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62)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62)화(162/171)
외전 1-10
오랜만에 단둘이 하는 식사 자리였다. 로잘린은 친구와 함께 놀러 나갔고, 마야는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러 사라졌다. 디하트는 오늘따라 더욱 예뻐 보이는 세벨리아를 마주 보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식사 끝나고 디저트를 가져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디하트.”
“응?”
표면을 노릇하게 구운 크림 브륄레를 깨트리며 세벨리아가 말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내가 답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더없이 다정한 대답에 세벨리아는 부끄럽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곧바로 준비한 질문을 화살에 꿰어 그를 향해 겨눴다.
“내 선물은 없는 거예요?”
이 주의 공백기 또한 크기를 키운 건 그리움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디하트가 자리를 비운 동안 그가 뿌린 숱한 소문과 그로 인해 만들어진 갖가지 염문설을 모두 확인했다.
‘그중에는 도르엔 영애도 있었지.’
심지어 그녀는 디하트의 수많은 염문설 중 가장 확실하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즉, 사람들의 공신력을 살 만큼 디하트와의 접촉이 잦은 인물이라는 소리였다.
“선물, 이라면.”
노릇노릇한 표면을 깨트리려던 디하트의 손이 멈칫했다. 세벨리아는 그 작은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에게 방비할 시간을 주어선 안 됐다.
세벨리아는 뻔뻔스러운 과녁을 향해 두 번째 화살을 날렸다.
“저번에 출장 선물로 보석함을 사다 준다고 했잖아요.”
세벨리아는 조금 부끄러운 듯, 이렇게 제 입으로 말하는 게 살짝 수치스럽다는 듯 입술을 물었다.
“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리고 디하트는 심장이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공작이 괜히 공작이랴. 그가 창백하게 질린 표정을 수습하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디하트가 세심하게 다듬어진 목소리로 사과를 건넸다.
“미안해요. 내가 경황이 없어서 당신을 챙기지 못했습니다. 실망시킬 생각은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당신 바쁜 걸 알면서 재촉한 내 잘못이지. 좀 더 기다릴 걸 그랬나 봐요.”
마지막 타격의 효과는 굉장했다. 세벨리아의 자책에 디하트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내가 괜히 설레발을 쳐서 분위기를 망친 건 아닌지…….”
상대에게 이런 말을 하게 만들고도 가만히 있는다면 신사로서의 자격이 없었다. 디하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순식간에 세벨리아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간곡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다니. 미안합니다. 내가 어떻게 할까요.”
“그럴 필요 없어요, 디하트. 당신이 일부러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그냥, 상황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어요.”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 없어요,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세벨리아가 그를 응시했다. 무구하다 못해 순수하기까지 한 얼굴에 디하트는 말문이 막혔다.
죄악감에 가슴이 죄어드는 기분이었다.
‘어쩔 수 없나.’
디하트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녀를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처진 어깨 위로 세벨리아의 위로가 떨어져 내렸다.
선물을 받지 못한 건 그녀인데 반대로 자신이 위로받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쉰 디하트는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이대로 가다간 완벽한 서프라이즈는커녕 그녀의 마음만 상하게 할 가능성이 컸다.
잠시간 숨을 고르던 그는 반절의 진실을 꺼냈다. 세벨리아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다.
“사실 당신에게 주려던 보석함에 문제가 있어 세공을 다시 맡겼던 참입니다.”
“그랬어요?”
세벨리아의 눈이 놀라움에 크게 떠졌다.
“예. 사실 북부에 다녀온 건 그것 때문도 있어요.”
“그랬구나.”
마음 넓은 세벨리아는 짤막한 설명으로도 충분히 상황을 이해한 듯싶었다. 그녀의 다정한 용서에 디하트는 감격스러우면서도 양심 한군데가 쿡쿡 찔렸다.
오로지 그녀에게만 반응하는 양심이라 고통의 정도가 더 컸다. 그가 침음을 삼키며 고통을 감내하는데, 세벨리아가 돌연 눈을 빛내며 말했다.
“혹시 그것 때문에 영애들과 만났던 건가요?”
“그건… 벨라?”
방심한 사이를 틈타 훅 찔러 들어온 질문에 저도 모르게 솔직히 답하던 디하트는 뒤늦게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그가 경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세벨리아가 코웃음을 치며 몸을 뒤로 물렸다.
붙잡혔던 손 역시도 어느새 뺀 지 오래였다.
“당신이 북부에 머물러 있는 동안 수도에서 아주 재밌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렇게 말하며 건네는 신문에는 신분 높은 남자의 낯뜨거운 바람기가 적혀 있었다. 사내가 유혹한 영애들의 가문의 이름을 하나하나 눈에 담는 디하트의 얼굴이 빠르게 굳어 갔다.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문을 구긴 남자는 웃음기를 내던진 낯이었다. 어물쩍 넘기려는 태도도 상황을 모면하려는 의도도 없이 눈을 맞춰 오는 사내에게선 절박함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세벨리아는 처음부터 그에게서 진실을 원한 적 없었다.
“내일부터 당분간 날 찾아오지 말아요. 기간은 내가 당신을 다시 부를 때까지. 그때까지는 저택 내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걸 제외하고서는 날 만나러 오면 안 돼요.”
그녀가 원하는 건 적절한 시간이었다.
“물론 별장에 오는 건 완전 금지. 알겠죠?”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디하트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벨라. 내가 전부, 설명할 수 있어요. 어떻게 된 일인지 모두 말하겠습니다.”
어느새 습관처럼 무릎 꿇은 남자를 일으켜 세우며 세벨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뚜렷한 거절의 의미에 디하트의 얼굴은 절망스러운 빛을 띠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디하트. 당신 탓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왜…….”
“나만 당신을 기다렸잖아요.”
절망으로 가득했던 낯빛에 한 줄기 의문이 서렸다. 애처로운 그 빛을 향해 세벨리아가 손을 뻗었다.
“이번엔 당신이 기다릴 차례예요.”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는 사내의 뺨을 쓰다듬으며 세벨리아가 읊조렸다.
“이번 약속은 지켜 줄 거죠?”
디하트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지은 죄가 있는지라, 주어진 형벌에 순순히 따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약속할게요.”
한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세벨리아는 미소 지었다. 이걸로 한동안 시간을 번 셈이었다.
* * *
“이래 가지곤 끝이 안 나겠는데요, 아가씨?”
오늘도 일찌감치 인버네스 저택으로 출근한 데니사는 본관이 아닌 별관에서 세벨리아를 돕는 중이었다. 매일같이 청소하던 사용인들도 모두 물리고 한동안 출입 금지령까지 내린 세벨리아는 그곳에서 수상쩍은 일을 작당 중이었다.
“사람이 더 필요해요.”
“그건 안 돼.”
“적어도 물건을 옮기는 것만이라도 하인들을 시키세요.”
흐물거리는 환영을 가리키며 하는 잔소리에 세벨리아는 시선을 회피했다.
“이젠 몸도 괜찮고,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누가 환영술을 물건 옮기는 데에 써요?”
“마법사들도 그런다던데 왜 나한테만 그래…….”
환영술사의 존재가 적극적으로 대두된 이후 그녀는 많은 마법사들로부터 접견 요청을 받았다. 물론 다 만나지는 않았고, 개중에서 황태자의 인가를 받은 이들하고만 몇 번 차를 마신 게 다였다.
그리고 그때 만난 마법사들은 마법을 이용해 자질구레한 일들을 마음껏 해치우고는 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이게 다 힘을 효과적으로 운용하는 수련 중의 하나야.”
마법사들에게서 배운 그럴듯한 변명을 주워섬긴 세벨리아가 창가로 총총 다가섰다. 창문 위엔 커튼 대신 섬세한 자수가 놓인 하얀 레이스 천이 드리워져 있었다.
“자질구레한 건 대충 끝난 거 같지?”
부드럽고 따뜻한 색감의 응접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온통 아름답고 반짝이는 것들로 가득했다. 세 갈래 촛대, 사제들이 직접 짠 레이스, 은백색과 연청색 천으로 만든 코사지, 백은으로 빚은 꽃과 나뭇가지까지.
누군가 길을 잘못 들어 발을 들인다면 결혼식장이라 착각할 법한 분위기였다.
“생화는 마지막에 장식하자. 그럼 완벽할 거야.”
기운찬 얼굴로 세벨리아는 오늘치 일의 종료를 선언했다. 아직 치우지 않은 소파에 앉아 자수를 놓던 데니사가 폭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에 신경 써야 할 건 생화가 아니라 반지겠죠, 아가씨.”
“…….”
“황태자 전하의 전령이 내일 시간에 맞춰 방문한다고 했어.”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며 세벨리아는 데니사의 손에서 자수 감을 빼앗아 그녀를 별관 밖으로 떠밀었다.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는지, 서늘한 저녁 공기가 뺨을 스쳤다.
“이만 퇴근해.”
불만 가득한 얼굴의 데니사를 배웅하며, 세벨리아는 열심히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떠나면서도 끝까지 ‘왜 아가씨가 그런 일을 해야 하냐.’며 ‘그 남자는 자기가 복에 겨운 걸 알아야 한다.’고 구시렁거렸다.
“어휴.”
자신과 달리 그녀는 아직도 디하트를 용서하지 못한 듯싶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건 아니었다. 때때로 탐탁지 않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곤 하지만 함께 지내는 걸 반대하지는 않으니까.
‘정말 싫어했으면 내 계획을 들었을 때 반대했을 테지.’
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세벨리아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커튼이 반쯤 드리워진 창 너머 누군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눈이 마주친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디하트는 당황한 얼굴로 커튼 뒤로 몸을 틀려 했으나 곧 생각을 고쳐먹은 듯 당당한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우연이에요.’
소리 없이 움직이는 입술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곁을 에워싼 어둠 속에서 등대처럼 혼자 빛을 발하는 창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알아요.’
그렇게 말을 돌려주자 경직되어 있던 남자의 얼굴이 풀리는 게 보였다. 못 말리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내저으며 세벨리아는 걸음을 옮겼다.
그래, 우연이 당신을 내게 이끌었다.
원래 당신의 짝으로 정해져 있던 사람은 넬리아였고, 나는 그저 우연히 그 자리를 대신했을 뿐이었다. 우연찮게 시작된 결혼 생활이었고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죽음을 자처해 도망칠 만큼, 내 존재를 지워 버리며 사라질 만큼.
하지만 당신은 기어코 날 찾아내고 말았다.
내가 겪었던 고통만큼, 그러나 그보다 더 끔찍한 내 부재를 견디며 몸부림쳤지. 그리고 그 지난한 몸부림은 끝끝내 내게 닿았다.
우연히, 신의 축복이 머물렀던 그 도시에서, 찰나의 마주침으로.
그래서 세벨리아는 그의 변심을 믿지 않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무리 떠들어 댄다 한들 그녀의 믿음은 결코 부서지지 않았다.
자신의 부재가 곧 그에겐 지옥임을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언제까지고 떠들게 할 수는 없지.’
힘든 시간이 너무 길었기에 온전히 행복만 누리려 했다. 하지만 이곳은 산속의 연구소가 아니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우리만의 낙원을 꾸릴 수 없는 곳.
그렇다면 다시는 그런 더러운 소문을 낼 수 없도록 하면 되는 일이다.
달칵.
방문을 열고 들어서며 세벨리아는 다시 한번 자신의 계획을 점검했다. 내일, 황태자에게 부탁한 반지가 도착하는 대로 디하트를 별관으로 불러 그에게 청혼할 것이다.
“기대되네.”
그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할까. 두근거림 속에서 세벨리아는 잠자리에 들었다. 심장이 자꾸만 뛰어 도무지 눈이 감기지 않았다.
“……!”
세벨리아가 눈을 뜬 건 새벽 나절의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긴장과 기대 때문에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소란이 일어 잠에서 깨 버렸다.
“…….”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화풀이를 하듯 긴 카디건을 껴입었다. 무슨 일인지 확인해야겠어. 벌컥 문을 연 그녀가 성큼성큼 복도를 걸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기다 문득 창밖을 보니 하늘이 희푸른 색이었다. 새벽도 아침도 아닌 애매모호한 시간. 완벽한 하루의 첫 시작을 망쳤다는 불쾌감에 도무지 표정을 풀 수가 없었다.
한편, 아래층에서는 아직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소음이 계속되고 있었다. 보아하니 최대한 소리 없이 움직이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반대급부를 낳았다.
조심히 움직이려다 벽에 쿵 하고 박고, 숨소리 안 낸답시고 참았다가 한 번에 크게 터트리고. 이런 것들이 한데 겹쳐 공기를 울렸다.
‘도대체 왜 이 새벽에 일을 하는 거야?’
도둑이라면 일찌감치 디하트에 의해 도륙이 났을 테니 분명 그의 묵인하에 움직이는 사용인이나 기사들일 게 분명했다. 가장 가능성 높은 건 북부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는 건데, 굳이 왜 사람들이 자는 시간에 이러는 걸까.
생각이 이어진 지도 한참, 세벨리아는 어느새 층계참 앞에 다다랐다. 그녀가 발을 내딛으려는데 아래에서 목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