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2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29)화(129/171)
부드럽고 감미로운 선율이 연회장을 풍요롭게 채우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살짝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훑었다. 아직 연회의 주인공인 황제와 일황비는 등장하지 않은 것 같았다.
“저쪽으로 가요.”
디하트가 그녀의 뒤를 따라 벽 쪽으로 다가섰다. 귀족들은 머뭇거리면서도 그들에게 계속해서 눈길을 던졌지만 두 사람은 적당한 선에서 그들을 무시했다.
“후우.”
“긴장됩니까?”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입가를 본 디하트가 물었다. 여차하면 바로 돌아갈 기세에 세벨리아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라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버틸 만하니 너무 과민반응하지 말아요.”
“당신 건강은 언제나 과민하게 반응해야 할 사안이에요.”
할 말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세벨리아는 어째선지 갈수록 단호해지는 디하트를 희한하다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디하트는 그녀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기며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아직 누구와도 인사를 나누지 않았는데 이래도 돼요?”
“아쉬운 쪽이 알아서 하겠죠. 물을 가져올 테니 잠시 기다리고 있어요. 누가 말 걸면 그냥 무시해도 됩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요. 세벨리아는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말을 꾹 참고 그를 보냈다. 디하트가 자리를 떠나자 달라붙는 시선들이 더 노골적으로 변했다.
‘이게 수도의 연회라는 거구나.’
세벨리아는 어색함을 감추며 힐끔힐끔 연회장을 구경했다. 금색과 흰색을 테마로 꾸려진 홀은 화려하면서도 우아했다.
테이블 위를 장식한 유리 세공품을 감상하고 있던 때였다. 푸른 색 유리 위로 누군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디하트인 줄 알았으나, 체격과 키가 그와는 달랐다.
‘누구지?’
흐릿하고 뒤틀린 상은 상대를 제대로 보여 주지 못했다. 붉은 기운이 도는 눈동자를 보았을 땐 혹시나 했는데, 하얀 머리가 아닌 걸로 봐서는 샤테이안도 아닌 듯했다.
세벨리아는 가볍게 심호흡했다. 머릿속으로 지난 며칠간 황실 연회에서의 애티튜드를 몸에 새기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이 스쳐 지나갔다.
‘어깨는 힘을 뺀 듯하면서도 굽어지지 않게, 턱은 살짝 들어도 좋으나 너무 오만해서는 안 되고…….’
어디까지나 지금의 자신은 평민인 걸 잊지 말기. 세벨리아는 주의 사항을 거듭 떠올리며 유리 위로 점점 가까워지는 상대의 모습을 주시했다.
그녀가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를 걸친 순간이었다. 뜻밖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름다운 꽃병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서 있는 건 하레스 벨크람 삼황자였다.
“일황비 전하의 고향인 동부 로투레알에서만 만들어지는 색유리 꽃병입니다. 바다를 옮겨 놓은 듯한 저 색깔 때문에 화가들 사이에서도 제법 인기 있는 수집품이죠.”
“삼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벨라 어펜츠라고 합니다.”
세벨리아는 가까스로 놀라움을 내리누르고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 굽혀 인사했다. 그러자 하레스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저었다.
움직임에 따라 회색 머리카락이 잔잔히 흔들렸다.
“됐습니다. 겨우 인사 하나 받아 내려고 내 얕은 지식을 자랑한 게 아니니까.”
세벨리아는 말없이 하레스를 바라보았다. 회색 머리에 분홍빛 눈동자를 가진 그는 전체적으로 흐릿하고 유약한 인상이었다.
샤테이안이 어디 놔둬도 튀는 존재라면 그는 단상 위에 세워 두어도 있는지조차 모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일단 인상은 듣던 것과 일치하는데, 미묘한걸.’
소탈하고 순박한, 정권이나 권력보다는 예술과 자연에 몰두하는 삼황자. 그런데 그런 삼황자가 왜 자신에게 말을 붙였을까. 그런 질문이 떠오르기가 무섭게, 삼황자의 뒤에 서 있던 여인이 앞으로 나왔다.
“전하, 제게는 소개시켜 주지 않으실 건가요?”
“아, 미안하군. 벨라 양, 이쪽은 내 파트너로 참석한 로잘린 발레리 영애라네.”
“만나서 반가워요.”
로잘린이 웃으며 내민 손을 세벨리아는 맞잡을 수 없었다. 호수처럼 잔잔했던 푸른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곱게 휘어진 금빛 눈동자, 귀 뒤로 넘긴 가느다란 검은 머리카락. 햇살 아래 조금 그을린 피부가 무척이나 건강해 보이는, 수도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생기 넘치는 미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다정한 미소와는 달리 너무나도 차갑고 냉혹했다.
“벨라 양?”
로잘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가까이 다가섰다. 찌를 듯한 눈빛과 부조화를 일으키는 다정한 목소리에 세벨리아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어찌할 줄 모르는 그때, 디하트가 뒤쪽에서부터 사람들을 제치며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디하트와 로잘린의 시선이 마주쳤다. 정오의 태양처럼 눈부신 금빛 눈동자와 새벽안개를 헤치고 등장한 태양처럼 서늘한 금색 눈이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일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빗긴 디하트가 세벨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물었다.
“벨라, 무슨 일입니까?”
“아, 그게.”
“누가 파트너 없이 혼자 쉬고 있는 여인을 괴롭히러 왔나 보았더니 의외로군요. 분명 제 앞에 계시는 분은 삼황자 전하이실 테고, 그럼 그 옆은… 아아.”
디하트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알 만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에 로잘린이 웃으며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였다.
하레스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에 선명하게 꽂혀 들었다.
“폐하께서 오시는군요.”
하레스는 그렇게 말하고선 로잘린을 데리고 상석으로 사라졌다.
뿔 나팔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제국의 정당한 통치자 아그렌드 벨크람의 행차를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적막 위로 웅장한 선율이 깔렸다. 연회장 맞은편에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서부터 압도적인 음률이 파도처럼 움직였다.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활짝 열린 문을 통해 황제와 일황비, 그리고 딜리언 일황자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따라 이황비와 샤테이안 이황자, 하레스 삼황자의 순서였다.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좋군.”
황제는 형식적인 인사 대신 지친 눈빛으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와병 중이라더니 꽤나 건강이 좋지 않은 듯했다.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는 왜 건강이 안 좋아지신 거지?’
자신과 디하트의 정략결혼을 추진할 무렵까지만 해도 그는 정정했었다. 세벨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병명이나 질환 등에 대해 들은 바가 없나 떠올리려는 순간이었다.
“……!”
황제가 그녀 쪽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했다. 뒤에서 잡아 오는 디하트의 손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그리했으리라.
“날 보는 겁니다.”
낮은 속삭임이 세벨리아의 귓가를 타고 흘러들었다. 그녀가 안정을 되찾을 무렵 황제는 흥미를 잃었는지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일황비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고는 바로 자리로 가 앉았다.
일황비는 눈웃음을 짓더니 황제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지루한 연설보다 즐거운 말 한마디가 더욱 필요한 때이지요. 폐하께서 그대들의 마음을 평안케 하고자 손수 말씀을 아끼셨으니 존귀하신 분의 뜻대로 모두 즐깁시다.”
그렇게 형식적인 절차가 모두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지독히도 존재감이 없던 하레스 벨크람 황자가 갑자기 앞으로 나오며 놀라운 말을 던졌다.
“일황비 전하께 청컨대 잠시 이 자리를 빌려 목소리를 내어도 되겠습니까.”
“하레스? 의외로군요. 그대에게 그럴 만한 용무가… 아하.”
하레스의 시선이 닿는 곳에서 얼굴을 붉히며 서 있는 로잘린을 발견한 일황비가 부드럽게 웃었다.
“원하는 대로 해요, 삼황자. 기쁜 소식은 많은 이와 함께 나눌수록 좋은 법이지요.”
“감사합니다.”
일황비가 황제의 곁으로 물러나자 하레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자신을 빙 둘러싼 귀족들을 순수한 눈으로 둘러보더니 곧 긴장한 얼굴로 로잘린을 불러냈다.
“로잘린 발레리. 이리 나와 내 곁에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예, 전하.”
볼을 붉히며 수줍게 웃는 여인은 누가 보아도 청혼을 기다리는 소녀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은 가슴을 가득 채우는 따스한 예감에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황족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미한 시골 가문의 영애라는 아름다운 동화를 바랐다. 그 열기가 어찌나 뜨거웠던지 세벨리아마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의 기대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직감했다. 자신을 꿰뚫어 보듯 바라보던 그 냉혹한 시선. 그건 순진한 시골 영애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세벨리아의 예상대로 일은 아주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레스 벨크람은 로잘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청혼을 하는 대신 디하트를 마주 보았다.
“이 자리에서 모두를 증인으로 하여 선언하겠다. 나, 하레스 벨크람은 진실한 피에 이름을 걸고 내 약혼녀 로잘린 인버네스가 빼앗긴 정당한 권리와 의무를 되찾아 주고자 한다.”
온유하고 나약해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삼황자는 지금 이 순간, 무대의 주인이자 연회의 중심이었다.
“그 불운한 사고, 끔찍한 비극의 날. 살아남은 건 디하트 인버네스 공작만이 아니었다. 로잘린, 내 소중하고 아름다운 로잘린이 그 자리에 있었다.”
열기에 이글거리는 분홍빛 눈동자는 어느새 샤테이안과 비슷할 만큼 짙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세벨리아는 그의 눈이 자신을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그녀는 이제껏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가난한 남작 가문의 영애로 자라야만 했다. 그녀의 가족이 그녀를 단 한 순간도 찾지 않았기에, 마땅히 누려야 할 것을 빼앗긴 채 무지함 속에 버려져 있었다.”
그 순간, 세벨리아는 자신을 붙잡고 있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디하트.’
그녀가 몸을 돌려 그를 붙잡기도 전에, 절절한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나는 로잘린이 마땅히 가져야 했던 것들을 돌려줄 것이다. 그녀의 가족이 해 주지 않은 일을 내가 해 줄 것이다. 그 대가가 참혹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