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4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41)화(141/171)
다시 한번 빛이 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푸른 빛이 사방을 가득 메우고, 봄날의 정원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로잘린이 눈 부신 빛에 겨우 눈을 떴을 때, 그곳은 익숙하고도 끔찍한 산맥이었다.
“헉!”
그러나 그날과는 달랐다. 칠흑 같은 어둠과 시야를 가리는 빗줄기 대신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이 숲을 내리쬐고 있었다. 로잘린은 계속해서 바뀌는 상황에 적응할 수 없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다 문득, 커다란 바위 너머에서 누군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미친 듯이 땅을 파헤치다 고개를 든 건 고동색 머리카락을 가진 야윈 얼굴의 사내였다.
순한 눈매 아래, 금빛 눈이 광기로 번뜩였다. 흙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사내가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봄날의 정원에서 조카들을 품에 안고 웃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황폐한 모습이었다. 크게 다친 건지 풀어 헤쳐진 셔츠 안에 두른 붕대에선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로잘린, 로잘린…….]한차례 빗물에 쓸려 내려간 산은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한사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절박함이 담긴 금빛 눈동자는 절망과 동시에 놓을 수 없는 한 줌의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로잘린, 내 목소리 들리니? 로잘린, 제발. 거기 있다면 소리를 내주렴. 응?]광인의 모습이었다. 하얗게 번뜩이는 눈과 반복해서 부르는 이름이 숨이 막힐 만큼 섬뜩했다.
그러나 그건 무언가를 놓아 버린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결코 놓을 수 없는 것에 매달리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로잘린. 삼촌이 왔어.]제발 대답해 줘. 눈물과 함께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로잘린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뒤늦은 대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수차례 세상이 바뀌었다. 녹음이 진 숲, 눈이 내리는 숲. 장소와 인물은 같았으나 시간과 계절은 하염없이 바뀌었다.
[로잘린. 이번에도 허탕이었단다. 널 닮은 아이가 있다길래 찾아갔는데, 또 아니었어.]어느새 세월을 얼굴에 짊어진 사내가 지친 눈빛으로 땅에 무릎 꿇었다. 옛날 옛적의 비극의 흔적은 한 줌도 남지 않은 흙에 이마를 대며 사내는 속삭였다.
[괜찮아.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아도 괜찮으니 제발 살아만 있어 주렴.]로잘린은 떨리는 호흡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꽉 다문 잇새로 핏물이 흘러내렸다. 눈물에 젖은 남자의 얼굴을 더 이상 지켜볼 용기가 없었다.
사실은,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지났다 한들 그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은 기억을 잃지 않았으니까.
* * *
“잠시 혼자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시네요.”
문을 닫고 나온 세벨리아가 뒤돌아서 말했다. 먼저 방에서 나온 두 남자가 복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괜한 짓을 한 걸까요?”
다시 칼 어펜츠의 모습을 뒤집어쓴 클로드가 초조한 음색으로 말했다. 세벨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그를 안심시켰다.
“아뇨. 그렇지 않아요. 이건 그녀에게도, 당신에게도 필요한 일이었어요.”
로잘린에게 클로드의 기억을 보여 주기로 한 건 여러 가지 상황을 따져 본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녀가 선대 공작 부인에게 보인 애정과 그리움, 그리고 자신을 붙잡은 순간 보여 준 표정을 보았을 때 그녀가 생각만큼 매몰차거나 냉정한 성격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는 오해만이라도 바로잡고 싶었어.’
세벨리아는 적어도 로잘린의 가슴 깊숙이 남아 있을 상처만이라도 치유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클로드의 기억을 모두 본 뒤 로잘린은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클로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원망과 애틋함, 분노와 그리움이 뒤섞인 눈빛.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을 거라 여기며 평생을 살아왔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그 기분. 온몸을 타고 오르는 전율과 함께 가슴에서부터 시작된 불길이 전신으로 퍼져 나가는 감각을 세벨리아는 알고 있었다.
‘내가 발라크와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겠지.’
그리고 자신이 그러했듯, 그녀에게도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이제 자신들이 움직일 차례였다.
“삼황자는 아직도 로잘린 영애를 내놓으라며 난동을 부리고 있나요?”
“네. 하지만 그래봤자 앙탈 수준의 위협입니다. 일황자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세력도 구축해 놓지 못한 삼황자 따위가 감히 북부를 상대로 이를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디하트가 서늘한 웃음을 입가에 띄우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황실로 돌려보내는 건 이대로 쭉 보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더 마르고 안색이 좋지 않더군요.”
“프리아 영애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게 좀 골치 아파요.”
디하트가 미간을 찌푸리며 벽에 등을 기댔다.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리는 모습이 곤혹스러워 보였다.
“남부에 있는 베스터 백작가의 둘째인 프리아 영애라는 사람은 존재하는데, 그게 지금 내 집 지하에 갇혀 있는 그 여자와 같은 인물은 아닌 모양이더군요.”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던 클로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군가 프리아 영애로 위장해 로잘린 영애를 죽이려 했다는 말이네요.”
세벨리아의 물음에 디하트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레 몰려오는 피로감에 한숨을 내쉬며 눈꺼풀을 문질렀다.
“배후를 캐내려 했는데 끝까지 입을 열지 않더군요. 그래서 부득이하게 여기사를 시켜 몸수색을 했는데, 이 표식이 나왔습니다.”
“이게 뭔가요?”
“……당신을 죽이려 했던 지하조직의 표식입니다, 벨라.”
무거운 침묵이 숨통을 조였다. 세벨리아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는데 멀리서 큰 소리가 들렸다.
쾅!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당장 물러가십시오!”
쿠웅! 철문을 들이박는 소리가 재차 울려 퍼졌다. 세벨리아는 놀라 창가로 다가갔다. 그녀가 막 창문을 열고 상황을 파악하려 애쓰는데 저 멀리 디하트가 벌써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당장 내 약혼녀를 내놓게, 인버네스 공작!”
하레스 삼황자가 황실기사단을 이끌고 강제 침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세벨리아가 침음했다.
“맙소사.”
“벨라, 로잘린과 함께 있어요.”
클로드가 세벨리아의 어깨를 붙들며 말했다. 그는 당장이라도 디하트의 곁으로 달려갈 태세였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도 내딛기 전, 문 열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럴 필요 없어요.”
지친 얼굴의 로잘린은 하레스를 만나기 위해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세벨리아가 당황스러워하는 사이 클로드가 그녀를 붙잡았다.
로잘린의 어깨를 잡고 돌려세운 클로드가 어린아이를 혼내듯 엄한 얼굴로 그녀를 꾸중했다.
“너는 지금 환자야.”
“저는, 그러니까.”
바로 앞에서 마주한 삼촌의 얼굴에 로잘린은 잠시 당황했다.
“삼황자님께는 디하트가 잘 말씀드릴 테니 일단 들어가 쉬고 있어. 네가 아프다는 걸 알면 삼황자께서도 납득하고 돌아가실 거다. 응?”
방금 전까지 돌려보내지 말자며 저들끼리 모의한 주제에 클로드는 좋은 말로 로잘린을 어르려 애썼다. 세벨리아가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그를 보는 것도 모르고, 로잘린은 삼촌의 걱정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발레리 남작에게서도 받아 본 적 없는 애정. 사랑한다는 말로 자신을 통제하려 했던 이황비와 하레스와 달리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그 눈빛에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그때, 밖에서 무언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콰앙!
“이게 무슨 짓이지, 공작? 감히 황족을 상대로 권능을 쓰다니. 시해 죄로 잡혀가고 싶은 건가!”
분노한 하레스의 목소리가 저택 안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그를 두고 볼 디하트가 아니었다.
“하하. 황자 전하는 바닥에 꽂힌 벼락에도 목숨의 위협을 느끼시나 봅니다. 그것참 가볍고 볼 것 없는 목숨이로군요.”
“뭐, 뭐라고……!”
이어 황실기사단과 인버네스 기사단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사태는 소강되기는커녕 점점 열기를 더해 갔으며, 멀리서 수도경비대가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세벨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환영술로 모두를 제압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녀의 손 아래로 푸른 빛이 물드는데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손등을 덮었다. 고개를 돌리자 로잘린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돌아가겠어요.”
금빛 눈동자는 확고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하레스에게는 제가 필요해요. 달리 말하자면, 절 돌려받기 위해서라면 공작님을 상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죠.”
설득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클로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번 간절한 눈으로 매달렸다.
“가지 않아도 돼. 우리가 어떻게든 할 수 있다.”
그 말에 로잘린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영롱한 금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세찬 고갯짓과 함께 다시 단단한 빛을 품었다.
그녀는 자신을 붙잡은 클로드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떼어 냈다. 클로드가 탄식 어린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겨우, 돌아왔는데…….”
침음을 흘리는 클로드를 지나치며 로잘린이 작게 속삭였다.
“아직은 아니에요.”
그 말을 끝으로 로잘린은 당당한 모습으로 정원을 가로질러가 싸움을 종결시키고 삼황자와 함께 황실로 복귀했다. 디하트가 뒤늦게 그녀를 잡아 보려 애썼지만 부드러운 거절만 돌아올 뿐이었다.
* * *
그 뒤로 로잘린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황실로 돌아간 뒤 그녀는 삼황자 궁 밖으로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억지로 잡아 두고 있는 게 분명해. 지금이라도 가서 데려와야 한다고.”
클로드가 짓씹듯 내뱉으며 집무실 안을 크게 가로지르며 서성였다. 화를 주체못하는 모습에 세벨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디하트는 자리에 앉아 삼황자가 보낸 서신을 읽는 중이었다.
채 반 장도 되지 않는 서신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고결한 마음씨를 가진 ‘내 로잘린’의 부탁으로 이번만은 무례를 참고 용서해 주겠다, 라.”
디하트가 냉소를 터트리며 편지를 불태웠다. 내 로잘린이라니, 가지가지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