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66)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66)화(166/171)
외전 2-3
‘이 분위기는…….’
분명 말싸움이 터지기 직전의 팽팽한 긴장감이었다. 세벨리아는 티 나지 않게 눈을 돌려 원탁에 둘러앉은 두 남자를 살폈다. 겉으로 보기엔 더없이 다정한 사이 같았으나 오가는 눈빛 속에 불꽃이 튀었다.
짝!
둘 중 한 명이 마침내 선공을 가하려던 순간, 세벨리아가 손뼉을 쳤다. 하늘색 눈동자와 금빛 눈동자가 휙 하고 움직여 그녀를 응시했다.
“거기까지만 해요.”
“…….”
“…….”
“설마 내가 식사 거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건 아니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제 건강을 인질로 잡은 협박은 유효했다. 두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달싹이던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식사할 땐 목소리 높이는 일 없이, 조용하게. 알겠죠?”
두 남자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자세를 바로 했다. 겨우 평화가 찾아왔다.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급사가 음식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음?”
전채가 끝난 뒤 본식이 들어왔을 때, 세벨리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가까이 오기도 전부터 풍기는 매콤하고 얼얼한 향기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향기의 정체는 부드럽게 쪄 낸 생선 조림 위에 얹어진 붉은 소스였다.
자연스레 나이프를 드는데 발라크가 아차 싶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벨라, 잠깐 기다리렴.”
시선을 돌리자 그가 그녀의 손목 위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내가 미리 물어본다는 걸 잊었어. 본식에는 특산물인 향신료가 들어가 있어. 많이 매울 텐데 괜찮겠니? 매운 걸 잘 못 먹는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주문을 넣을게.”
그 말에 세벨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말없이 고개를 흔드는데 어디선가 삐딱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달 동안 곁에서 도대체 뭘 봐 온 건지.”
“뭐라고 했나?”
웃는 낯으로도 욕을 할 수 있다면 발라크야말로 그 분야의 최고봉일 것이다. 상냥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그는 눈빛으로 디하트를 난도질했다.
하지만 디하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솜씨 좋게 생선 살을 발라낸 그는 세벨리아의 접시와 제 것을 바꾸며 태연스레 말했다.
“마음껏 들어요, 벨라. 향신료가 마음에 든다면 돌아가는 길에 영주에게 말해 인버네스와 거래를 트자고 제안해 보죠.”
“내 말은 들리지도 않나 보군.”
발라크가 이를 갈며 말했고, 겨우 웃음기를 떨쳐 낸 세벨리아는 그의 손등을 토닥였다.
“걱정 말아요, 오라버니. 다른 건 몰라도 매운 걸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지지 않으니까.”
“정말이니?”
놀란 기색을 보이는 남자를 보며 세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디하트는 성의 없는 손놀림으로 제 몫의 생선을 대충 분해했다.
“그렇구나, 그랬어.”
그리고 상황을 알게 된 발라크는 어째선지 무척이나 기쁜 모습이었다. 세벨리아는 자신이 매운 음식을 잘 먹는 게 왜 그를 기분 좋게 하는지 잘 이해 가지 않았으나 그러려니 했다.
발라크는 자신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인사를 건네기만 해도 감격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었으니까.
“잘 먹는다면 굳이 다시 요리를 만들 필요는 없지, 그렇고말고.”
이유 모를 흐뭇함을 물씬 풍기며 발라크는 혼잣말했다. 디하트는 그 모습에 돌연 소름이 끼쳐 눈살을 찌푸렸으나 발라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영주와 이야기할 때 나와 동행하지. 그렇지 않아도 만나야 할 일이 있거든.”
심지어 디하트에게 먼저 제의까지 하는 게 아닌가. 디하트는 어처구니가 없었으나 세벨리아를 위한 일이기에 말없이 고개만 까딱였다.
“그럼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거죠?”
세벨리아의 산뜻한 물음과 재개된 식사는 별 탈 없이 끝났다.
마지막으로 소화도 할 겸 짧은 산책을 마치고 마차로 돌아온 세벨리아는 발라크의 손에 이끌려 성벽 위로 올라갔다. 때마침 디하트는 출국 준비로 자리를 비운 터라 그를 제지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긴 갑자기 왜요?”
“저길 보렴.”
손끝이 향한 곳엔 너른 황무지뿐이었다. 영문을 알 수 없어 눈을 깜빡이기를 잠깐, 세벨리아는 곧 황무지 끄트머리에 무언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몸집을 부풀린 파도처럼 지평선 끄트머리를 감싸고 있는 건 희푸른 수목의 향연이었다.
“아.”
탄성을 내뱉는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감겼다.
“서리숲이란다. 그리고 저 너머에 러크우드가 있지.”
세벨리아는 성벽 끄트머리를 붙잡고 몸을 내밀었다. 바람에 물결치듯 움직이는 수목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 마음에 저도 모르게 몸을 기울이는데 아래서 목소리가 들렸다.
“벨라!”
메마른 공기를 뚫고 올라온 목소리는 선명했다. 시선을 내리자 디하트가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몸을 내밀면 위험하잖아요. 빨리 내려와요.”
타박하면서도 그는 팔을 넓게 펼치고 있었다. 마치 세벨리아가 떨어지면 자신이 받아 내려는 것처럼.
그 모습에 세벨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단박에 몸을 돌려 성벽을 내려갔다. 등 뒤로 발라크가 혀 차는 소리가 따라붙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계단을 내려가자 디하트가 기다렸다는 듯 다가왔다.
바로 몸을 감싸는 단단한 팔에 세벨리아는 그를 마주 안아 주었다.
“그냥 잠깐 구경한 거예요.”
“알아요.”
하지만 알아도 두려운 것이 있기 마련이다. 디하트는 약한 소리는 마음에 묻어 두고 대신 세벨리아를 힘껏 껴안았다. 그러자 마음속 부서져 내린 부분이 꽉 채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벨라.”
“응?”
고개를 숙인 디하트가 투정 부리듯 그녀의 뺨에 입 맞추며 속삭였다.
“높은 곳이 좋다면 같이 올라가요.”
“…….”
“나 혼자 내버려 두지 말고.”
세벨리아의 작은 웃음소리가 꽃처럼 터져 나와 귓가를 간지럽혔다. 뒤로 둘러진 그녀의 손이 부드럽게 등을 쓰다듬었다.
“당신도 참 외로움을 많이 타네요.”
“알면서 내버려 두지 말아요.”
“알았어요. 앞으론 안 그럴게요.”
싱거운 약속에도 디하트는 그저 기뻤다. 이윽고 발라크가 내려와 시간을 확인하더니 떠나도 될 것 같다며 말을 붙여 왔다.
“이제 슬슬 출발해도 될 것 같아. 날이 저물기 전에 도착해야 저쪽에서도 편할 테고.”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두 사람을 떼어 놓으려는 시도는 당연히 무산되었다.
“아, 지금 출발하는 거예요?”
디하트의 품에 안긴 채, 세벨리아가 눈을 빛냈다. 그렇지 않아도 저녁 늦게 출발할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지금 출발한다면 마차 안에서 서리숲을 구경할 수 있을 테지.
언제 다시 러크우드를 방문하게 될지 모르는 일이니 가능한 볼 수 있는 건 모두 보고 싶었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발라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라도 지체했다간 큰일 나겠군. 어서 타렴. 아, 비좁더라도 양해해 주길 바라네, 공작. 내가 함께 타고 있어야 그대의 신원을 보증해 줄 수 있거든.”
“언제는 내가 당신을 마차에서 쫓아내기라도 한 줄 알겠습니다.”
“꼭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걸?”
끝까지 티격태격하는 두 남자를 두고 세벨리아가 먼저 마차에 올랐다. 일레이의 도움을 받아서였다.
“얼른 안 타요?”
아연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세벨리아가 선언하듯 말했다.
“다투는 건 마차 안에서 해요.”
“나는 평화주의자예요, 벨라. 물론 저쪽이 먼저 시비를 걸기 전까지만.”
“공작, 나는 자네에게 시비 건 적 없어. 자네의 얄팍한 심사가 제멋대로 뒤틀린 거지.”
끝까지 투덜거리면서도 두 남자는 마차가 서리숲에 닿자 있는 힘껏 성질을 죽였다.
“와……!”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들뜬 탓이었다.
그렇게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움직여 숲을 가로질렀다. 덕분에 세벨리아는 서리숲의 경치와 그곳의 식물들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고, 저 멀리 그림자 진 곳에서 풀을 뜯는 야생마들의 갈기에 깃든 부드러운 빛깔을 한껏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예정대로 러크우드에 발을 들였을 때,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푸릇한 공기의 낯선 도시. 태양의 광명으로 가득한 제국과 달리 달빛을 고아 만든 듯 색이 옅은 건물들을 지나 창백한 돌길을 따라가니 그 끝엔 고색창연한 저택이 세워져 있었다.
언덕 위를 장식한 붉은 꽃처럼 넓게 펼쳐진 저택과 그 뒤로 보이는 서리숲 가장자리. 동화 속 풍경처럼 아름다운 장소에 발 디딘 그녀를 향해 누군가 다가왔다.
“벨라.”
벅차오른 음성과 함께, 로스엘이 그녀를 꽉 껴안았다.
“다녀왔구나.”
세벨리아는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서리숲을 지나 본 풍경은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들투성이였다. 옅은 색감의 지붕들과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길목들은 이곳이 그녀에게 낯선 곳이라는 감상만을 부추겼다.
로스엘의 뒤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신과 다른, 그러나 언뜻 비슷한 구석이 느껴지는 그들의 이목구비는 생경하면서도 친숙해 어딘지 모를 이질감이 들었다.
“어서 오렴. 벨라.”
하지만 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렇게 마음이 놓이는 걸까.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 온 것처럼.’
말로 다 전하지 못하는 감정이 맞닿은 가슴을 통해 울려 왔다. 돌아와서 기쁘구나, 하는 로스엘의 속삭임이 귓가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조용히 약동하던 심장이 터질 듯 쿵쾅댔다. 세벨리아는 돌연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눈가가 시큰해졌다. 혹여라도 놓칠세라 자신을 꼭 껴안은 품 안에서 그녀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뜨거운 숨과 함께 떨리는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