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4)화(14/171)
인버네스를 떠나기 하루 전, 그녀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참 묘하네.”
마지막으로 가짜 시체를 점검하고 있던 때였다.
다 먹으면 분명 치사량을 넘을 게 분명한 수십 개의 약병들 한가운데. 세벨리아의 환영은 텅 빈 수면제 약병을 손에 쥐고 입가에 피를 흘린 채 누워 있었다.
데니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손을 말아 쥐고 있었다. 평온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세벨리아는 굽혔던 무릎을 펴고 데니사의 곁으로 돌아왔다. 문간에 선 두 사람은 가짜 시체를 바라보며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가씨가….’
‘내가 죽는 순간의 모습이 이렇겠구나.’
세벨리아는 곧 자신에게 들이닥칠 미래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공포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세벨리아는 야릇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확정된 미래는 오히려 그녀에게 확신을 불어넣었기 때문에.
‘이 답답하고 외로운 저택에서 저렇게 죽고 싶지 않아.’
쓸쓸하고 외로운 죽음. 누구 하나 곁에 있어 주지 않는 고독한 끝.
절망에 갇혀 결국 스스로 끊어 버리고 마는 목숨이라니.
세벨리아는 별채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 가짜 세벨리아를 바라보며 의지를 다졌다.
‘난 절대 저렇게 죽지 않을 거야.’
난 이곳을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서 마지막을 맞을 거야.
그런 내 곁에는 데니사와, 그곳에서 사귄 많은 사람이 함께해 주겠지.
세벨리아는 차가워진 손끝을 맞잡으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데니사가 그녀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두 사람은 마주 보며 희미한 미소를 나눴다.
“접선 지역이 어딘지는 기억하고 계시죠?”
아래층으로 내려온 데니사가 그녀의 외투를 단단히 여미며 말했다.
“응. 호숫가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 있는 숲길. 노란 스카프가 매달린 나무 아래, 맞지?”
“맞아요. 잘 기억하고 계시네요, 우리 아가씨.”
데니사가 착한 아이에게 상을 주듯 세벨리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토닥였다. 세벨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저는 일이 다 끝나면 따라갈게요.”
데니사가 단단하게 빛나는 눈으로 세벨리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장례식이 끝날 때까지 세벨리아의 시체가 환영임을 들키지 않게 하는 것. 그게 데니사가 맡은 책무였다.
“……꼭 와야 해.”
세벨리아가 그녀를 와락 껴안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다릴 테니까. 이번에도 날 데리러 올 거라고 믿고 있을 거니까.”
세벨리아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장엄하고 고독한 수도원에서 홀로 떨고 있던 자신을 찾아온 데니사를. 추위에 다 터진 그녀의 붉은 두 볼과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두 손을. 그러나 눈을 마주치자마자 자신을 끌어안은 그 품은 너무나 따뜻했다.
바로 지금처럼.
“당연하죠.”
데니사가 세벨리아를 마주 안으며 힘 있는 목소리로 외쳤다.
“열 밤이 지나면 꼭 제가 데리러 갈게요. 그러니 아무 걱정 말고 가세요.”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오르는 말과 함께 데니사는 문을 열어젖혔다.
떠날 시간이었다.
* * *
다시 현재로 돌아와, 라이언은 몹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먼저 그는 세벨리아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바로 집사를 찾아갔었다.
“공작님의 윤허 없이 장례식을 진행하다니 말이 되는 일입니까! 당장 멈추십시오.”
“이미 시작된 장례를 도중에 중단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라이언 경.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로스는 라이언의 경고에도 전혀 밀리는 기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다시 공식적으로 인버네스의 안주인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그렌을 등에 업고 라이언을 압박했다.
“그리고 어찌 감히 공작부인의 장례를 제 독단으로 처리하겠습니까. 이 일에는 그렌 부인의 허락이 있으셨습니다.”
“그건 아무 의미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돌아가신 세벨리아 님의 남편이신…….”
“림스 후작님과 바이넨 백작님께서도 허락하신 일입니다.”
그로스는 뻣뻣한 태도로 목에 힘을 주었다. 림스 후작과 바이넨 백작은 가주인 디하트마저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혈족이었다.
디하트의 할아버지인 선선대 공작의 친형제들. 가주 못지않은 힘을 가진 그들은 가문에 헌신적인 라쉬와 그렌 부부를 특히 어여삐 여겼다. 그런 이들이 가문을 위한 희생을 당연시 여기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현재 인버네스가 위태로운 자리에 있다는 걸 라이언 경도 모르시지는 않을 겁니다.”
“…….”
“이런 상황에서 하루라도 빨리 중앙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는 게 옳다는 걸 아직도 모르시는 겁니까.”
림스와 바이넨의 이름 앞에 라이언은 더 이상 무어라 항변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시는 길에 까먹지 마시고 그렌 부인께 인사부터 올리시고요.”
그로스는 끝까지 그에게 일침을 가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결국 라이언은 타들어 가는 속을 붙들고 몰래 디하트에게 보낼 전보를 적어야만 했다.
[공작부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속히 돌아오시길 바랍니다.]펜을 집어넣고 라이언은 아랫마을의 지도를 머리에 떠올렸다.
‘우편국이 어디였지.’
초조한 심정으로 라이언은 제발 디하트가 그들이 머무르던 마을에 남아 있기를 바랐다.
‘엇갈려서는 안 돼.’
아무런 소식도 접하지 못한 채, 그저 부인을 만나야겠다는 일념만으로 달려온 그가 장례식을 본다면 도대체 어떻게 될지…….
“소름이 돋는군.”
라이언은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었다. 그날이야말로 인버네스에 새로이 피바람이 부는 날이 될지도 몰랐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마구간으로 달려가 새 말에 안장을 얹었다.
우편국의 문이 닫기 전에 빨리 전보를 보내야 했다. 그 순간, 교태 어린 목소리가 그를 붙들었다.
“라이언 경?”
“…플로라 아가씨.”
고개를 돌리자 붉은 머리칼을 아름답게 틀어 올린 플로라가 보였다.
“돌아왔으면 푹 쉬지 어디를 또 가려고 그래요. 이래서 기사들이란 참.”
아마도 그로스에게 자신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왜 플로라의 등 뒤로 십 수명의 기사들이 함께 왔겠는가.
“곤란하게 됐군요.”
라이언은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플로라가 골치 아프다는 듯 팔짱을 끼며 말했다.
“라이언, 우리 얼굴 붉힐 일 만들지 말아요. 응?”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게 다 오라버니를 위한 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참나.”
어깨를 들썩인 플로라가 고압적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잡아들여. 조금 다친다 해도 상관없다.”
제게 달려오는 후배 기사들을 바라보며 라이언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것들.”
곧 마구간에 사람 비명이 울려 퍼졌다.
* * *
북부로부터 한참 떨어진 자그마한 마을의 초입. 두 마리 말이 이끄는 마차 한 대가 한적한 길에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고마워요.”
간단한 인사와 함께 마차에서 홀로 내린 건 바로 세벨리아였다. 그녀는 생기 넘치는 눈으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그리고 몇 개 없는 짐을 챙겨 길에 내려놓았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평이한 목소리였다. 세벨리아는 무심결에 약속과 달리 마부석을 바라볼 뻔했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게 아닌 마부는 깔끔하게 바로 채찍을 휘둘렀다.
히힝-
말 울음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고 곧 마차는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때가 되어서야 세벨리아는 얼굴을 가렸던 모자를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데니사 말대로 일 처리가 깔끔한 사람이네.’
세벨리아는 푸른 나뭇잎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나무들을 보며 여유롭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얼굴 한 번 마주하지 않은 마부는 이곳까지 오는 내내 질문 한 번 하지 않았다.
‘하긴 도망치는 사람들의 속사정이야 거기서 거기지.’
세벨리아는 쓰게 웃으며 짐가방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데니사가 미리 일러둔 주소를 향해 걸어 나갔다.
“아.”
갓 구운 빵 냄새가 무척이나 기분 좋았다.
* * *
잠시 머무는 곳이어서 그런가. 예상대로 집은 청소라고는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세벨리아는 오랜만에 손에 걸레를 들고 한바탕 대청소를 했다. 깨끗해진 집을 보자 가슴 속을 틀어막고 있던 기억들도 죄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살아도 되겠어.”
낡고 어두컴컴한 나무 판잣집일 뿐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마음에 꽉 차는 공간이었다. 세벨리아는 저택을 벗어난 뒤 모든 것에 관대해진 자신을 느끼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윽.”
비록 고통은 그때보다 심해졌지만…….
‘어쩔 수 없어. 멀리서 환영을 유지하는 데에는 큰 힘이 드니까.’
모처럼 청소한 보람이 없게도 바닥이 피범벅이 되었다. 세벨리아는 허탈하게 웃으며 양동이에 물을 받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열린 창틀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그녀의 뺨을 간질이며 멀리 날아갔다.
이렇게 마음 놓고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저택 안에서는 눈치가 보여서 오래 창문을 열어 놓고 햇살을 즐기지도 못했는데.
‘어쩔 땐 디하트가 날 노려보고 있기도 했지.’
그때는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세벨리아는 한참 동안 일광욕을 만끽했다.
똑똑.
“아가씨.”
그 순간 그토록 기다리던 데니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난 세벨리아가 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데니사!”
“아가씨…….”
물기 어린 눈을 한 데니사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그녀의 따뜻한 품에 세벨리아는 가슴이 떨렸다.
“이제 끝이에요. 정말 끝났어요.”
이어지는 데니사의 외침에 세벨리아는 전율했다. 떨리는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데니사가 속삭였다.
“이제 불행한 아가씨는 더 이상 없는 거예요.”
“아.”
“세벨리아 인버네스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요.”
저택을 떠난 지 나흘. 밤새 피를 토하며 환영을 유지한 지 나흘. 혹여라도 장례식이 열리지 않을까 초조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인 지 나흘.
너무도 짧지만, 영원처럼 느껴졌던 그 시간이 지나고…….
오늘 아침, 세벨리아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데니사가 건넨 소식지를 받아들며 세벨리아는 탄식했다.
“세상에.”
[세벨리아 인버네스 공작부인, 향년 29세로 사망……가족이 참석……애도의 물결이 이어져…….]그곳엔 장엄한 인버네스의 저택과 함께 제 죽음이 활자로 또렷이 적혀 있었다. 종이를 빤히 응시하던 세벨리아의 푸른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윽고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드디어…. 드디어.”
그토록 기다리던 말이었다. 혹시나 일이 틀어질까 두려움에 떨며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세벨리아 인버네스가 죽었다는, 그 단순한 말. 오직 그것만을 바라며 가짜 시체를 만들고 이곳까지 도망쳤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그토록 고대하고 바라던 일인데. 자신이 죽었다는 말은, 왜 그 말만은 제 입으로 직접 말할 수 없는 걸까.
“나, 드디어…….”
기쁨의 눈물을 흘리면서도, 세벨리아는 의아했다.
그 순간, 꼭 감은 그녀의 두 눈 위로 과거가 스쳐 지나갔다. 그와의 미래를 꿈꾸던 아름다운 날들과 그 미래가 진창으로 추락한 누명의 날.
부서진 보석처럼 찬란하고 끔찍한 과거.
그 비극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