에 남아 있다는 걸 알리려는 의도였다. 어찌 되었든 그 지하조직을 이끄는 가장 큰 손이 그녀의 친가였으니까.
“쯧.”
사일러스가 혀를 차며 봉투를 뜯었다. 내용을 확인한 그의 눈에 흥미로움이 감돌았다.
그녀는 그동안 약물을 공급한 대가로 디하트와 세벨리아의 죽음을 요구하고 있었다.
* * *
같은 시각, 세벨리아는 조심스럽게 마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어 금영화궁을 바라보았다.
높은 계단 위 자리한 짙은 붉은색의 궁은 빛의 각도에 따라 금색으로 빛나 몹시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아름답네요.”
“보기에는 좋지만 안은 구식입니다. 지은 지 오래되었으니 외관이라도 잘나야겠다며 몇 대 전 황제가 특별한 안료를 발랐다고 하죠.”
디하트가 초 치는 소리를 하며 세벨리아를 에스코트했다. 세벨리아는 어처구니가 없어 잠깐 샐쭉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비화가 있다한들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죠.”
“아름답지 않다고 한 게 아닙니다. 단지 당신의 칭찬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건물은 아니라고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세벨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러니까 디하트의 말인즉슨 금영화궁이 자신의 칭찬을 받는 게 아니꼬웠다는 뜻이다.
“당신 앞에서 무슨 말을 못 하겠네요.”
“내가 뭔가 잘못했습니까?”
돌연 걸음이 느려지더니 그가 세벨리아를 내려다보며 우울하게 물었다.
“미안해요. 나는 단지…. 하아.”
그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았다. 벙긋거리던 입술이 꾹 다물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궁금증이 돋은 세벨리아는 그가 침묵하는 걸 용서하지 않았다.
“왜 말을 하다 말아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요.”
“그게 말입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시답잖은 것이었는지 디하트의 목덜미가 살짝 붉어졌다. 세벨리아의 끈질긴 재촉에 그는 결국 속내를 털어놓아야만 했다.
“힐렌드 홀을 보고는 한 번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 없잖습니까.”
“아.”
“억지로 하게 된 정략결혼이니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건 이해합니다. 당신을 탓하는 것도 아니고, 나는 그러니까. 단순히.”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말을 흐린 그가 한숨과 함께 흐린 미소를 지었다.
“그냥 질투가 났나 봅니다. 미안해요.”
작게 속삭인 말에 세벨리아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녀는 계단을 모두 올라 입구에 다다라서야 이성을 되찾았다.
“디하트, 아니. 공작님, 아까…….”
무심코 그의 이름을 부른 세벨리아는 주위에 귀족들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아차.’
함부로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모습을 보였다간 어떤 말이 돌지 몰랐다. 세벨리아는 빠르게 입을 다물고 걷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상함을 놓칠 디하트가 아니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숙였다.
“방금 날 부르지 않았어요?”
“아니에요.”
세벨리아가 고개를 내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부끄러움에 경직된 팔다리가 이상하게 움직였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픕니까? 약이 필요하면 말해요.”
“아까…. 아니, 지금 말하기엔 좀 그래요. 먼저 들어가면 안 될까요?”
사방에서 날아오는 시선이 따가웠다. 여기서 방금 전 일을 꺼내 봤자 사람들에게 좋은 눈요기만 될 뿐이었다.
“벨라, 자꾸 그렇게 말을 돌리면 아픈 거로밖에 해석이 안 됩니다.”
디하트가 엄한 얼굴로 말하자 세벨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연회는 처음이라 좀 긴장이 되어서요. 저 같은 사람이 들어가도 되나, 걱정이 되기도 하고… 아, 제내 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네요.”
다행히도 이번 변명은 잘 먹혀 들어간 것 같았다.
“어쩌죠? 이러다 들어가서 기절할지도 몰라요.”
세벨리아가 긴장한 것처럼 웃어 보이자 디하트는 잠시간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차라리 그편이 나을지도 모르겠군요.”
“네?”
“그리되면 당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저 남자들 앞에서 당당히 당신을 끌어안고 나올 수 있을 테니까요.”
세벨리아는 화들짝 놀라 그로부터 몸을 떼어 냈다. 아까 질투부터 그렇고 왜 안 하던 말을 하지?
“하지만 그렇게 되기 전에 당신에게 약부터 먹일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노, 농담한 거죠?”
“글쎄요.”
어깨를 으쓱이며 디하트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와 함께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세벨리아는 미심쩍은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두 사람은 회랑을 지나 연회가 열리는 홀 가까이 당도했다. 활짝 열린 문 앞에 선 시종이 그들을 보고선 헛기침을 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디하트 인버네스 공작님과 파트너께서 입장하십니다!”
음악 소리와 말소리로 가득한 홀이 일시에 침묵에 잠기는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홀에서 가장 먼 곳, 내로라하는 귀족들이 포집해 있는 상석. 그곳에 모여 있는 이들의 눈이 두 사람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드디어 도착하셨군.”
오늘 연회의 또 다른 주인공, 삼황자 하레스 벨크람이 기쁨을 주체 못 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