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65)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65)화(165/171)
외전 2-2
“대놓고 나를 털어 달라고 외치는 말이 이끄는 마차라 하더라도 지키는 자들의 실력만 충분하다면 아무 일 없을 거란 이야기입니다. 그게 제국의 제일가는 권능을 가진 공작이라면 더욱더.”
나지막한 목소리가 조용한 공기를 울렸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발라크가 입을 열려는 찰나 디하트가 마차 문을 열어젖혔다.
“자, 이제 슬슬 출발하죠.”
정중한 에스코트와 함께 세벨리아를 마차에 태운 디하트는 태연하게 그녀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그러자 일레이가 기다렸다는 듯 마부를 재촉했다.
“날이 저물기 직전이네,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있나?”
“아, 아닙니다! 그것이.”
갑작스레 제게 돌려진 화살에 놀란 마부가 발라크를 곁눈질했다. 일행의 리더인 발라크가 아직 마차에 타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자 디하트가 열려 있던 창문 새로 흘끗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그럼 대사께서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도록 하게.”
산뜻한 말을 끝으로 창문이 닫히고 커튼이 드리워졌다. 물 흐르듯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덕분에 바깥에 홀로 남겨진 발라크도, 얼떨결에 마차에 탑승한 세벨리아도 미처 딴지를 걸지 못했다.
“……허!”
그렇게 발라크의 장탄식과 함께 러크우드로 향하는 여행이 시작되었고, 가족만의 시간을 도모하겠다는 그의 계획은 당연하게도 무참히 실패했다.
“너무 성급하게 굴었나.”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공들인 계획이 실패한 것에 대해 억하심정을 품을 테지만, 발라크는 그런 옹졸한 사내가 아니었다.
선두 마차에 탄 그는 창턱에 팔을 얹고 경치를 구경하는 척, 뒤따라오는 마차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눈치만 빠르군.”
툴툴거리면서도 발라크는 내심 디하트의 능력에 만족했다. 그 정도는 되어야 세벨리아의 곁에 있을 만하지.
“쯧.”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발라크는 디하트가 소중해 마지않은 사촌 여동생을 괴롭히고 몰아붙여서 신경 쇠약 직전까지 가게 만든 끝에 자살로 위장하고 도망치게 만든 파렴치한이라는 걸 어디까지나 잊지 않았다.
“편안한 여행은 꿈도 꾸지 말라고.”
발라크가 작당을 꾸밀 무렵, 희대의 파렴치한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디하트는 그에 걸맞은 태연한 얼굴로 세벨리아의 추궁을 막아 내고 있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마차 안, 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디하트를 또렷이 응시했다.
“어서 말해 봐요.”
“뭘 말입니까?”
“발라크가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이는 디하트를 보며 세벨리아가 쌍심지를 켰다.
“수상한데…….”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거짓말.’
아무리 좋게 말해도 디하트의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더없이 냉정하고 까칠한 사내였으니까.
하지만 아무 이유 없이 상대를 비꼬거나 적개심을 내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전 날 정원에서 말씨름을 했을 때도 제 건강을 챙기지 않았다는 명분이 있었고.
그래서 세벨리아는 분명 디하트와 발라크 사이에 자신이 모르는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분명 뭔가 있는데.”
눈매를 좁힌 세벨리아가 탐색하는 시선으로 디하트를 훑었다. 하지만 상대는 세벨리아보다 한 수 위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격무에 시달려 황폐한 낯이었던 사내는 평소처럼 뻔뻔하고 여유로웠다.
“시선이 뜨겁네요. 뺨이 간지러워요.”
“먼지가 붙은 거겠죠. 바른대로 말해 봐요. 갑자기 일이 늘어난 거랑 발라크가 무슨 연관이 있는 거죠?”
세벨리아가 추궁하자 디하트는 돌연 싱긋 웃더니 제 입술을 건드렸다.
“아, 먼지가 여기에도 붙은 것 같은데.”
“뭐라고요?”
“좀 확인해 주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상체를 숙이는 남자를 밀어내며 세벨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됐어요.”
폭 한숨을 내쉰 세벨리아가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말을 못 하겠어.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자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마차를 울렸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말고 이만 자기나 해요. 여행 준비하느라 밤새 잠 설친 거 다 알고 있습니다.”
그가 기다렸다는 듯 담요를 꺼내 세벨리아의 무릎을 덮었다. 보들보들한 감촉의 담요는 언제나처럼 따뜻했다.
담요를 만지작거리던 세벨리아가 지나가듯 말했다.
“당신도 한숨도 못 잤잖아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당신만 내 일거수일투족을 받아 보는 줄 알아요? 내게도 믿을 만한 정보통이 있다고요.”
세벨리아가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하자 디하트의 눈이 휘어졌다.
“마차 안에서 할 일도 없는데 당신도 눈이나 붙여요.”
귀여운 것을 보듯 한 눈으로 세벨리아를 응시하던 그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요.”
디하트는 그렇게 말하고서 손수 창문의 커튼을 점검했다. 한 줌의 빛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이 꼼꼼히 치는 모습에 세벨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시선을 느낀 건지 그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만 자요. 나도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매번 말만 그렇게 하고.”
세벨리아는 그가 종종 악몽 때문에 저택을 배회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매번 제게 일이 많아 일찍 일어난 거라며 변명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세벨리아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악몽에 대해 숨기고 싶어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으니까.
“안 그런다니까요.”
디하트는 작게 웃으며 그녀에게 쿠션을 건넸다. 세벨리아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쿠션을 받아 널찍한 좌석에 몸을 기대 누웠다.
“억지로 버티지 말고 자요.”
그 말이 도화선이라도 되는 것처럼 금세 수마가 몰려들었다. 깜빡, 깜빡. 흐려지는 시야 사이로 디하트가 보였다 사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은 척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그는 숨길 수 없는 피곤을 눈가에 달고 있었다.
세벨리아는 점점 몽롱해지는 정신으로 생각했다.
‘계속 말 돌리는 걸 보니 분명 무슨 일이 있었어…….’
생각을 더 이어 나가고 싶었으나 밤새 잠을 설친 몸은 그에 따라 주지 않았다. 세벨리아의 입에선 연신 작은 하품이 끊이지 않았고, 가물거리던 시야는 이내 어둠에 먹혔다.
“……그렇게나 기대되는 걸까.”
완전히 잠든 그녀의 머리맡으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흩어졌다.
“초조한 건 나뿐이지.”
* * *
제국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여정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마차는 넓고 푹신했으며 세벨리아의 체력에 맞춘 일정은 여유롭기 그지없어 도중에 들르는 도시들을 한 차례씩 구경할 정도였다.
물론 마냥 평온하지는 않았다. 디하트와 발라크를 필두로 한 인버네스와 애쉬렌트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에게 으르렁거렸다. 다행히도 신경전이 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없었지만.
‘만약 그랬다면 내가 가만두지 않았을 거야.’
세벨리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도시의 성벽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 쉬었다. 제국을 횡단하는 경험은 무척 즐거웠지만 이 조합으로는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복잡한 속도 모르고, 마차는 꾸준히 움직여 마침내 성벽을 넘었다. 도시의 정경이 눈앞에 펼쳐지기가 무섭게 창밖에서 솔직담백한 감상이 터져 나왔다.
“생각보다 수수하네요?”
곧은 자세로 말 위에 탄 일레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에 담기는 거라곤 칠이 벗겨진 건물들과 귀퉁이가 깨진 포석. 대로변에 듬성듬성 돋아난 풀과 간간이 오가는 주민들뿐이었다.
국경 도시라기엔 너무 초라한 모습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휘휘 젓던 일레이는 돌연 세벨리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별거 없어 보이는데 여기가 정말 국경 맞을까요?”
“마부가 다른 길로 빠진 게 아니라면 맞겠죠.”
“희한하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일레이는 디하트의 눈총에 아차 하며 말을 몰아 멀어져 갔다.
“다른 국경 도시와 달리 오가는 상단이 없어서 그럴 겁니다. 사람과 돈이 흐르지 않는 도시는 발전하지 않으니까.”
방해꾼을 쫓아낸 디하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하지만 조금씩 달라지겠죠.”
단절되었던 국교가 다시 열리는 순간, 이 도시는 다른 곳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융성할 것이다. 디하트의 설명이 끝나자, 창밖을 바라보던 세벨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가 빗겨 간 푸른 눈동자가 빛 속에서 반짝였다.
“그럼 다음번에 또 와요.”
기대로 밝아진 얼굴을 앞에 두고 어떻게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
디하트는 중앙에서 국경까지 한 달 가까이 되는 여정이라든가, 복귀한 뒤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업무에 잠깐 머리가 아찔했으나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답했다.
“당신이 원하면 언제든지요.”
활짝 웃는 얼굴이 심장에 해로울 만큼 예뻤다. 저 미소를 볼 수 있다면야, 철야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똑똑.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디하트가 밖을 내다보니 일레이가 서 있었다. 벨크람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준비된 모양이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도시에 하나뿐이라는 고급 레스토랑은 수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디하트는 내심 개인실이 없을까 걱정했으나 기우였다.
준비된 개인실은 화려하진 않지만 제법 봐줄 만했다. 가끔씩 여흥 삼아 들르는 귀족들을 위한 장소라 하더니 신경 쓴 흔적이 보였다.
세 사람이 자리에 앉자 급사가 주문을 받은 뒤 돌아갔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세벨리아는 기시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