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5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51)화(151/171)
처음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던 때처럼 일이 마무리된 뒤 아무 고민 없이 떠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안절부절못할 이유도 없을 텐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서, 그가 제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겨 버려서 문제였다.
“정말로 아무 문제 없는 게 맞아요? 지금이라도 의원을 데려올까요?”
손을 붙들린 채로 디하트가 물었다. 세벨리아는 숨을 삼키고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말이 힘들다면 제발 고개라도 끄덕여 줘요.”
그의 다정한 음색이 귓가에 내려앉을수록, 걱정으로 부드러워진 눈빛이 뺨과 이마에 오래 머무를수록 입술은 딱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벨라.”
디하트의 탄식 앞에서 세벨리아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속으로 안절부절못했다.
‘어쩌지.’
아버지에 대한 문제를 혼자 안고 갈 생각은 아니었다. 사랑 한 번 받지 못한 자식으로서 그가 홀로 짊어져야 할 죄악감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고 갈 생각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니 마음이 이상했다. 정말로 괜찮은 거냐고 다그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평생 모른 척 외면하고 싶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야.’
세벨리아는 신중히 생각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마무리 지어야 했다. 가능하면 최대한 서로에게 상처가 남지 않게 마무리되는 게 좋겠지만.
긴 시간이 지나 세벨리아가 겨우 생각을 정리했을 때였다. 똑똑. 단정한 노크 소리와 함께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타이밍 좋게 인버네스 저택을 방문한 사람은 다름 아닌 로스엘 애쉬렌트였다.
* * *
“이렇게 가까이서 얼굴을 보게 될 날이 오다니.”
처연한 목소리는 점점 흐려지더니 곧 울먹임에 뒤덮였다.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울다니. 세벨리아는 채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그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이걸, 가지고 다녔구나.”
“아.”
발라크가 준 손수건을 본 로스엘의 눈이 다시 한번 눈물로 어룽졌다. 환영회장에서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세벨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울러 온 건 아니겠지…….’
인사는커녕 본론도 꺼내지 않고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 내기 바쁜 로스엘을 보며 세벨리아는 조금 초조해졌다. 마지막으로 본 디하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괜히 이상한 걱정을 심어 주고 온 것 같은데.’
하지만 일단 로스엘을 만난 이상 그와의 시간에 충실해야 했다. 세벨리아가 걱정하는 얼굴로 그에게 괜찮으냐 묻자 로스엘이 작게 웃더니 손수건을 내려놓았다.
“미안하구나. 발라크에게 네 이야기를 들은 뒤로 이렇게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 터라,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어.”
“아…….”
“내 이름은 이미 들어 알고 있겠지. 로스엘 애쉬렌트란다.”
햇살처럼 환하게 웃은 로스엘이 몸을 일으켜 세벨리아의 두 손을 꼭 붙들었다.
“네 사촌오빠지.”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만나서 반가워요, 로스엘. 알다시피 벨라라고 해요.”
그의 친근한 분위기가 어색하면서도 싫지 않아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무뚝뚝하게 답하고는 아차 싶었다. 하지만 로스엘은 개의치 않는 듯싶었다.
세벨리아의 손을 마지막으로 한 번 힘주어 붙든 로스엘이 손을 풀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래서 생각은 해 봤니?”
“네?”
세벨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자 로스엘이 같이 고개를 기울였다.
“편지를 읽은 게 아니었어?”
“아.”
봉투만 뜯고 읽지 못한 편지가 떠올랐다. 그녀가 나지막이 탄성을 내뱉자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는 듯 로스엘이 눈을 내리떴다.
“이런, 내가 성급했구나.”
로스엘은 작게 혀를 차며 사과했다. 그럼에도 세벨리아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자 그가 덧붙여 설명했다.
“봉투를 열면 내게 알림이 오는 표식을 심어 놨단다. 그래서 네가 잠에서 깨어 편지를 읽은 줄 알고 달려왔지.”
“죄송해요, 아직 내용을 읽지는 못했어요.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내용인지 지금 여쭤봐도 될까요?”
“그게 말이다.”
연하늘색 눈동자가 데구르르 구르다 어느 한 지점에 멈췄다. 순식간에 냉기를 띄는 눈동자에 거침없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한 사내가 걸렸다.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겠나, 공작? 오랜만에 갖는 가족끼리의 시간이라서.”
로스엘의 냉랭한 목소리에도 디하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벨리아의 곁을 차지했다. 털썩 주저앉는 그에게서는 살벌한 기운이 풀풀 풍겼다.
“디하트, 무슨 일이에요?”
“먼저 당신 물건에 제멋대로 손을 대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할게요.”
디하트는 로스엘을 무시한 채 먼저 세벨리아에게 상냥한 목소리로 사죄부터 했다. 잠깐 품을 뒤진 그는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낯이 익었다.
그건 책에 끼워 두고 온 로스엘의 편지였다. 세벨리아가 헉하고 작게 숨을 들이쉬었다.
“선물들을 정리하다 하녀가 떨어트린 책에서 이게 나왔더군요. 평소 같으면 제자리에 놔두었을 테지만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져 혹시나 하고 살펴봤습니다.”
디하트가 냉랭한 얼굴로 로스엘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벨라와 만나고자 한 이유가 이거였습니까, 대사? 겨우 평화를 되찾은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지는 못할망정 본 적도 없는 땅으로 데려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하려고?”
“…….”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작이라. 그게 이제 막 자신의 자리를 찾은 그녀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될지는 생각해 본 적 있습니까.”
로스엘은 침묵했고, 세벨리아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설마 했는데.’
디하트가 로스엘을 추궁하는 동안 세벨리아는 그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왔다. 과연 그의 말대로 편지에는 자신을 러크우드로 데려가기 위한 온갖 미사여구와 찬란한 미래를 보장해 주겠다는 다짐이 적혀 있었다.
‘포기하지 않았구나.’
발라크만 그런 줄 알았더니 로스엘도 똑같았다. 세벨리아는 이제 눈앞의 사촌 오빠가 덜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사이 로스엘은 디하트의 강렬한 시선을 받아치며 피식 웃었다.
“듣자 하니 좀 어처구니가 없군. 다시 한번 말하지, 공작. 이건 우리 가족의 일이야. 벨라를 위해 바친 그대의 헌신은 인정하지만 그대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지.”
“그런 말을 듣고자 찾아온 게 아닙니다.”
“누가 보면 내가 억지로 그녀를 데려가는 줄 알겠어. 하, 미안하지만 나는 누구처럼 제 마음에 안 든다고 가족을 구박하고 괴롭히는 인간이 아니어서 말이야.”
로스엘은 세벨리아를 모질게 대했던 그의 과거사를 들췄다. 뼈 있는 말에 디하트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었다.
“나는 그녀의 의견을 존중할 거야. 다만, 지금 당장 함께했으면 더 좋겠다는 의도로 말을 꺼낸 것뿐이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세벨리아의 시선을 잡아채며 로스엘이 말했다.
“벨라. 웨든 후작이 러크우드로 이송된다는 소식은 들었지?”
“……네.”
“그는 러크우드에서 네 어머니와 너를 죽이려 한 행위에 대한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나는 그 자리에 네가 참석해 주었으면 한다.”
세벨리아가 놀라 입을 작게 벌렸다. 로스엘이 어린아이를 꾀듯 달콤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러크우드의 법은 제국보다 훨씬 잔혹하지. 혹자는 우리를 보고 아직도 야만적이라 칭하지만 웨든 후작처럼 악독한 인간을 상대로 할 때는 아주 효과적이란다.”
“아…….”
“물론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란다. 너를 평생 기다리고 계신 고모님을 생각해 보렴.”
무의식적으로 편지를 매만지던 세벨리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초조한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디하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부 끝났잖니. 이제 그만 어머니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부드러운 음성이 귓가를 스치기가 무섭게 갑자기 시야가 확 높아졌다. 세벨리아는 놀라 소리를 질렀고, 로스엘은 덩달아 분노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공작, 이게 무슨 짓인가!”
그러나 범인은 말없이 그의 가장 소중한 보물을 안고 도주했다. 로스엘이 다급히 그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갑자기 나타난 일레이와 기사들에 의해 가로막혔다.
“벨라!”
으르렁대는 로스엘의 눈에 자신은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드는 세벨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강제로 납치당하는 와중에도 미묘한 미소와 함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모습이 전혀 싫어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끙, 앓는 신음과 함께 로스엘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당장 그녀를 데리고 가는 건 무리인 듯싶었다.
* * *
한참을 뛰어 도착한 곳은 저택 뒤편의 후원이었다.
‘어라.’
낯선 풍경에 세벨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고갯짓을 따라 디하트의 목덜미를 간질이는 바람에 그의 심장이 터져 나가는 건 전혀 모른 채, 세벨리아는 천천히 기억 속의 풍경과 눈앞의 광경을 대조했다.
‘뭔가 이상한데.’
이 주일 전만 해도 후원에는 작은 화단과 디하트만 드나드는 온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거라곤 제 키보다 큰 장미 덤불뿐이었다.
너른 녹지와 아름답게 꾸며진 장미들. 그 뒤로 광활히 펼쳐진 푸른 하늘이 무척 아름다우면서도 어떤 기시감을 들게 했다.
그래, 마치 언젠가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아.”
달콤한 향기가 코끝에 닿은 순간, 깨달음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협곡의 천막 안에서 디하트를 붙잡던 때 자신도 모르게 펼쳤던 환영과 눈앞의 풍경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벨라.”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두 발을 땅에 딛고 있었다. 디하트는 아찔한 향기를 내뿜는 장미를 배경으로 자신의 두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그대로 손을 붙잡힌 채 장미 덤불을 굽혀 만든 아치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지독한 향기에 숨이 막히고, 손을 붙든 뜨거운 체온에 정신이 어질해질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