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3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37)화(137/171)
웨든 저택은 수십 년이 지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오래된 전통과 명예를 수호하는 석상과 장식물을 지나치는 그렌의 눈에 섬뜩한 빛이 서렸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네 흔적마저 느껴지지 않는구나, 에일레.’
휘황찬란한 복도 위로 과거가 신기루처럼 겹쳐졌다. 이제는 기억도 희미한 어느 옛날,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러 이곳에 처음 방문한 날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렌, 와 줘서 고마워.] [설마 내가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에일레? 그렇다면 실망이야.] [넌 항상 그렇게 얘기하더라. 그래도 고마워.]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을 앞두고 행복해하던 에일레는 쌍둥이를 낳고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고 사일러스는 고심했을 게 분명했다. 에일레와 결혼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동부 귀족 세력에 편입될 수 있었는데, 그 연결 고리가 끊어져 버렸으니 말이다.
그렌은 바로 동부 귀족들에게 그가 언제든 새 아내를 맞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의심의 눈초리는 금세 그를 향했고, 결국 사일러스는 재혼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와 함께 서약문을 작성해야만 했다.
그렇게 모든 일이 잘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은 북부를 집어삼키기 위해 라쉬 인버네스와 결혼했고, 일황비는 황후를 제거하여 황태자위에 대한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 하지만.
‘그 계집애가 나타난 순간부터 모든 게 뒤틀어진 거야.’
세벨리아 웨든. 그녀는 웨든 후작이 낳은 부정의 산물인 동시에 그가 맹세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아내만 들이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었나? 원하는 대로 서약까지 했음에도 구질구질하게 구는군. 일황비 전하께서도 신경 쓰시지 않는 일로 귀찮게 하지 말게.]차라리 그때 죽여 버릴걸, 그렌이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복도를 스치는 그녀의 녹빛 눈에 살기가 어렸다.
하지만 에일레를 닮은 쌍둥이가 신경 쓰여 그러지 못했다. 에일레에 대한 동정심과 안타까움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너무 물렀어.’
왜 그랬을까. 이제 와 후회가 들었다. 어차피 에일레는 죽었거늘, 그녀의 아이들이 뭐가 중요하다고 경고만 남긴 채 사일러스를 놔주었을까.
그렇게 하나둘씩 손에서 놓아준 것들이 몸집을 불려 되돌아올 줄도 모르고.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감히 제게 맞설 줄도 모르고!
“부인, 후작님께서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으셨……!”
“비켜라.”
집무실 앞에 다다르자 집사가 그녀를 막아섰다. 하지만 겨우 그 정도에 위축될 그렌이 아니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드높이지 않고도 집사를 물리칠 방안을 알고 있었다.
“황실치안국의 수사관들이 내일 후작저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가?”
비웃음이 가득 실린 목소리에 집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협박에 얼어붙은 집사 대신 문을 연 건 사일러스와 함께 있던 수하였다.
“들어오시라고 하십니다.”
“네 주인이 적어도 너만큼 멍청하진 않아서 다행이군. 비켜.”
그렌은 집사를 위아래로 한 번 훑었다. 경멸이 어린 싸늘한 눈초리에 집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렌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치켜들고 집무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서 오라는 말은 못 하겠군, 그렌.”
“당신과 말을 섞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사일러스.”
서로를 노려보는 시선이 치열했다. 팽팽한 긴장감에 수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적막한 방 안에 들리는 침 넘어가는 소리에 그렌이 비뚤게 웃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날 상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나 보지? 가녀린 여인을 상대로 남자가 둘이나 나서다니. 참으로 하잘것없는 용기야.”
“당신의 그 비꼬는 말은 편지로도 충분히 즐겼으니 이만 용건을 말해. 인버네스 공작이라면 분명히 내가 맡는다고 이야기했잖아. 도대체 왜 수도로 내려온 거지?”
추궁하는 듯한 어조에 그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누구에게 감히 눈을 부릅뜨는 건지.
“네가 그리 멍청하게 행동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나설 일은 없었어. 어물쩍거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진작 디하트를 죽였다면 로잘린 그년 때문에 골치 아플 일도 없었을 거라고.”
“하! 결국 그것 때문이었나. 삼황자가 주워 온 계집애 하나에 벌벌 떨어서 수도까지 행차했다 이거지.”
“잘난 척하지 마, 사일러스. 당신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을 텐데? 네이튼이 당신 대신 탑에 갇혀 있다는 건 제국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어.”
칼만 꺼내 들지 않았을 뿐, 집무실 안의 분위기는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혓바닥을 무기로 서로의 약점을 노리는 두 사람에게선 짙은 살기가 묻어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서로를 완전히 해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서약이 그들을 묶고 있었으며, 서로 나누어 가진 증거들이 각자의 목을 죄고 있었다.
결국 이 난장판의 끝은 지긋지긋한 거래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언쟁을 주고받던 사일러스는 두 손을 들며 휴전을 청했다.
“이쯤 하면 된 거 아닌가? 이제 더 이상 소리칠 기력도 없군. 앉아. 앉아서 이야기하지.”
“구석에 처박혀 날 힐끔거리는 저 쥐새끼부터 내보내.”
“기꺼이.”
사일러스가 턱짓하자 수하는 꽁지 빠져라 도망갔다. 집무실 문이 집사에 의해 닫히고 침묵이 방 안에 낮게 깔렸다.
사일러스는 소파에 앉은 그렌을 바라보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원하는 걸 말해. 나도 내 서명이 적힌 의뢰서들이 황실치안국의 손에 넘어가는 건 보고 싶지 않으니.”
“흥.”
코웃음을 친 그렌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후우. 짧은 한숨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흥분에 짙게 달아올랐던 녹색 눈동자가 차분한 빛을 띠고 사일러스를 응시했다.
“계획대로 디하트와 세벨리아는 당신이 처리해. 나는 로잘린을 맡을 테니까.”
“두 사람을 한꺼번에 처리하라는 건가? 그건 나도 힘들어. 공작 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짜는 데에도 이렇게나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지금껏 미적거리며 저택 안에 처박혀 있던 이유가 뭔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사일러스. 공작을 죽이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네 흔적이 남지 않게 죽이려고 머리를 쥐어짜느라 늦장 부렸다는 거 다 아니까.”
무슨 말을 못 하겠군. 사일러스는 눈썹을 찡그리며 제 자리에 걸터앉았다. 확실히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이런 게 불편했다.
“좋아, 이렇게 폭군처럼 내 저택으로 쳐들어와 명령을 내릴 정도라면 제대로 된 계획 정도는 가지고 있는 거겠지. 말씀해 보시지요, 그렌 부인.”
비아냥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그렌이 손에 턱을 괴었다. 자연스럽게 내려 뜬 녹빛 눈동자가 바닥을 한 번 훑더니 올라와 사일러스를 응시했다.
“가까운 시일 내에 황제가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은 당신도 들었겠지.”
사일러스가 인상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그에 대해서는 그도 들은 바가 있었다.
타국에서 중요한 인물이 손님으로 온다는 소문과 함께 황제가 그에 대한 환영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 날 수도를 지키는 대부분의 인력이 황제궁에 집중된다는 정보가 손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눈엣가시인 이를 죽이기에 최적의 날이었다.
하지만 그 행사가 구체적으로 어느 날인지, 그저 내방객을 맞이하는 접객인지 아니면 연회까지 포함하는 일인지는 발표되지 않아 지금껏 일을 미뤘을 뿐이다.
‘하필이면 같은 날을 고를 줄이야.’
하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여자였다. 사일러스가 혀를 차며 더 말해 보라 눈짓했다. 그렌은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유심히 살펴보더니 말을 이었다.
“구체적인 날짜가 나왔어. 일주일 뒤야. 그날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디하트 인버네스와 세벨리아 그 계집애를 잡아 죽이도록 해.”
“그걸 지켜보고만 있겠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물론 아니지. 어차피 우리는 한배를 탄 사이잖아? 비록 서로를 믿지는 않지만.”
그렌이 다정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나는 따로 할 일이 있어. 자세한 건 설명할 필요 없겠지.”
“너무 일방적이네. 묻지 않는 대신 조건을 하나 추가해 주지 않겠나?”
그렌이 눈을 치켜뜨자 사일러스가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몸을 한껏 기대앉았다.
“넬리아와 플로라를 서로에게 보내도록 하지. 직접 곁에 두라는 게 아니야. 단지 당신이 나를 배신할 때를 대비해 나도 패 하나는 쥐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당신 말마따나 우린 서로를 믿지 못하지 않나.”
그렌이 이를 악물었다. 감히 자신의 딸을 인질 취급하는 거냐며 화를 내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상대 또한 하나뿐인 딸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좋아. 하지만 내 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깔끔하고 만족스러운 거래군. 아, 내일 아침 마차를 태워 보낼 테니 지금 머물고 있는 곳 주소를 알려 주고 가도록 해.”
그렌은 마지막까지 그를 노려보더니 대답 없이 일어나 집무실을 나갔다. 사일러스는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코웃음을 쳤다.
* * *
네이튼 웨든의 첫 심문을 성공리에 마무리하고 며칠 뒤, 세벨리아는 샤테이안으로부터 뜻밖의 편지를 받았다.
첫 번째 심문으로 알아낸 정보가 정확했으며, 이제껏 행방불명 처리 되었던 피해자들 몇 명의 시신을 추가로 찾아내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치안국 내부에서 그녀의 능력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기쁜 소식이네요.”
더해서 샤테이안은 두 번째 심문의 날짜가 나왔다며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날짜라는 게 바로 황제가 직접 챙기고 있다는 환영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타국에서 오는 중요한 손님이 도착한다는, 그날이구나.’
딱히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황족과 중앙 귀족들만이 참석해 손님을 맞이한다고 했으니까. 신분상 평민인 자신이 참석할 의무는 없을 터였다.
“그동안 열심히 준비해서 가야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네이튼의 기억을 수차례 뒤지며 ‘특기’에 대한 감각이 잡히기 시작했다.
‘세 번째로 기억을 뒤졌을 때 원하던 시간대의 기억이 나왔어.’
그녀가 바라던 건 2년 전의 3월이었는데 우연찮게 2년 전 5월의 기억이 나왔다. 그 뒤로 몇 번 더 시도했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딱 거기까지가 가능한 선인지도 몰라.’
샤테이안이나 다른 사람들이 알면 놀랄 일이었지만 세벨리아는 느긋했다. 그녀가 두 번째 심문의 결의를 다지는데, 디하트가 그녀의 상념을 건져 올렸다.
“하긴 환영회 때문에 시끌벅적할 테니 탑에서 웬만한 소음이 들려도 묻히겠죠.”
돌아보니 그가 서슬 퍼렇게 웃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운을 띄웠다.
“그러고 보니 그건 계속 고착상태인가요?”
“무엇 말입니까?”
“로잘린을 초대하는 일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