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46)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46)화(146/171)
“로잘린이…… 윽. 로잘린이 위험해요.”
“뭐라고?”
쓰러지려는 그녀를 붙든 클로드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물었다. 세벨리아가 그의 손을 붙잡으며 꺼져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렌 부인이, 또다시 로잘린을 노리고 있어요……!”
펑-!
폭발음에 세벨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난 뒤 든 생각은 불꽃놀이가 다시 시작되었나,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든 그녀가 본 건 그런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눈요기 따위가 아니었다.
“세상에.”
하얀 벼락들이 하늘 저편을 수놓고 있었다.
* * *
엉망진창이네. 로잘린은 자신을 뒤쫓는 이들로부터 도망치며 이를 악물었다.
“당장 찾아!”
멀리서 악에 받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녀가 정체 모를 기사들을 이끌고 회합 장소를 덮친 주동자일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로잘린은 불 꺼진 복도를 달리며 빠르게 과거를 되짚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바닥에 짙은 얼룩이 생겼다. 칼에 베인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핏물 때문이었다.
작열감이 느껴지는 옆구리를 손으로 누르며 로잘린은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피가 나는 곳은 그곳뿐만이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등이나 허벅지를 손으로 누르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하아…….”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지난밤, 이황비는 그릇된 행동에 대한 벌로 연회에 참석하는 대신 북부 귀족들과의 회합 자리에서 그들을 완벽히 끌어들이라 명했다. 환영회에서 이황자와 한 번 더 접촉할 생각이었던 로잘린은 낭패감에 젖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영애가 여기 있…… 아악!”
제 앞을 가로막는 이에게 벼락을 내리꽂은 로잘린은 어둠에 휩싸인 층계참 앞에서 숨을 골랐다.
“쿨럭.”
스윽 소매로 흘러내린 피를 닦았다. 습격을 피하느라 무리하게 권능을 남용해 속이 완전히 뒤집힌 상태였다.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네.’
그건 자신과 함께 있던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비명은 이미 오래전에 끊겼으니까. 불쌍한 자들. 로잘린은 옆구리를 내리누르며 신음을 삼켰다.
‘배후는 누구일까.’
샤테이안 이황자는 아닐 터이다. 그에겐 자신이 단순히 하레스의 뜻에 따르는 인형이 아님을 보여 주며 그와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여지를 내보였으니.
‘그렇다면 일황비?’
로잘린은 신중한 몸짓으로 계단을 내려가려 애썼다. 때때로 저택 바깥을 살피는 이들의 횃불이 창밖을 스쳐 지나가곤 했다. 그럴 때면 로잘린은 회합 장소를 일부러 큰 저택으로 고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커헉.”
다시 한번 핏덩이가 튀어나왔다. 그녀는 쓰게 웃으며 복도를 걸었다. 사실 도망칠 수 없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회합을 덮친 기사들은 숙련된 이들이었으며, 그 수 또한 압도적이었다. 아마도 오늘 회합에 참석한 귀족들은 누구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나 또한 마찬가지겠지.
‘저기 있다.’
로잘린은 어깨를 펴고 천천히 심호흡했다. 어둠 속으로 느리게 걸음을 내디디는 그녀의 눈에 한 여인이 보였다.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어서 찾아내라. 너희들까지 모두 저택에 가둬 불을 붙이기 전에 그년의 목을 가져오란 말이다!”
뭐가 그리 두려운지. 대여섯 명이나 되는 기사를 끼고 악을 내지르는 여인은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녹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적어도 내 목숨을 노리는 이의 목숨은 함께 가져가야지.
츠츳.
어둠에 젖은 복도에 섬뜩한 불빛들이 어른거렸다. 타닥. 허공에서 불꽃처럼 튀어나온 그것들은 순식간에 공간을 가득 채워 사방을 환히 비췄다.
“너……!”
녹색 눈동자 가득히 이유 모를 적의를 아로새긴 여인은 그제야 로잘린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로잘린은 희게 웃었다. 그녀의 입가로 검은 피가 주륵 흘러내렸다.
“저것을 당장 죽여!”
그녀의 손이 로잘린을 가리켰다. 기사들이 검을 치켜들고 복도를 달렸다. 창밖은 아직도 달빛 한 점 없는데 저택의 좁은 복도만이 대낮처럼 환했다.
‘이런 끝이 올 줄은 몰랐는데.’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칼끝을 보며 로잘린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힘을 끌어올릴수록 점점 느려지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다 같이 산산조각 날 테니. 로잘린이 푸스스 웃으며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새하얗게 물든 눈동자가 복도의 광경을 눈에 담은 순간.
쨍강, 쨍강, 쨍강!
복도의 모든 유리창이 터져 나가며 거센 바람이 모든 이를 휩쓸었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있기도 힘들 정도로 강력한 힘에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벽에 몸을 붙였다.
그리고 묵직한 음성이 바람을 가르고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황자 전하의 약혼녀를 보호하고 폭도들을 제압하라! 감히 황실의 뜻에 반하여 저항하는 자는 사살해도 좋다!”
바닥에 두 손을 댄 채 바람에 흔들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던 로잘린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바닥을 적시는 핏물과 점점 차가워지는 제 손발 따위는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졌다.
창턱을 짚고 겨우 내다본 바깥에는 익숙하되 낯설게만 느껴지는 문장을 가슴에 단 이들이 있었다.
‘인버네스 기사단?’
황실 기사단이 아니야? 찰나의 순간 궁금증이 들었으나 곧 그럴 여유 따위 없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기회가 생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공멸이 아닌 탈출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채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목이 붙들려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어딜 가려고!”
“커흑…….”
로잘린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녀는 제 목을 조르는 그렌의 손을 떨쳐 내기 위해 발버둥 쳤으나 소용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년. 왜 갑자기 나타나서 날 곤란하게 만들어. 그때 죽어 버리지 않고 왜 사람을 괴롭히냐는 말이야!”
“ㅁ…뭐…….”
자신이 흘린 피 웅덩이 속에서 정신을 잃으면서도 로잘린은 그녀의 말이 귀에 박혀 눈을 부릅떴다.
“하하, 아니야. 차라리 잘됐구나. 오늘 이 자리에서 그날 뿌리 뽑지 못한 일을 죄다 해치우면 되겠어. 그래, 어차피 사람들은 살아남은 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으니.”
그렌이 입술을 쭉 찢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로잘린의 귀에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디하트도, 네년도 오늘로써 끝이야.”
로잘린이 분노와 공포에 이를 악무는 순간이었다. 저벅저벅. 단정한 발걸음 소리가 비명과 소음을 뚫고 다가왔다.
침묵을 이끌고 다가온 사내의 고동색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하얀 불꽃들이 사라지고 다시 어둠으로 채워진 복도 안, 타오르는 금빛 눈동자에 다시 없을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 그렌은 그대로 입을 떡 벌렸다. 커다랗게 확장된 동공에 상대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쳤다.
“말도 안 돼…….”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야, 그렌.”
“클로드……!”
사내는 사납게 웃었다. 그도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로잘린은 처음 알았다.
“꺄악!”
다음 순간 거대한 힘이 사방으로 폭발했다. 그렌은 로잘린의 옆을 나뒹굴며 입술을 떨었다.
분노를 닮은 힘은 벼락처럼 날카롭지는 않았으나 화산처럼 격정적이었다.
그렌은 뒤늦게 클로드가 어떤 사내였는지 깨달았다. 그래, 그는 인버네스 가문이 사랑해 마지않는 불세출의 천재였다. 길런드가 없었다면 차기 가주가 되었을지도 모를 인물.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나, 나는. 투항하겠어, 항복하겠다고!”
클로드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그렌은 엎드렸던 상체를 일으켜 그대로 뒤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물러섰다.
“항복하겠다고?”
“그래, 그러니까……!”
그렌은 고개를 흘깃 돌려 쓰러진 자신의 기사들을 보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외쳤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줘. 어차피 나 혼자서 당신한테 대항할 수 있을 리 없잖아. 다 당신 뜻대로 따를 테니까, 목숨만은…….”
클로드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가 몸을 굽혀 피 웅덩이 위에 홀로 남겨진 로잘린을 안아 들었다.
“치료부터 하자꾸나.”
“…….”
“졸려도 자면 안 돼, 알았지?”
로잘린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몽롱한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클로드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는데 그의 옷깃에서 붉은 종이 같은 게 떨어져 내리는 게 보였다.
저게 뭐지 싶으면서도 물어볼 기운조차 없어 로잘린은 눈을 감았다. 클로드는 그녀를 고쳐 안고 걸음을 내딛으려 했다.
푹.
날카로운 무언가가 살을 뚫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로잘린은 놀라 황급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서 생겨난 붉은 창날에 복부를 꿰뚫린 그렌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커…헉…….”
“내가 언제까지고 당신의 말을 믿을 것 같았나.”
클로드가 천천히 몸을 돌리며 눈을 내리떴다. 태양 같은 눈동자에는 끝 모를 분노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렌. 제발 부탁하지.”
“너…. 네가……. 쿨럭!”
“더 이상 우리 가족을 괴롭히지 말고 죽어 줘.”
콰앙!
저택의 모든 유리창이 터져 나갈 만큼 강력한 힘이었다. 밖에서 그렌이 이끌고 온 림스 후작의 기사들을 제압한 디하트는 뒤늦게 현장에 도착해 혀를 찼다.
기만당한 세월만큼 쌓여 있던 분노를 한 몸에 받은 그렌의 시체는 새카맣게 타 버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이제 돌아가자.”
멍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로잘린을 향해 클로드가 상냥히 말했다. 그들은 인버네스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저택 밖으로 빠져나온 참이었다.
“아.”
그제야 제가 처한 상황을 다시 깨달은 듯, 로잘린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턱을 덜덜 떠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아, 안 돼요…. 저는, 돌아가야…….”
“이황비와 하레스 삼황자가 발레리 영지의 백성들을 인질로 잡아 두고 있는 걸 걱정하는 거라면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돼요.”
언제나처럼 청량한 목소리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저택 앞에서도 빛이 났다. 어느샌가 나타난 세벨리아가 부드러운 얼굴로 웃었다.
“당신과 자매처럼 자란 하녀도, 친구들도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