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32)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32)화(132/171)
점심 무렵 시작된 보고는 저녁이 돼서야 끝났다. 디하트는 라이언이 일레이를 통해 보내온 서류들을 정리한 뒤 긴 한숨을 내쉬었다.
새 지시 사항을 복기하던 일레이가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지하조직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라이언 경에게 일임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특이 사항이 발생하면 우편이 아니라 휘하 기사를 통해 직접 전달하라고 말씀드렸으니 중간에 새어 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수고했다.”
디하트가 손을 휘젓자 일레이는 조용히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침묵이 그를 감싸 안기가 무섭게 끔찍한 두통이 엄습했다.
“윽.”
디하트는 다급하게 서랍을 열었다. 손이 이리저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고 물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원하는 건 찾을 수 없었다.
끈질긴 통증 속에서 그는 제 처지를 기억해 냈다. 신경 안정제를 비롯한 비슷한 부류의 약이 모두 금지당한 비루한 처지 말이다.
‘미치겠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도 통증은 여전했다. 뭐든 의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디하트는 혀를 차고선 협탁을 손으로 짚고 일어섰다.
그때였다. 머리에서 시작된 통증이 불붙듯 번져 나갔다. 시야가 기울어진 걸 느낀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아.’
다치면 안 되는데. 또 혼난단 말이야. 헛웃음이 나올 만큼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몸은 속절없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그는 나름대로 일어서기 위해 애썼으나 무용지물이었다.
며칠 동안 시달린 몸은 그렇게 쉽게 주도권을 내주지 않았다.
“디하트!”
정신을 차리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세벨리아가 보였다. 디하트는 그제야 점심에 보았던 덩굴이 자신을 감싸 안은 걸 깨달았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디하트는 느린 사고로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아.”
통증으로 쓰러지는 날 받아냈구나. 아까 전 클로드를 붙잡았던 것처럼.
“하하.”
디하트가 힘없는 웃음을 내뱉은 순간, 세벨리아는 속이 탄다는 게 무슨 말인지 체감했다. 그녀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디하트를 응시했다.
“미안해요.”
지은 죄를 알기에 그는 사과부터 건넸다. 원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닌데 또 시무룩해하는 꼴을 보니 왠지 속이 쓰려, 세벨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그보다 당신 지금 뭐라도 좀 먹는 게 좋겠어요.”
“음. 그것보단 약이 더 필요한 것 같은데.”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각하자 다시 고통이 밀려들었다. 역시 신경성인가. 디하트는 신음을 참기 위해 이를 꽉 물었다.
“빈속에 먹었다간 속만 상해요. 하인을 불러 식사를 올려 보내라고 할 테니 그때까지 잠깐만 참을 수 있겠어요?”
“하아, 노력해보죠.”
디하트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젖혔다. 세벨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튕겼다. 그러자 디하트를 단단히 붙잡고 있던 덩굴이 천천히 움직이더니 그를 긴 소파에 내려놓고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어요?”
“음.”
자유를 되찾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순식간에 제 앞에 당도한 세벨리아와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그녀의 눈빛에 디하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었다.
“디하트.”
탁한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미안해요. 하인은 나중에 부르고, 잠깐만 같이 있어 줄래요?”
낮게 잠긴 목소리 위로 피로가 배어있었다. 세벨리아는 가라앉은 눈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실은 은연중에 알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용기 냈어야 했는데.’
그 뻔뻔함이라는 걸 그를 대할 때도 적용했어야 했는데, 차마 그러질 못했다.
가족이라는 상처를 건드리는 게 무서워서. 괜스레 걱정한답시고 오지랖을 부렸다가 아슬아슬한 관계를 망쳐 버릴까 봐. 겨우 그런 게 걱정되어서…….
‘나는 아직도 불안한 걸까.’
사제 관계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는 클로드를 상대로는 제멋대로 잘만 행동해 놓고서는 막상 디하트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잘못 건드리면 그대로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제 시야 안에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아니면 믿지 못하는 걸까.’
세벨리아는 쓰게 웃으며 디하트의 뺨을 어루만졌다. 따스한 온기에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제게 온순하게 몸을 맡긴 디하트는 한눈에 보기에도 퍽 파리했다.
며칠 만에 움푹 팬 뺨과 날카로워진 턱선을 훑으며 세벨리아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이 정도의 아무것도 아닌 손길로 안식을 취하는 그인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그의 주변을 빙빙 돌기만 했다.
“…….”
소파에 앉아 그의 머리를 제 무릎 위에 눕히자 디하트가 조용히 눈을 감으며 숨을 내쉬었다.
“하아.”
오랜만에 맞는 평화였다. 세벨리아가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차라리 솔직히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승계권에 관해서도,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말을 한다면…….”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요.”
번쩍 눈을 뜬 디하트가 서늘하게 내뱉었다.
“그건.”
“그 애를 붙들고, 당연히 네가 죽은 줄 알고 찾지 않았다. 우리는 전혀 몰랐다, 그러니 내가 공작이 된 건 당연한 일이다. 이런 말이라도 늘어놓을까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은 스치면 베이기라도 할 듯 서늘했다. 디하트는 제가 말해 놓고 놀란 듯 입술을 깨물었다.
세벨리아는 상당히 놀랐으나, 그다지 상처받지는 않았다.
‘나를 향한 말이 아니니까.’
디하트의 날 선 말들은 아마 로잘린에게 품고 있는 죄책감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클로드와 달리 그는 정말로 로잘린이 죽었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사실 생각해 보면 참 씁쓸한 일이었다. 그 당시 디하트는 로잘린처럼 똑같이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일 뿐이었다. 헌데 그녀가 살아 있는 걸 몰랐다고, 그녀를 찾지 않았다고 원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미안합니다, 내가 지금 제어가 되질 않아서…….”
눈을 뜬 그가 창백한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사과하려는 걸 세벨리아가 말렸다.
“아뇨. 그러지 말아요. 내가 무례했어요. 다른 사람의 가족 문제에 함부로 말을 얹으면 안 되는 건데. 상처 줬다면 미안해요.”
“아니, 아닙니다. 벨라,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디하트가 몸을 일으키며 두서없이 내뱉었다. 무례한 참견이라니. 그런 단어는 세벨리아와 함께 놓일 수 없는 말이었다.
그녀가 하는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그저 기꺼웠다. 만약 그녀가 억지를 부려 자신을 옆에 잡아 놓더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자신을 감금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아마 감사히 그녀의 뜻에 따를 것이다. 그러니.
“내게 사과하지 말아요. 설사 당신이 내게 칼을 겨누었다 하더라도, 정말로 그런 날이 올지라도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
“내가 저지른 짓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니까.”
말이 가진 무거운 분위기에 놀란 세벨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디하트가 잔뜩 찡그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진지했나 보군요. 난 그냥, 당신이 내게 상처를 준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윽, 아….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힘없는 웃음을 흘린 그가 세벨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래도, 곁에 있어 줄 거죠? 나 지금 아파요, 벨라. 당신이 없으면 다시 쓰러질지도 몰라.”
세벨리아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디하트가 그녀의 손을 내려 제 뺨에 갖다 대며 속삭였다.
“당신을 붙잡기 위한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준다고 했잖아요.”
그 말에 심장이 덜컹였다. 방금 전까지 말다툼 아닌 말다툼을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부끄러운 분위기였다.
세벨리아가 저도 모르게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무는데 디하트가 낮게 신음했다.
“윽.”
다시 통증이 시작된 것 같았다. 고통이 꽤나 심한지 식은땀이 배어 나오는 이마에 세벨리아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베어 물더니 에티라를 불러내 속삭였다.
“워츠 씨를 불러와.”
“그럴 필요 없어요. 그냥 당신 곁에 누워있으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디하트가 낮게 읊조리는 걸 들은 세벨리아의 눈이 차갑게 굳었다. 그녀는 단호하게 디하트의 말을 무시하고 에티라를 가볍게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피릿!
에티라는 디하트의 위를 한 번 선회하더니 그대로 복도로 날아갔다. 디하트는 무어라 말을 더 하려다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부여잡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고통이 점점 심해지는 모양이었다.
“내일 일정은 취소하는 게 좋겠어요.”
“그건 절대로 안 돼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 디하트는 세벨리아의 권유를 거절했다. 내일 두 사람은 구속된 네이튼 웨든을 찾아가 환영술을 이용한 심문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아직 행방이 묘연한 피해자들의 시신을 찾아내고, 더불어 네이튼이 사일러스에게 명령을 받았다는 걸 입증할 만한 정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겨우 허가를 받아 낸 거잖습니까. 나 때문에 날릴 수는 없어요. 미안합니다,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시켰군요.”
환영술은 이제 막 알려지기 시작한 능력이었다. 사실 샤테이안과 그의 보좌관으로 알려진 환영술사 루드밀이 아니었다면 이런 기회를 얻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황실치안국을 비롯한 수사관들은 환영술을 이용한 탐문 및 심문의 정확성과 안정성에 회의를 표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세벨리아는 자신이 그의 사과를 받아도 될 만한 입장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심문을 미루면 내 손으로 신뢰도를 떨어트리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지금까지의 일을 정리해 보자면 이러했다.
클로드와 디하트는 이전부터 계속 자신의 스승과 보호자를 자처하며 걱정을 빙자한 참견을 여러 번 지속해 왔다. 헌데 이렇게 심각한 일을 앞에 두고 갑자기 이전의 행보와는 반대되는 태도를 보였다.
심지어 몸 관리까지 제대로 못 해 자신이 심문 일정을 취소하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다니.
‘이거, 화를 내도 되는 것 같은데.’
더불어 그녀는 가족 문제에 함부로 말을 얹어 미안하다는 제 말을 취소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세벨리아가 고심하는 차에 워츠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벨라, 무슨 일입니까. 아까부터 에티라가 자꾸만 머리를 쪼아 대는 턱에 정신이 없어요.”
“아, 오셨군요. 디하트가 두통을 심하게 앓는 것 같아서요. 신경 안정제를 먹어야 할 것 같은데 한번 봐주시겠어요?”
“진료 도구를 챙겨 오길 잘했군요. 일단 누워 보겠습니까?”
반 시간 뒤, 워츠는 다행히 제가 조합한 안정제로 통증이 가라앉을 것 같다며 약을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사이 세벨리아는 하인에게 시켜 식사를 내오게 했다.
“먹어요.”
주저하다 결국 수저를 드는 모습이 병색이 완연한 환자 꼴이었다. 어떻게 저 남자를 겨우 건강하게 만들었는데, 도로 이 지경이라니.
세벨리아는 물잔에 미지근한 물을 따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일단 하루빨리 입궁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