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6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64)화(164/171)
외전 2-1
러크우드의 사절단이 벨크람을 방문한 건 인버네스 공작의 결혼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을 때쯤이었다. 그때쯤 마야는 정원 여기저기 생긴 낙엽 무더기에 뛰어드는 새로운 취미에 푹 빠졌고, 그때마다 저택은 난장판이 되어 디하트는 질색하며 별관으로 도망쳤다. 실은 세벨리아를 보러 간 게 뻔했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말을 얹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뿐인 사촌 여동생을 만나러 온 발라크에겐 모든 게 마뜩잖을 뿐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결혼 상대가 전남편이라는 점에선 더더욱.
그래서 발라크는 그렇지 않아도 바쁜 일과표에 인버네스 저택 방문을 집어넣어 매일같이 세벨리아를 만나러 왔다.
“굳이 결혼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이대로 그냥 같이 살기만 해도 상관없잖니.”
결혼 소식을 편지로 알린 게 언제 적 일인데 발라크는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다. 들고 오는 레퍼토리도 이제 슬슬 겹치기 시작했다.
세벨리아는 이제 그의 말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발라크가 가져온 무역상 설립 서류들을 훑어보던 그녀는 팔을 툭툭 치기 시작한 마야를 덥석 들어 올려 발라크에게 넘겼다.
“자아, 바쁜 누나 괴롭히지 말고 삼촌한테 가자.”
발라크는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마야를 밀어내지 않았다. 따끈따끈한 생명체를 무릎 위에 눕힌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이 급한 나이도 아니고, 세상을 좀 더 둘러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루브라디를 오가는 배가 출항한다던데 말이다.”
“오라버니, 이 서류에 서명이 누락된 것 같은데요.”
“뭐? 그럴 리가 없는데. 잠깐 보여 주렴.”
세벨리아가 건넨 서류를 훑은 발라크는 그녀의 말대로 누락된 곳이 있음을 발견하고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루드밀 이 녀석이 제게 맡겨 달라 신신당부해 놓고선.”
어느새 결혼을 방해하겠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세벨리아는 눈에 불을 켜고 나머지 서류들을 살피기 시작한 발라크를 지켜보며 웃음을 삼켰다.
‘진짜로 방해하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그가 진심으로 제 결혼을 방해하려고 들었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였을 테다. 이를테면 디하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국교 수복을 생각해 봐야겠다고 억지를 부린다든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발라크는 놓쳐 버린 세월만큼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로스엘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예정대로 러크우드에 가겠구나.’
발라크가 대사로 오기 전, 로스엘은 결혼 전에 러크우드에 방문해 달라 요청했다. 디하트와 결혼하기 전 본국에 ‘벨라 애쉬렌트’가 살아 있음을 입증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사실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더 크겠지만…….’
세벨리아가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디하트가 일을 끝내고 돌아왔다. 그 바람에 발라크가 그녀보다도 먼저 디하트의 도착 소식을 알게 되었다.
“으.”
구겨진 미간을 필 생각도 하지 않고 발라크는 자리를 지켰다. 하인이 소식을 가져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다렸다는 듯 디하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또 왔습니까?”
서로가 탐탁지 않은 건 피차 마찬가지인 듯했다. 인사보다도 먼저 나온 핀잔에 발라크가 코웃음을 쳤다.
두 사람이 무언의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세벨리아가 정신을 차렸다.
“디하트, 언제 왔어요?”
“조금 전에 왔죠. 아, 일어날 필요 없어요.”
부드럽게 다가온 사내가 세벨리아의 뺨에 키스를 남겼다. 어깨를 토닥이고 담요를 여미더니 손등으로 체온을 재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었다.
“몸은 좀 어때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요?”
“거짓말. 점심에 몸이 좋지 않다고 식사 거른 거 알고 있어요.”
세벨리아가 시선을 피하자 디하트가 낮은 웃음을 흘리고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작게 간질였다.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으로 세벨리아를 바라보던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허리를 펴고 발라크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언제 떠나실 겁니까?”
세벨리아를 대할 때와 확연한 온도 차에 발라크는 할 말을 잃었다.
“몸도 좋지 않은 사람을 붙들고 매번 불평만 늘어놓는 것도 이제 슬슬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은 안 듭니까. 사촌 오빠가 되어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한심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발라크는 기가 찼다. 지금 누가 누굴 한심하게 보는 거야. 불만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세벨리아의 체력이 좋지 않은 건 사실이기에 발라크는 입술을 뒤트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점심을 거른 건 알면서 내가 저녁 식사에 초대받은 건 모르나 보군.”
디하트의 눈이 일그러지는 걸 보면서 발라크는 고소해했다.
“이러지 말고 이만 들어가요.”
언제나처럼 세벨리아가 중재를 했다.
“그래요.”
“담요는 내가 챙길게.”
부드러운 목소리에 두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 협정을 맺었다. 세벨리아는 그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다정한 시간이 느릿느릿 흘러갔다.
그동안 담벼락 밑의 낙엽 더미는 치워지고 다시 쌓이길 몇 번이고 반복했고, 발라크는 대사로서의 업무를 모두 수행하고 돌아갈 날을 코앞에 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에 맞춰 세벨리아와 디하트는 앞으로 몇 달간의 일정을 모두 비우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무리 없이 일정을 비운 세벨리아와 달리 디하트는 몇 번이고 계획이 엎어질 뻔했다. 이상하게 출발 날짜에 가까워질수록 사건 사고가 겹쳐 러크우드로 떠나지 못할 뻔했으나, 초인적인 대처로 어떻게 수습한 듯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것 같은데.’
세벨리아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디하트를 떠올렸다. 북부의 업무뿐만 아니라 황실과의 일도 떠맡은 그는 바로 오늘 새벽까지 황실에 붙들려 있었다.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을 염려한 황제의 투정 때문이었다.
‘정말 혼자 가게 되는 줄 알았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는 출발 시간에 맞춰 저택에 도착했다. 비록 피골이 상접하고 눈 밑이 거무튀튀한 게 여행 내내 숙면을 취해야 할 것 같았지만 말이다.
“쯧.”
어디선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발라크가 있었다. 세벨리아와 시선이 마주친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상냥한 얼굴이었다.
“……?”
위화감에 세벨리아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발라크가 하인에게 손짓해 마차를 불렀다.
“러크우드로 가는 동안 편안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단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채만 한 마차가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보였다. 때마침 옷을 갈아입은 디하트가 현관으로 나왔다.
“그리고 호위는-.”
“호위는 이쪽에서 맡겠습니다.”
세벨리아의 어깨를 껴안으며 디하트가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피폐하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멀끔한 얼굴에 잘난 태가 나는 모습이었다.
“일레이.”
그가 손을 튕기자 싱글거리는 얼굴의 일레이가 기사들을 이끌고 도열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에 고삐를 쥐고 있었는데, 곁에 선 새카만 흑마에 연결되어 있었다.
촉박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흠잡을 데 없는 준비성이었다.
“흠.”
하지만 억지는 그런 데 부리라고 있는 법. 팔짱을 낀 발라크가 짐짓 걱정스러운 낯으로 말했다.
“겨우 말 한 마리 가지고 되겠는가? 러크우드까지 가는 길은 벨크람 내의 평안한 여행과 달리 험난할 걸세. 게다가 다들 처음 가는 여정인데 체력 분배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초행길이라 한들 그래 봤자 사람이 오고 가는 길밖에 더 되겠습니까. 게다가 다른 누구도 아닌 힐렌드 홀의 기사들입니다. 그곳의 공기는 러크우드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한 곳은 아니죠.”
치열한 공방전 끝에 두 사람은 웃는 낯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
“…….”
긴장된 분위기를 깨트린 건 세벨리아였다.
“마차가 무척이나 좋아 보이네요. 이 말들은 설마 러크우드 태생인가요? 이렇게 새하얀 말들은 처음 봐요!”
다행히도 발라크는 더 싸울 생각이 없었던지 그녀의 말에 빠르게 장단을 맞췄다.
“벨라, 너라면 역시 알아볼 줄 알았다. 벨크람의 거친 녀석들과는 확연히 다른 게 느껴지지?”
세벨리아가 애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발라크가 한껏 기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 기품 어린 자태를 보렴. 서리숲 태생의 선조를 가진 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이란다.”
서리숲에서 유명한 건 약재만이 아니었던가? 세벨리아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말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새벽빛을 머금은 갈기가 특징이지. 덕분에 밤에도 따로 등불이 필요 없어.”
어쩐지 갈기에서 희미한 빛이 어른거린다 싶더니,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었나 보다. 세벨리아가 감탄 어린 눈으로 말을 구경하는데, 뒤에서 한껏 낮아진 목소리가 들렸다.
“표적이 되기에 딱 좋은 말이로군요.”
“디하트?”
“밤에 빛나는 말이라니. 이런 걸 준비해 놓고 날 따돌리려고 했던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작게 속삭인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말하는지 듣고 싶어 세벨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디하트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어 앞을 보게 했다.
“뭐, 그래 봤자 실패한 일이고. 당신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벨라.”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세벨리아가 영문을 몰라 묻자 디하트는 다정한 낯을 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건 그가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