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6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63)화(163/171)
외전 1-11
“벨라?”
“어머, 로잘린. 안 자고 일어나 있었어요?”
구불구불한 계단 아래에서 나타난 건 로잘린이었다. 가벼운 숄을 걸친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이었는데, 세벨리아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설마 또 책갈피를 찾으러 다닌 거예요?”
“아, 그게.”
“더는 혼자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요, 로잘린.”
지난날 일사병으로 쓰러진 뒤 로잘린은 한동안 근신 아닌 근신을 해야 했다. 그 뒤로 햇빛이 없을 때 찾으면 되지 않냐며 이렇게 종종 저녁마다 혼자 저택을 뒤지고 다니곤 했다.
“차라리 사용인들에게 부탁해요.”
로잘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집스러운 모습에 세벨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참 닮은 남매라니까.
‘어쩔 수 없지.’
어린애도 아니고 언제까지 설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뜻을 꺾을 수 없다면 적어도 몸만은 상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며 세벨리아는 자신의 카디건을 로잘린에게 둘러 주었다.
“이거 입어요.”
“괜찮은데.”
“쉿. 밤새 잠도 안 자고 놀러 다닌 사람은 변명할 권리가 없어요.”
어린애 취급에도 로잘린은 입술만 비죽일 뿐 투덜거리지 않았다. 다만 카디건을 입고도 한동안 어물쩍거리며 세벨리아의 곁을 떠나지 않을 뿐.
“혹시 나한테 더 할 말 있어요?”
“아, 음. 그게 말이죠.”
계단 아래를 슬쩍 내려다본 로잘린이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렸다. 세벨리아는 그녀를 따라 계단 밑에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샌가 소음이 멎어 있었다.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된 로잘린이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사실 오늘 책갈피를 찾았어요.”
“정말요? 세상에, 축하해요!”
“그런데 다른 것도 같이 찾았어요…….”
머뭇거림의 이유는 이것 때문이었을까. 흙먼지 묻은 금박 책갈피를 든 손이 내려가고, 영롱한 빛을 내뿜는 귀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세벨리아를 향해 로잘린이 사형 선고를 언도했다.
“아무래도 마야가 훔친 물건들과 세트 같죠?”
머리가 아찔했다. 세벨리아가 신음을 흘리며 난간을 짚자 놀란 로잘린이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요. 잠깐 현기증이 나서.”
“제가 방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적잖게 놀랐는지 맞닿은 로잘린의 심장이 쿵쿵 뛰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흐리게 웃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됐어요. 내려가서 차 한 잔 마시면 돼요.”
“하지만 돌아가서 쉬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이 기회에 바람이라도 쐬죠, 뭐.”
어차피 잠도 안 오는데 차라리 별관에 가서 다시 한번 점검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그렇게 로잘린에게 밤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그녀가 갑자기 자신을 막아섰다.
“로잘린?”
“벨라,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요.”
“지금요?”
“네, 지금 꼭 해야…….”
그때였다. 아래층에서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더니 억누른 신음이 삐져나왔다. 그리고 로잘린은 디하트에게 받은 첫 부탁, 바로 세벨리아를 붙잡아 놓는다는 임무를 장렬히 실패했다.
타다닥.
빠르게 계단을 뛰어 내려간 세벨리아는 곧 저택의 현관에서부터 홀, 응접실에 이르는 넓은 공간이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된 걸 목격했다.
“이게 다 뭐예요?”
툭 하고 흘러나온 진심에 소리 없이 걸음을 옮기던 기사들이 뚝 하고 멈췄다. 자세히 보니 각자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꽃이며 화환, 색유리로 만든 자기, 텅 빈 새장과 부드러운 깃털…….
깃털?
“앗!”
허공을 선회하던 금빛 깃털의 새가 층계 위로 날아오른 건 그때였다. 놀란 세벨리아가 목을 움츠리자 새는 작게 울더니 샹들리에 위에 내려앉았다.
“다 봤군요.”
허탈한 목소리와 함께 응접실 쪽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디하트였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사들을 물리고 한숨을 삼켰다.
손으로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는 게 퍽 난처해 보였다.
“하아…….”
이쯤 되면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게 이상했다. 세벨리아는 도망치고 싶은 충동과 싸우며 디하트를 보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러자 일 층의 상황이 더욱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아, 어떻게 해.’
이건 누가 봐도 청혼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 아닌가. 심지어 현관 쪽에는 아직 풀지도 못한 장식 상자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더 이상 모르는 척하는 것도 디하트에겐 고문일 터.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할 수밖에 없었다. 단숨에 층계를 내려온 세벨리아가 디하트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만남 금지는 이 순간부터 해제예요.”
탈력감에 젖어 있던 금빛 눈동자에 의아한 빛이 돌았다. 세벨리아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더 주지 않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잠깐, 어딜 가는 겁니까.”
디하트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으나 세벨리아는 말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한숨을 내쉰 그는 곧 그녀가 후원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마음대로 해요.”
더 이상 구길 낯도 없었다.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세벨리아의 뒤를 따른 디하트는 그녀가 장미 덤불 사이를 지나자 눈썹을 치켜세웠다.
“별관 출입 금지도 오늘도 해제인 겁니까?”
“쉿.”
문을 열자 산뜻한 공기가 확 밀려 나왔다. 현관을 장식한 잎 푸른 나무들 덕이었다. 기억과 다른 모습에 디하트가 뭐라 말하려는 찰나, 세벨리아가 그를 응접실로 밀어 넣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디하트는 말을 잃었다.
“이게 다 뭡니까…….”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 끝이 잔잔히 흔들렸다. 세벨리아가 일 층의 광경을 보고 바로 상황을 파악했듯,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응접실 맞은편,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제단 위 텅 빈 자리를 본 그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반지는 직접 끼워 줄 건가요?”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이, 내게?”
물기 어린 금빛 눈동자가 새벽빛 속에서 아름답게 빛났다. 오래도록 질리지 않을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세벨리아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가슴팍을 짚었다.
“당신이 허락한다면요.”
디하트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작게 입을 벌리더니 허탈한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안주머니에서 꺼낸 건 예상대로 반지 케이스였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내 눈치를 얕보지 말아요.”
의기양양한 대답에 디하트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에 세벨리아가 눈을 깜빡였으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중에, 나중에 이야기합시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허탈함은 어디 가고 온 만면에 기쁨이 어린 그가 속삭였다.
“어서 날 당신의 것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벨라.”
이번엔 무릎 꿇지 않았다. 당당하게 그녀와 마주한 채 요구했다. 마땅히 차지할 자격이 있다는 듯이, 당신이 내게 줄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태도로 말했다.
“내게 약속해 줘요.”
감미로운 속삭임 속에서 세벨리아는 상자를 열었다. 의도치 않는 침묵이 흐르고, 세벨리아가 비난을 품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디하트.”
상자 안에 들어 있는 반지는 지난번 마야가 훔친 것과 흡사한 모양이었다. 심지어 박혀 있는 보석도 동일해 보이는 게 의도한 게 틀림없었다.
한편 디하트는 역시 아직도 알아차리지 못했구나, 하는 얼굴로 긴 숨을 뱉었다.
“이제 와서 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 될 수 있는 한 숨기려 했지만… 어쩔 수 없죠.”
지친 눈빛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경악 그 자체였다. 모든 건 마야가 보석함을 열어 예물용 장신구 일체를 훔쳐 간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물건들은 할머님이 할머님의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물건입니다. 바이렌 숙부가 결혼하며 물려받은 것을 제게 넘겼고, 당신에게 선물할 생각으로 오래된 보석을 새것으로 교체했죠.”
말문을 잃은 세벨리아를 앞에 두고 디하트가 말을 이었다.
“보석함은 연막이었습니다. 그 안에 있는 게 진짜였죠. 당신 눈에 어울리는 블루 다이아몬드를 구해다 겨우 완성시켰는데, 그 먼지 덩어리 녀석이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
조곤조곤 이어지던 목소리는 끄트머리로 갈수록 살벌해졌으나 충격에 굳어 있던 세벨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거예요?”
겨우 정신을 차린 세벨리아가 반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디하트가 슬픈 얼굴로 답했다.
“당신 취향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공작가 대대로 물려줄 예물이기에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는 고리타분한 취향을 섞어야 했습니다.”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아니, 잠깐만요. 그럼 예물을 처음부터 다시 전부 준비했다는 거예요?”
“예.”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디하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쉬운 수긍에 세벨리아는 잠시 얼이 빠졌다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귀족 가문, 그것도 공작가나 되는 집안이 아무 데서나 예물을 공수했을 리가 없었다. 최소한 이름값 높은 장인, 그게 아니라면 황실에 물건을 공급하는…….
타르옌 상회.
머릿속을 스치는 깨달음에 세벨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 디하트의 옷자락을 거머쥔 그녀가 몰아붙이듯 물었다.
“그래서였어요?”
박력에 놀란 디하트가 눈을 깜빡이자 그녀가 재차 물었다.
“도르엔 영애와 자주 만난다는 소문이 난 게, 설마 타르옌 상회 때문이었냐고요.”
“그래요.”
디하트가 슬픈 낯으로 시인했다.
“기사에 실린 가문들 전부 타르옌 상회와 연을 맺은 이들입니다. 그들의 추천장이 있어야 거래를 틀 수 있다는 치졸한 조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직접 발품을 팔아야 했어요.”
하지만 그 가문들마다 혼인 적령기의 영애들이 있다는 건 정말 몰랐다며, 디하트가 쓸쓸한 어조로 덧붙였다.
“하늘에 맹세코 가주들 외엔 만난 적도 없습니다.”
“도르엔 영애도요? 그녀와는 사이가 좋은 것 같았는데.”
“내가 말입니까?”
의혹조차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찡그린 디하트가 말했다.
“혹시나 집무실에서 만났던 일을 꺼내는 거라면 오해입니다. 처음부터 그녀가 타르옌 상회와 가까운 집안의 영애라는 걸 알고 있어 적당한 선에서 대해 준 것뿐입니다.”
혀를 찬 디하트가 마지못한 어조로 덧붙였다.
“게다가 그녀는 로잘린의 친구니까.”
그래서 참아 줄 만했다며 말하는 남자의 찌푸린 미간은 더없이 진실해, 세벨리아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긴 사람 만나는 걸 싫어하는 남자가 처음 보는 영애와 잘도 말을 섞는다 했다.
“오해는 다 풀린 겁니까?”
묻는 목소리는 조금 재촉하는 듯싶었다. 왜 그러나 싶던 세벨리아는 곧 반지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그의 눈빛에 상황을 파악했다.
“받고 싶어요?”
“무척이나, 네.”
당장 반지를 끼워 주지 않으면 그대로 잡아먹을 분위기였다. 말만 공손하지 풍기는 기운은 야수나 다름없는 사내를 앞에 두고 세벨리아는 그저 웃었다.
순백의 제단, 녹슬지 않는 꽃과 나뭇가지를 앞에 두고 그녀는 영원을 약속하는 말을 건넸다.
“그럼 나랑 결혼할래요?”
금빛 눈동자가 툭 하고 허물어져 내렸다. 단단한 가슴팍이 크게 오르내렸다. 뜨거운 숨을 억누르는 남자의 등 뒤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번졌다.
“기꺼이.”
떨리는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눌렀다.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입술을 타고 흐르는 목소리가 짜릿했다. 두꺼운 그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우며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디하트가 낮게 목을 울렸다.
“이제 전부 당신 거예요.”
“응.”
“전부 당신에게 줄 거라고.”
쿵쿵 뛰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세벨리아는 나붓이 눈을 감았다.
“절대로 다시 받아 가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할 거야…….”
귓가로 무겁게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몸을 감싸 안는 단단한 두 팔이 두렵기는커녕 믿음직스러웠다.
“좋아.”
스스럼없이 나온 두 단어를 되뇌며 세벨리아는 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래, 좋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죽음을 가장하고 도망쳐도, 끝끝내 당신이 원하는 건 결국 나밖에 없다는 게 좋았다.
당신에게 필요한 건 오직 나 하나라는 게 좋았다.
그리고 이젠 사람들도 그걸 알게 될 거라는 게, 참 좋았다.
“결혼식은 크게 해요.”
숨 막힐 정도로 따뜻한 품 안에서 세벨리아는 속삭였다.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까지 전부 알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