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4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44)화(144/171)
심문은 수월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 만에 다시 사용하는 특기인 터라 조금 헤매었지만 세벨리아는 곧 감을 되찾았다.
마지막으로 살펴봤던 기억으로부터 조금 더 뒤로. 세벨리아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발아래 펼쳐진 푸른 빛무리가 점점 짙어질수록 환영의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벨라,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아직 괜찮아요.”
쓸모없는 기억을 빠르게 넘기던 와중이었다. 세벨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며 네이튼의 어깨를 짚고 있던 손을 내렸다.
“이건…….”
새로 등장한 자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과거의 네이튼과 마주하고 있었다. 세벨리아가 자세히 보기 위해 다가가려는데 때마침 상대가 모자를 슬쩍 위로 올렸다.
챙 아래 드러난 얼굴에 디하트가 낮게 읊조렸다.
“로덴 알드라이트.”
세벨리아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벽에 붙어 상황을 지켜보던 약제사 또한 움칠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로덴이라면, 그.”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맞을 겁니다.”
디하트의 옛 주치의이자 불법 자백제를 만들어 웨든가에 공급한 장본인. 사일러스가 모든 잘못을 네이튼의 책임으로 돌린 탓에 현재는 인버네스 저택에 억류 중인 주요 관계자 중 한 명.
그를 바라보는 세벨리아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녀는 숨을 들이쉬더니 다시 네이튼의 뒤편, 보고서들을 올려놓은 협탁으로 향했다.
디하트가 챙겨 온 서류 중에는 로덴의 심문 기록 또한 있었다. 치안국에는 아직 넘기지 않은 내용들로 오늘 심문에 도움이 될까 하여 가져온 것들이었다.
세벨리아는 개중 로덴이 수도에 내려온 날들을 기록한 서류를 찾아냈다. 삼사 개월의 주기를 두고 주기적으로 만난 것 같았다.
‘좋아. 그러면.’
세벨리아가 다시 네이튼의 기억을 살피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아찔한 느낌과 동시에 무릎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어…….”
반듯하게 서 있던 벽이 갸우뚱 기울어졌다. 그 와중에 태양이 번쩍이는 게 보여 세벨리아는 순간적으로 의아했다.
정신을 차리니 그건 태양이 아니라 디하트의 눈동자였다.
“아.”
세벨리아가 그를 올려다보는 동안, 디하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고 체온을 쟀다. 뜨거운 손이 자신의 이마와 뺨을 훑는 동안 세벨리아는 그저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았다.
“오늘 여기서 끝내자는 말은 듣지 않겠죠.”
묵묵히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에는 걱정과 옅은 웃음이 실려 있었다. 다행히도 제 상태가 그리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세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을 깜빡이자 그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끌어다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기다란 소파는 저번에는 없었던 물건으로, 디하트가 치안국에 따로 말해 미리 준비해 놓은 가구였다.
“그럼 잠시 쉬었다 진행하죠. 오늘은 시간도 넉넉하니까요.”
잠시 뒤 세벨리아가 기력을 되찾았다. 그녀는 소매 안이 답답한 듯 뛰쳐나오려는 에티라를 잘 구슬려 재워 놓고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이제 괜찮아요.”
네이튼의 앞에 선 세벨리아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남은 힘이 얼마 되지 않은 터라 정확성을 높이려는 의도였다.
곧 은하수처럼 아름다운 광휘가 두 사람을 감쌌다. 푸른 물감을 탄 것처럼 시원스러운 색의 빛무리가 방 안을 휩쓸고 작은 창문을 통해 탑 밖의 어둠을 밝히는 순간이었다.
투둑. 성스러운 광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벨리아는 반사적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네이튼이었다.
“……!”
자신을 노려보는 푸른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의 어깨에 얹은 손이 그대로 굳은 것마냥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게 아니야.’
세벨리아는 어느샌가 제 손을 붙들고 있는 네이튼의 손을 발견했다. 방금 전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는 네이튼의 구속구가 끊기는 소리였던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당황에 벌어진 잇새로 차가운 공기가 파고들었다. 네이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를 향해 남은 손을 치켜올렸다.
이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세벨리아는 이를 꽉 깨물며 남은 힘을 끌어모았다. 환영술로 그를 속박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벨라!”
눈앞이 새카맣게 물든다 싶더니 바로 다음 순간 굉음이 방 안을 울렸다. 누군가 얻어맞는 듯한 둔탁한 소음과 억눌린 신음.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누군가의 품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괜찮으십니까?”
케힐이었다. 고개를 돌려 디하트를 바라보니 그는 네이튼을 제압하고 있었다.
“이 개자식이 감히 누굴 상대로……!”
네이튼은 어떻게 된 일인지 디하트를 상대로 호각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네이튼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세벨리아, 세벨리아!”
끊임없이 거친 숨을 토하며 제 이름을 불러 젖히는 게 소름 끼쳤다.
“저게, 지금.”
“일단 몸을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케힐이 차분하게 세벨리아를 문 쪽으로 대피시켰다. 디하트는 두 사람을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죽여, 죽여 버릴 거야!”
네이튼의 목표는 오로지 단 한 명, 세벨리아로 보였다. 그는 디하트에 의해 벽에 처박히고, 코가 깨지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노려보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당장 그녀를 데리고 떠나!”
금빛 눈동자가 깊은 산중에 맞닥뜨린 짐승처럼 흉흉하고 사나웠다. 세벨리아는 케힐의 부축을 받으며 문가로 다가갔다. 그가 문을 열 동안 세벨리아는 설렁줄을 당길 생각이었다.
“어…….”
“무슨 일 있으십니까?”
설렁줄이 중간에 끊겨 있었다. 세벨리아는 당황한 얼굴로 케힐에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 물으려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는 어느새 제게 바짝 다가와 있었다. 손바닥 하나만큼의 거리를 두고 조용히 미소 짓는 그에게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벨라 양?”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가 소름 끼쳤다. 녹색이었던 눈은 어느새 푸른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케힐이 웃음을 터트렸다.
“너는 언제나 감이 좋았지.”
‘이 목소리는……!’
“쉿, 조용히 하자꾸나. 나도 일이 이렇게 되어 당혹스럽거든.”
몇 초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세벨리아에게는 천 년 같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케힐의 오른손에 들린 주사기와 그의 목 부분에서 덜렁거리는 가짜 살가죽을 보았다.
그녀가 디하트를 부르기도 전에, 번쩍거리는 주사기의 끄트머리가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꽂혔다.
“벨라!”
어둠을 찢는 태양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내리꽂혔다. 세상이 한 바퀴 구르고 나서, 세벨리아는 겨우 눈을 떴다.
“디, 디하트.”
“빌어먹을.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둘 다 죽여 버렸어야 하는 건데.”
디하트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를 끌어안으며 내뱉었다.
“당신이 잘못되었으면 나는.”
애끓는 신음이 눈물 대신 흘러내렸다. 그가 세벨리아를 구할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네이튼을 밀어붙이던 와중, 창문을 통해 세벨리아에게 주사기를 꽂으려는 케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눈이 뒤집힐 만한 광경이었다. 그는 되는대로 벼락을 불러내 네이튼의 몸에 내던진 뒤 바로 뒤를 돌아 케힐을 벽으로 꽂아 넣었다.
“디하트, 저길 좀 봐요.”
겨우 진정한 세벨리아가 움푹 들어간 벽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끝이 가리킨 곳에는 본모습을 드러낸 케힐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버지였어요.”
가짜 살가죽이 전부 벗겨진 그의 정체는 사일러스 웨든이었다. 세벨리아가 경멸과 분노에 파르르 몸을 떨며 말을 잇지 못하는데, 디하트가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이곳은 내가 정리할 테니 당신은 저택으로 돌아가요.”
“네? 잠깐만요.”
디하트는 그대로 문을 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잠근 것이다. 곧 이를 간 디하트가 벼락을 불러내 문을 통째로 뜯어내려던 순간이었다.
섬찟한 감각이 목덜미를 스쳤다. 주저앉은 채 고개를 돌린 그녀는 경악했다.
어느샌가 정신을 차린 네이튼이 주사기를 손에 쥔 채 디하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일반인의 범주를 뛰어넘어 세벨리아로서는 도저히 그의 앞을 막을 수 없었다.
안 돼, 안 된다고!
소리 지를 시간조차 없었다. 세벨리아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없던 힘까지 쥐어 짜내 푸른 방벽을 세우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작용이 몸을 휩쓸었다. 폐가 쥐어짜이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허억……!”
신음을 듣고 고개를 돌린 디하트는 곧 네이튼을 발견했다. 금빛 눈동자에 불똥이 튀고, 두 남자는 뒤엉켜 싸우기 시작했다.
“큭……!”
이미 한차례 힘을 소진한 디하트는 점차 네이튼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네이튼은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였다.
터질 듯 부풀어 오른 근육과 붉게 물든 안광, 검게 변색된 피부와 근육 위로 딱딱하게 선 핏줄들. 한눈에 봐도 무언가 끔찍한 실험을 당한 것 같은 모양새.
“죽어, 죽어, 죽어!”
한 단어밖에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죽으라는 말만 울부짖는 네이튼에게는 이제 벼락마저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으으아아아!”
세벨리아의 시야에 벼락을 맞은 네이튼이 멀쩡한 모습으로 디하트를 벽에 메다꽂는 모습이 보였다. 쿵, 쿵! 굉음이 이어지고 벽이 무너졌다.
퍼엉-! 펑!
바깥에서는 형형색색의 폭죽들이 터져 나가며 검은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그제야 폭죽이 탑의 소음을 집어삼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아름다운 하늘 아래, 누군가는 화려한 궁 안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디하트!”
그 순간, 푸른색의 무언가가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세벨리아는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네이튼을 향해 화살같이 날아가는 건, 에티라였다.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작은 몸집의 새는 빠르게 비행했다. 이윽고 에티라가 두 날개를 펼침과 동시에 강한 빛이 폭사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