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5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59)화(159/171)
외전 1-7
디하트가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툭툭 건드리며 읊조렸다.
“벽이 생각보다 높더군요.”
타르옌과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 게 스트레스인 듯했다. 하긴 타르옌은 제국에서 유일하게 바다 건너 남대륙과 원만한 교역을 유지하는 곳으로, 웬만한 대귀족에게도 쉽사리 물건을 내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이제 겨우 수도에 자리를 잡은 북부 공작에게 까탈스럽게 굴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이 아주 곤란하게 됐습니다.”
턱을 괸 디하트가 한숨을 흘리며 말하자 도르엔이 눈을 반짝였다.
“괜찮으시다면 저희 가문이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디하트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턱을 괸 채 눈을 내리뜬 그가 도르엔을 응시했다. 그녀의 목덜미가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세벨리아는 식은 찻물을 단번에 비워 냈다.
세벨리아가 하인을 시켜 차를 새로 내오는 동안, 도르엔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던 디하트가 입을 열었다.
“제게만 너무 좋은 제안이군요, 영애. 세리카 백작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런 걱정은 마세요, 공작님! 어머니께서는 무조건 허락하실 거예요. 어머니도 공작님의 추종자 중 한 분이시니까요. 아, 그러고 보니 그곳과 거래를 트는 데에는 조건이 몇 개 있는데요. 그게 참 재밌어요.”
도르엔은 함박웃음과 함께 슬쩍 디하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뭔가를 속삭였다.
“그게 말이죠.”
그녀의 입술이 귓가에 닿으려는 찰나, 디하트가 자리를 벗어났다. 졸지에 허공에 속삭이게 된 도르엔의 눈이 커다래졌다. 불쾌한 것을 털어 내듯 머리카락을 훑던 디하트가 아, 하고 소리를 내더니 문 쪽을 곁눈질했다.
“볼 일이 생겨서.”
언제 왔는지 일레이가 서류를 들고 찾아와 있었다. 그가 이쪽을 향해 서류를 흔들며 눈웃음을 쳤다.
“그, 그렇군요. 일이 바쁘신가 보네요.”
디하트가 일레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도르엔은 그들을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세벨리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고개를 틀어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저녁노을이 하늘을 물들였다.
“영애, 슬슬 돌아가실 시간이 된 것 같아요. 저녁 전까지 가기로 하셨다고 들었는데.”
“네? 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다니.”
도르엔은 사색이 되어 허둥지둥 일어났다. 로잘린이 그녀를 배웅하겠다며 따라 일어섰다. 디하트는 아직도 일레이와 업무로 이야기 중이었다.
“공작님.”
도르엔이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데, 갑자기 디하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벌써 돌아가십니까?”
“아, 네. 저녁이 되기 전까지 가야 해서요.”
“흐음.”
느리게 턱을 문지른 디하트가 일레이를 향해 뜻 모를 시선을 보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마차를 내어드리죠.”
“네에?”
“늦은 시간에 영애 혼자 돌려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일레이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의 곁에 서 있던 일레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도르엔 영애.”
“세상에.”
도르엔은 감격했고, 로잘린은 눈살을 찌푸렸으며 세벨리아는 관망했다.
“배려에 감사드려요, 공작님.”
잠시 뒤, 세벨리아는 집무실 창가에 기대어 도르엔을 에스코트하는 디하트를 지켜보았다. 작별 인사를 나누고 온 로잘린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타르옌 상단과 관련해서 주고받을 말이 남은 모양이에요.”
“그렇군요.”
“있잖아요, 벨라.”
로잘린은 자신과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언제든 응했겠지만 이상하게 아까부터 머리가 아팠다. 분명 디하트가 피운 그 이상한 향초 탓일 것이다.
“미안해요. 몸이 좋지 않네요.”
세벨리아는 자꾸만 자신을 붙잡으려는 로잘린을 부드럽게 떠밀며 말했다.
“찬바람을 너무 많이 맞았나 봐요. 이만 들어가 봐야겠어요. 로잘린도 바람 너무 많이 쐬지 말아요.”
“……알겠어요.”
할 말 많은 눈빛을 받으면서도 세벨리아는 개의치 않고 집무실을 나왔다. 저녁노을이 물감처럼 벽을 물들이는 걸 보며 그녀는 천천히 걸었다.
한 세월이 걸려 겨우 복도 끝에 다다를 때까지 디하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을 기점으로 디하트의 귀가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요새 무슨 일 있어요?”
나지막이 들려온 목소리에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새벽 공기를 헤치고 돌아온 그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어렸다 사라졌다.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않은 겁니까?”
“먼저 물은 건 나예요, 디하트.”
외투를 벗다 말고 디하트가 슬쩍 그녀의 눈치를 봤다. 오늘은 쉽게 넘어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가 곤란한 얼굴을 하자 따라 들어오려던 일레이가 은근슬쩍 뒤돌아 사라졌다.
층계 위에 서 있던 세벨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타닥. 난간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한 홀에 울려 퍼졌다. 긴장된 침묵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건 디하트였다.
“중앙과의 연계 사업에 차질이 생겨서 어쩔 수 없었어요.”
“…….”
“위험한 일에 휘말린 건 아닙니다. 당신이 신경 쓰게 될까 봐 빨리 처리하려고 일을 몰아서 진행한 건데 오해를 사게 될 줄은 몰랐어요.”
타닥, 탁. 난간을 두드리던 소리가 멎었다. 그러자 디하트는 성큼 계단을 올라 세벨리아에게 허리를 숙였다.
“정말이에요.”
내 결백함을 보아 달라는 듯, 디하트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속삭였다. 잘게 떨리는 속눈썹이 참으로 가엾고 덧없어 세벨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 약았다니깐.
“벨라…….”
어여삐 봐 달라는 듯 고개를 들이밀며 어리광 부리는 행태에 세벨리아는 한숨을 쉬면서도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이번만이에요.”
“응. 알겠어요. 앞으로 걱정시킬 일은 안 할게.”
활짝 피어난 꽃처럼 웃은 사내가 그녀의 이마에 입 맞췄다.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지는 감촉에 세벨리아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떴다.
가슴 속을 파고드는 감각은 언제가 돼도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디하트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늦을 것 같은 날은 꼭 먼저 연락을 취해 세벨리아가 늦게까지 밤새며 기다리지 않게 했고, 돌아온 뒤에는 그날 있었던 일을 넌지시 이야기해 주었다.
“로잘린이 머물 곳이 결정됐어요.”
“벌써요?”
“네.”
그렇게 말하며 콧잔등을 꾹꾹 누르는 디하트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힐렌드 홀은 아직 보수 공사 중이라 머물 수 없어 괜찮은 장소를 물색하느라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이다.
그의 고충을 이해한 세벨리아가 찻잔을 밀어주었다. 피로 회복 효과가 있는 차였다.
“고마워요.”
찻잔을 비운 디하트는 세벨리아의 어깨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다.
“일이 겹쳐서 그런지 정신이 없네요.”
“좀 쉬엄쉬엄해요.”
“그게 그럴 수가…….”
힘들다고 토로하던 디하트는 돌연 입을 꾹 다물더니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그럴 수가 없어요.”
“왜요?”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아랫사람들이 기뻐하는 걸 보고 싶다는 말 같았다.
‘안 그럴 것 같으면서 참 신경을 많이 쓴단 말이지.’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작게 웃었다. 종소리처럼 경쾌하고 아름다운 웃음소리에 어느새 디하트의 입가에 호선이 그려졌다.
그렇게 조용히 세벨리아의 웃음을 귓가에 머금고 있던 디하트는 갑자기 그녀의 손을 붙잡아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손등을 톡톡 건드리다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고 잡아 흔드는 행위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그만해요, 어린애도 아니고.”
“어른들은 손장난 못 치는 법이라도 있답니까?”
갑자기 어깨가 묵직해졌다. 디하트가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린 탓이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세벨리아의 뺨이 달아올랐다. 디하트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속삭였다.
“로잘린이 어디로 가게 될지 안 물어봅니까?”
“네, 네?”
“둘이 친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조금 퉁명스러웠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질투 섞인 목소리에 세벨리아는 방금 전의 긴장감을 잊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디하트가 뚱한 눈빛을 해 보였다.
“저리 가요.”
어깨를 밀자 디하트는 순순히 뒤로 밀려났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요?”
그대로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가 뒤로 넘어간 고개를 바로 하며 답했다.
“바이렌 숙부가 가지고 있는 별장에서 살게 될 것 같습니다. 수도에서 멀지 않은 곳인데다 교통이 발달한 지역이라 딱이에요.”
“그렇군요. 어라, 그런데 바이렌이라는 분은.”
어디서 들어 봤다 했더니 예전에 클로드가 사칭했던 신분이 바로 바이렌 백작의 사생아였다. 그때를 떠올린 세벨리아가 미묘한 표정을 짓자 디하트가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음, 아니에요. 그분도 전전대 공작님의 형제분이라고 하셨던 게 기억나서요.”
“맞아요. 이제는 파문된 림스와 형제지간이었죠. 젊은 나이에 돌아 버린 그쪽과 달리 바이렌 숙부님은 다행히도 사태 파악을 하는 능력은 잃어버리지 않으셨더군요.”
두 형제는 디하트를 인버네스의 가주로 키워 내는 것에 있어 보수적인 교육관을 공유했으나 성격이나 품성에 있어서는 확연히 달랐다. 림스가 무소불위의 폭군이었다면 바이렌은 깐깐하고 고지식하지만 말은 통하는 교수와 같았다.
디하트가 날뛰는 동안 원로회의 고삐를 틀어쥐고 그들을 제어한 것도 바이렌이었다. 직계가 없는 동안 감히 방계가 날뛰게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지만.
“허튼짓을 할 사람은 아니에요. 자기 자식보다 직계 후손들을 아끼는 노인이니 로잘린에게 잘해 줄 겁니다.”
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바이렌 백작과 만난 적도 없는 자신보다 그의 판단을 믿는 편이 옳았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데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일레이였다.
“공작님, 이제 가셔야 합니다.”
디하트는 순식간에 심기 불편한 표정이 되었다. 그는 아니꼬운 눈으로 일레이를 흘겼으나 그것에 그쳤다. 달콤한 순간을 방해받은 건 짜증 났지만 지금 가지 않으면 더 큰 기쁨을 맛볼 수 없을 테니까.
한숨을 내쉰 디하트는 세벨리아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고 방을 나서려다 멈칫했다. 문밖에서 일레이가 그에게 뭐라고 손짓 발짓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자리를 정리하고 있던 세벨리아는 보지 못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디하트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돌아섰다.
“벨라.”
“깜짝이야. 간 거 아니었어요?”
“말해 주는 걸 잊어서요.”
세벨리아가 고개를 기울이자 디하트가 한숨처럼 말했다.
“한동안 많이 바쁠 예정입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기다리지 않아도 돼요.”
“네?”
담요를 정리하다 말고 세벨리아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얼마 안 걸릴 겁니다.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정말로.”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찌나 진지한지 마치 목숨을 건 맹세를 하는 줄 알았다. 자신이 알기로는 분명 황태자와의 동업 때문에 정신이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게 보고 있자니 무슨 심각한 일에라도 휘말린 것처럼 느껴졌다.
‘설마…. 아니겠지.’
세벨리아가 속으로 의심을 품는 동안, 금빛 눈동자는 의미 모를 감정으로 이글거렸다.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디하트가 다시 한번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