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4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40)화(140/171)
세벨리아가 차분한 낯으로 원래 계획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특기를 펼쳐 로잘린의 기억을 확인하는 대신 유리아의 팔찌를 건네주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네요.”
상자를 로잘린의 손에 쥐여 주며, 세벨리아가 말했다.
“범인을 취조하며 알게 되었어요. 성유물을 찾는 건 핑계였고, 경매장을 돌아다니며 몰래 공작 부인의 유품을 찾아다녔다면서요.”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세벨리아는 머리가 아팠다.
‘플로라가 팔아 치운 것 중에 선대 공작 부인의 물건들이 있을 줄이야.’
어쩜 그리 교묘하게 손을 댄 건지 디하트도 뒤늦게 알아차렸다.
“삼황자 전하 몰래 경매장을 살폈지만 한계가 있었을 거예요. 그래서 친한 귀족 영애 몇 명을 구슬려 북부에서 온 물건이 있으면 대신 낙찰받아 달라고 했을 거고. 프리아 영애도 그중 한 명이었죠?”
로잘린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그녀의 말이 옳았다. 덫이라는 생각도, 프리아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는 생각도 미처 하지 못했다. 자신은 흥분에 가득 찬 상태로 1층 휴게실로 달려갔었다.
프리아 영애가 선대 공작 부인의 유품으로 보이는 물건을 낙찰받았다며 자신을 급히 불러냈으니까.
낮은 한숨을 흘린 세벨리아가 로잘린의 손을 움직여 상자 위를 덮게 했다.
“그걸로 충분해요. 당신의 기억을 볼 필요는 없어요. 아무리 정교하게 연기하려 해도 부모에 대한 마음까지 흉내 낼 수는 없죠.”
로잘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 숙인 그녀는 그저 제 손에 놓인 빛바랜 팔찌를 묵묵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세벨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가능한 푹 쉬고 있도록 해요. 어차피 당신을 오래 데리고 있을 수도 없어요. 지금도 삼황자가 사람들을 미친 듯이 보내고 있거든요.”
“이대로는 돌아갈 수 없어요.”
“네?”
어느새 고개를 든 로잘린이 세벨리아의 소매를 붙잡고 있었다.
“원래 하려던 협상 그대로 진행해요. 내 기억을 보게 해 주죠.”
태양처럼 찬란한 두 눈동자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지만 오해하지 말아요. 이건 어디까지나 날 구해 준 것에 대한 대가예요.”
* * *
세벨리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방에서 나왔다. 로잘린을 진짜라고 믿게 된 순간, 그녀가 자청하여 자신의 기억을 보라고 하다니. 참 모순적인 일이었다.
그녀가 오묘한 표정으로 복도를 지나려는데 코너에서 클로드가 튀어나왔다.
“벨라.”
“놀라라. 혹시 절 기다리고 계셨어요?”
클로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로잘린이 머무는 쪽을 흘끗 보더니 다시 세벨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딘가 간절한 눈빛이었다.
“깨어났습니까?”
“네. 다행히 큰 충격은 없어 보였어요. 하지만 모르는 일이죠. 누군가에게 목이 졸린다는 게 흔한 경험은 아니니까.”
세벨리아는 말끝을 흐리면서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중년의 사내 모습을 한 그가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수도에 온 뒤로 내내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죠.”
“네? 뭘. 아. 이것 말입니까. 난 괜찮아요. 굳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다 할 만해서 하는 거니까.”
클로드가 제 뺨을 쓰다듬으며 실없이 웃었다.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환영술을 유지하느라 분명 몸이 많이 상했을 텐데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허허로운 그 모습에 세벨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팔짱을 꼈다. 무언가를 깊이 고심하는 모습에 클로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뭘 말입니까?”
“디하트를 불러와 줘요. 급히 할 이야기가 있어요.”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에 클로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로잘린이 인버네스 저택으로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고 발작하는 삼황자의 전령을 대문 밖으로 걷어찬 디하트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클로드의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뭐지?”
눈을 찌푸리며 묻자 클로드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영애가 깨어났어. 그리고 벨라가 급히 전할 말이 있다네.”
입매를 굳힌 디하트는 기사들에게 삼황자의 전령을 더 이상 받아 주지 말라고 명령한 뒤 몸을 돌렸다. 클로드가 그의 뒤를 따라붙자 디하트가 물었다.
“무슨 일인지 전해 들은 바는 없고?”
“그래. 셋이 모인 뒤에야 이야기를 하겠다던데.”
디하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사람은 세벨리아가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에 다다랐다.
디하트가 먼저 들어가고, 클로드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하인들을 물린 뒤 문을 잠그고 돌아섰다. 세벨리아가 창가에 선 채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벨라.”
“로잘린 영애가 자신의 기억을 끌어올리는 걸 허락했어요.”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그보다 그건 폐기하기로 한 계획 아닙니까.”
디하트를 제치고 앞으로 나온 클로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세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에게 자리에 앉으라 권유했다.
“맞아요. 로잘린 영애가 진짜라면 그녀의 기억을 헤집는 일은 다시 한번 상처를 주는 일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취소하기로 했었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영애가 먼저 요구하더군요.”
한 번 숨을 삼킨 세벨리아가 힘겹게 이어 말했다.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기억을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그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진짜 로잘린이에요.”
“하아.”
클로드가 장탄식을 내뱉는 동안, 그 옆자리에 앉은 디하트는 무릎을 움켜쥔 채 침묵을 유지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금빛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수차례 말려 봤지만 소용없었어요. 그녀는 목숨을 구해 준 대가로 자신의 기억을 끌어올리는 것만을 원한다더군요.”
고집부리는 모습이 디하트와 얼마나 똑 닮았던지. 세벨리아가 흐리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마음이 편치 않아요. 이렇게 편한 방식으로 로잘린의 기억을 꺼낼 수는 없어요. 그녀가 진짜라는 확신이 든 지금은 더더욱.”
“이해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클로드.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제게요?”
클로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세벨리아가 조금 미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면…….”
세벨리아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주의 깊은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던 클로드의 얼굴이 오묘하게 변했다.
그의 곁에 앉은 디하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 * *
“많이 기다렸어요?”
문이 열리는 소리와 동시에 청량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창밖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을 구경하던 로잘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세벨리아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등장한 두 남자를 바라보며 로잘린이 말했다.
“협상을 받아들일 생각이 들었나 보군요.”
하긴, 갑자기 나타난 공작 영애의 진위 여부를 밝히는 자리에 공작이 빠질 수 없는 노릇이지. 로잘린은 순순히 납득하면서도 디하트 곁에 선 중년 남자에 이르러선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런데 저자는 이번 일과 상관없는 것 같은데…….”
“아뇨, 로잘린 영애. 그는 누구보다 지금 일어난 일에 가장 깊게 관여되어 있는 사람이에요.”
“당신의 삼촌이라는 자가?”
어처구니없는 대답에 비뚠 말이 날아갔다. 로잘린은 아차 했으나 세벨리아는 개의치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곧 알게 될 거예요. 음, 그럼 일단… 손부터 잡아 볼까요?”
세벨리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로잘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로잘린은 창백한 얼굴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말없이 그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조금 울렁거릴지도 몰라요.”
“상관없어요.”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니까. 일부러 잘라 내는 듯한 로잘린의 말에 세벨리아가 쓰게 웃었다. 그녀는 환영술을 펼치기 전 아주 잠깐 고개를 돌려 뒤편의 클로드를 응시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세벨리아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힘을 끌어올렸다. 곧 안개 깔린 휴게실 안을 가득 비추던 푸른 빛이 침대를 중심으로 폭사하듯 퍼져 나갔다.
“읏……!”
미식거리는 속에 로잘린이 고개를 숙인 순간이었다. 멀리서 사내의 장탄식이 울렸다.
그리고 로잘린은 제 곁을 뛰어 지나가는 어느 여자아이의 환영을 보았다.
“아.”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의 정원. 어여쁜 장미 덤불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풀밭에 앉아, 로잘린은 넋을 놓았다.
그건 몹시도 아름다웠으며, 또한 서글픈 광경이었다.
오후의 정원을 뛰노는 아이들은 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한 사내를 쫓고 있었다. 그들은 줄곧 클로드라는 이름을 연호하며 사내에게 꽃이며 장난감을 던지고 있었다.
“세상에.”
반대편 어디선가 아픈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어린 날의 자신을 바라보던 로잘린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이 경악에 가득 찼다.
“당신, 뭐지?”
사람 좋아 보이던 중년 남자는 온데간데없었다. 갑자기 고통을 호소하며 허리를 숙인 남자의 몸은 누군가 위아래로 잡아당긴 것처럼 늘씬하게 변해 있었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물감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중년의 주름진 얼굴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로잘린.”
아픈 미소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남자는 고동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유순한 눈매는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마냥 반짝였는데…….
“도대체 정체가 뭐야.”
떨리는 음성으로 뱉는 목소리에는 이미 정답이 들어 있었다. 로잘린은 사내의 얼굴에서 어린 날의 자신을 어깨에 태우고 웃던 청년의 얼굴을 찾아냈다.
“누구냐고 묻잖아!”
“그 대답은 제가 대신해 드릴게요.”
붙잡혀 있던 손은 어느새인가 자유를 되찾은 상태였다. 로잘린이 당황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사이, 세벨리아는 약속대로 클로드와 두 손을 잡았다.
“또 뭘 하려는 거야……?”
그 모습을 본 로잘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미약한 기대와 공포가 뒤섞인 그녀의 음성에 디하트가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모르던 진실을 알려 주려는 것뿐이에요, 영애.”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세벨리아는 환영술을 전개했다. 화아악! 꽃잎이 휘날리듯 빛의 폭풍이 그녀를 중심으로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