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5)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5)화(15/171)
“성심껏 보필하겠습니다.”
세벨리아를 따라온 하인들은 아버지가 손수 고른 이들로 대체로 충직하고 성실한 이들이었다.
데니사는 그들을 마음에 들어 했고, 세벨리아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괜찮은 사람들이에요. 대부분이 르블로이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들이라 실력도 좋고.”
“그래?”
“네, 오늘 아침만 해도 아가씨의 머리를 저는 꿈도 못 꿀 스타일로 꾸며 드렸잖아요.”
“……그건 그렇네.”
그들이 제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끔 처신을 잘하기도 했고.
그러나 그 공손하고 친절한 이들이 제 뒤에서 교활한 짓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 * *
날씨가 화창하고 바람은 달콤한 날이었다. 그날 세벨리아는 디하트와 조찬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와 쉬고 있었다. 일주일 만에 얼굴을 본 남편은 여전히 무뚝뚝했으나 저를 보는 눈빛에 반가움이 실려 있었다.
‘달라지고 있는 거겠지.’
기분 좋은 날씨와 더불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변화에 세벨리아는 들떴다. 그때, 금발 머리 하녀 한 명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제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마님.”
세벨리아는 놀라지 않았다. 요 몇 달간 지속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또 편지를 보내셨구나.”
“예, 중앙에서 온 보석상도 함께 도착했습니다. 저번의 그 사내더군요. 내려가서 만나 보시겠어요?”
“…아니, 잠시만. 편지부터 이리 줘.”
편지를 건네받은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벨리아는 그걸 알아차리곤 손에 힘을 주었다.
“아버지도 참, 어련히 잘 지내고 있을 텐데 너무 걱정이 많으시다니까. 그렇지 않니?”
“그만큼 아끼시는 거죠.”
그녀가 부드러이 웃으며 말하자 하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웨든 저택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북부로 오게 된 하녀는 유달리 제게 호의적이었다.
그 호의의 근거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세벨리아는 쓰게 웃었다.
‘내가 받는 사랑이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하녀는 그녀의 웃음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유순한 눈으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마님께서 워낙 먼 곳으로 오셨으니까요. 저라도 제 아이가 그리 먼 곳으로 간다면 매일같이 편지를 보냈을 거예요.”
“…그래, 그렇지. 그러니 직접 사람들까지 보내시며 날 챙기시는 거겠지.”
웨든 후작은 틈이 날 때마다 제 편의를 도모한다며 보석상이며 원단장인들을 북부에 보내 왔다.
‘그때마다 너무 과한 건 돌려보냈지만…….’
어찌 되었건 자신은 북부와 중앙의 협력을 위한 정략결혼의 당사자였다. 북부만을 위하는 모습을 보이면 정치적으로 위협을 받을 게 분명해, 세벨리아는 나름대로 조심하며 선을 지키고 있었다.
“이번에도 꽤나 두껍구나. 또 하인들의 가족들 소식까지 함께 보내신 걸까.”
그녀의 손에 들린 편지 봉투는 꽤나 두툼했다. 세벨리아는 봉투에 찍힌 인장을 바라보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그녀가 시집간 이후 때때로 이렇게 하인들의 가족들이 보내는 편지를 함께 동봉해 보내고는 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신처럼 행동하기를 원했다.
웨든 후작가의 평판을 높일 수 있는 손쉬운 수단이며 동시에 하인들의 충성심을 사는 수단 중 하나였으니까.
“매번 저희를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금발 머리 하녀가 다소곳하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고 보니 그녀 또한 제게 몇 번 연인에게 대신 편지를 써 달라며 제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했다.
“그래.”
세벨리아는 쓴웃음을 감추며 편지 봉투를 매만졌다. 저렇게까지 고마워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번에도 그들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하인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는 기분도 나쁘지 않았고.
‘내 걱정이나 해야지.’
세벨리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편지를 협탁 위에 놓았다.
‘이번에는 또 무슨 말을 적어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딸이 되도록 할까.’
한숨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삼키며 세벨리아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문득 제 처지가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평생토록 사랑받길 원했지만 단 한순간도 돌아봐 준 적 없으면서. 이런 순간이 되어서야 나를 필요로 하시다니.
“하….”
못된 반항심이 발작처럼 솟아올랐다. 이대로 모든 걸 무시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세벨리아는 자신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자신은 필요에 의해 연락하는 아버지의 관심에조차 기뻐하고 말았으니까.
그가 보낸 편지를, 하인들의 소식 가득한 그 내용을 편지함에 넣어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이렇게 진짜 아버지와 딸의 관계가 될 수도 있어.’
왜, 가족이란 원래 떨어져 있을수록 그 소중함을 알게 된다고 하잖아.
평생토록 가족에게 애정 한 줌 받아 보지 못한 세벨리아는 그렇게나마 한 가닥 희망을 품었다.
가족에 대한 미련이란, 애정에 대한 집착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성만으로는 도저히 끊어 낼 수 없는 질기고 지긋지긋한 고리 같은 것.
“후…….”
“마님?”
“아, 아냐. 햇살이 너무 뜨거워서 머리가 좀 아프네.”
세벨리아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하녀가 창문 위로 얇은 커튼을 내렸다.
“편지는 혼자 있을 때 읽어야겠어. 그리고 보석상을 기다리게 할 수는 없지.”
이곳까지 아버지가 손수 보내셨다면 분명 중앙에서도 한가락 하는 자일 게 분명했다.
그런 자를 푸대접했다간 아마 온갖 소문이 다 돌아다니겠지.
세벨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북부의 평판은 좋지 않아.’
특히나 자신의 남편대에 이르러 북부는 선대에 내세웠던 평화주의를 버려 더욱 지탄을 받았다.
‘내가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 해.’
결정을 내린 세벨리아는 하녀에게 말했다.
“남편에게 말해서 오늘 티타임은 같이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전해 줘.”
온실에서의 티타임은 처음이라 조금 기대했는데, 어쩔 수 없지. 세벨리아는 아쉬움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아, 후작님께서 따로 보내오신 선물은 어떻게 할까요?”
“그건… 내가 직접 챙기지. 아버지가 손수 보내 주신 걸 다른 사람 손에 맡길 수는 없잖아.”
세벨리아는 응석쟁이 딸인 척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하며 축객령을 내렸다. 그에 하녀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공손하게 물러났다. 세벨리아는 한참이나 편지를 내려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응접실로 내려갔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공작부인.”
보석상의 인사를 받아넘긴 세벨리아의 눈이 어느 한곳에 머물렀다.
그건 푸른 보석으로 장식한 은색의 십자가였다.
* * *
디하트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세벨리아는 십자가 목걸이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 어울릴 것 같아 충동적으로 구매한 목걸이였다.
‘섣불렀나.’
세벨리아는 손에 턱을 괴고 심란한 눈빛으로 십자가의 푸른 보석들을 응시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보석은 파도치는 물결처럼 영롱했다. 보석 상인은 별 볼 일 없는 물건이라 했지만 세벨리아는 그게 꼭 마음에 들었다.
‘어울릴 것 같아.’
세벨리아는 용기를 내어 보기로 했다. 디하트와 결혼한 지 이제 막 반년이 되어 가던 참이다. 이제는 그도 자신을 보면 스스럼없이 미소를 지어 주기 시작했으니….
이번 선물을 통해 한 단계 더 관계를 진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 설마 갖다 버리기야 하겠어.”
세벨리아는 네이튼을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어릴 적, 오라버니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자신은 돈을 모아 생일 선물을 하나 샀었다. 물론 그 선물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쓰레기통 안으로 직행했지만.
‘그래도 디하트와 내 관계가 그 정도는 아니니까.’
부부로서는 삭막하지만, 정략결혼으로서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결정을 내린 세벨리아는 상자 안에 목걸이를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봄꽃이 만개한 정원에서 디하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이런 건 예상 못 했는데.’
세벨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디하트를 차분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평소보다 훨씬 멋 부린 차림새였다. 평소에는 부담스러워 싫다더니 어쩐 일로 머리를 깔끔하게 빗어 넘겼다.
심지어 신문을 넘기는 손에는 장갑까지 껴 있었다. 셔츠 위로 재킷을 겹쳐 입었고, 그 덕에 헐렁한 셔츠 위로는 보이지 않던 그의 단단한 몸이 남성미를 뽐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목걸이 상자를 꼭 쥔 그녀의 손이 어색함에 꼼지락거렸다.
디하트는 몸을 감싸는 답답함이 싫다며 저택 안에서는 편한 차림새를 하고 다니고는 했다. 그 모습이 꼭 어릴 적 만난 소년과 겹쳐 보여 스스럼없이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고. 그런데 갑자기 아득한 거리감이 그녀를 훅 덮쳐 왔다. 생경함 속에서 세벨리아는 그녀가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맞아. 그는 인버네스 공작이지. 중앙에서 온 사생아 따위는 성에도 차지 않을 남자야.’
그는 어쩔 수 없이 날 봐주고 있을 뿐이지. 나 혼자 들떠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세벨리아는 한순간 심장이 떨어져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착각은 달콤한 병이라 했지.’
그녀는 옛 성현의 말을 떠올리며 상자를 조심스레 소매 안쪽으로 숨겼다.
아, 착각이란 참 무서운 병이었다.
눈 위에 한 꺼풀 씌워진 색유리 한 장으로 모든 게 아름답게 보이니.
그 순간이었다.
“오늘은 한 마디도 안 하는군요.”
서릿발 같은 음성이 그녀에게 꽂혀 들었다. 시선을 들자 번뜩이는 금안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재잘거리기라도 해요. 다른 이들의 입에 우리의 불화설이 돌아다니는 게 보고 싶지 않으면.”
툭 내뱉듯 말한 디하트의 손이 매서운 새처럼 그녀를 한 차례 훑었다. 마치 무언가를 찾고 있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세벨리아는 혹시나 제 선물을 들킬까 싶어 손을 오므렸다. 그러나 곧 그의 야수 같은 직감이 그녀의 수상쩍은 행동을 지적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뭘 샀다고 들었는데.”
“…….”
“보석을 착용하려고 사는 게 아니라면 왜 산 건지 모르겠군요.”
디하트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렸다.
“말해 봐요, 부인. 당신이 허튼 데 돈을 쓰는지 확인하는 게 내 의무 중 하나니까.”
빛을 응축시켜 놓은 듯한 그의 금빛 눈동자가 세벨리아를 꿰뚫었다.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던 그녀는 작은 한숨과 함께 숨겨 두었던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목걸이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상자였다. 그 찰나, 디하트의 눈 위로 작은 만족감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 일순간이라 세벨리아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뭡니까?”
“……별거 아니에요, 그냥. 당신 생일이 다가왔잖아요.”
손사래를 치더니 다시 상자를 가져가려는 세벨리아의 손을 디하트가 잡아챘다.
“흠.”
그는 뚜껑을 열어 상자 속을 슥 훑어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넣었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봐 줄 만은 하군요. 나중에 성직자가 되고 싶은 날이 오면 한 번쯤은 사용해 보죠.”
싫다는 걸까, 좋다는 걸까.
세벨리아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목에 한 번 걸어 보지도 않는 걸 보니 아마 싫다는 것 같았다.
‘앞으로 이런 일은 하지 말아야지.’
그녀가 후회하는 것도 모르고, 디하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시다. 벌써 바람이 쌀쌀해졌잖아요. 왜 매번 얼굴이 파랗게 질릴 때까지 앉아 있는 겁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가 쌀쌀맞았다. 세벨리아는 시무룩한 발걸음으로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디하트는 집무실에 틀어박혀 목걸이와 눈싸움을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