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6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68)화(168/171)
외전 2-5
“정말 상대하기 벅찬 남자라니까.”
“죄송해요.”
웃음을 삼킨 세벨리아가 말하자 발라크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사과할 게 뭐 있다고. 자, 여기가 네 방이란다.”
겨우 떨리는 어깨를 진정시킨 세벨리아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와아.”
자연스레 탄성이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방이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한 걸 싫어하는 그녀의 성정을 고려했는지 전체적인 색감은 차분했고, 가구의 자재나 장식품 등을 최고급으로 구비해 놓아 고급스러움을 유지했다.
“설렁줄을 당기면 하녀들이 언제든 올 거란다. 그렇지 않더라도 새벽마다 복도를 순찰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필요한 걸 말해도 좋고.”
“기억해 둘게요.”
세벨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벨크람과 다른 방의 양식이나 구조를 찬찬히 살펴보는데, 발라크가 머뭇거리며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발라크?”
왜 그런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그가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지나가듯 이야기했다.
“새벽 다섯 시를 넘기면 순찰 교대 시간이니, 그때 복도를 지나가면 들키지 않을지도 모른단다.”
“네?”
“그러니까…. 하아. 어차피 이곳은 네 집이니, 좋을 대로 지내도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나도 괜히 심술을 부렸다는 건 자각하고 있고.”
복잡한 얼굴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를 바라보던 세벨리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요컨대, 디하트의 방을 몰래 찾아가고 싶다면 그때를 틈타라는 이야기였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참았던 웃음이 다시 번져 나왔다. 그냥 지나가듯 던진 농담이었을 뿐인데, 저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줄 몰랐다. 단순한 농담이었다며 설명하는 세벨리아의 말에 발라크의 목덜미가 익어 갔다.
“크흠, 흠!”
“그래도 조언은 고마워요, 오라버니. 밤중에 갑자기 산책이 하고 싶을 땐 그 시간대를 노려 볼게요.”
“으흠!”
얼굴을 조금 붉힌 채로 발라크는 마지막까지 세벨리아의 편의를 위해 방 이곳저곳을 살피다 떠났다. 세벨리아는 미소로 그를 배웅했다.
“다들 배려가 과하다니까.”
문을 닫고 뒤돌아서면서도 어째선지 둥실둥실 들뜬 기분이 계속되었다. 침대에 누우면서도 가슴이 콩닥거려, 세벨리아는 난감하게 웃었다.
과거에는 절대로 꿈꾸지 못했을 나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보내는 행복한 시간이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닿았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자.’
재빨리 털어 버리려 했으나, 이미 시작된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이어져 나갔다. 상냥함의 화신 같은 로스엘과 언행이 조금 거칠 뿐, 더없이 자신을 사랑하는 발라크.
가족에게서도 받아 보지 못한 관심과 애정을 주는 사촌 형제들. 그들을 떠올리자 갑자기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하아.”
갑자기 더워져 세벨리아는 침대를 박차고 나와 창가로 다가갔다. 천천히 걸어가는 발걸음 사이사이로 상념이 피어올랐다.
그들이 제게 보여 주는 애정은 어디서도 보지 못할 종류였다. 처음엔 사촌 형제들이란 다 이런가 싶었지만, 일레이와 라이언의 경우를 보며 깨달았다.
자신을 향한 그들의 태도는 일반적인 사촌 형제들과 많이 달랐다. 그들은 제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동시에 모든 걸 내어주고 싶어 했다.
무조건적이며 깊이를 따질 수 없는 애정.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싶다가도 가끔씩 그들이 보낸 편지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다.
하지만 보통의 혈육과는 다른 그 깊고도 진한 애정에는 슬픈 이유가 있다는 걸, 세벨리아는 기억하고 있었다.
‘날 지켜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겠지.’
발라크와 로스엘 형제를 부모 대신 사랑해 주고 아껴 줬던 어머니, 그리고 그 사랑에 대한 보답으로 자신을 지켜 주겠다 맹세했던 어린 날의 두 사람.
하지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외삼촌은 어머니가 자신을 낳자마자 부하에게 갓난아기를 죽이라 명령했고,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를 자신이 없던 부하는 어린 자신을 아버지의 집 앞에 유기했다.
“…….”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행복감에 덩달아 오른 혈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세벨리아는 서늘한 얼굴이 되어 창턱에 손을 짚고 하늘을 응시했다. 짙은 먹색으로 칠해진 밤하늘 위로 그녀의 얼굴이 창문에 비쳐 보였다.
그녀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마주하듯이.
깊게 쌍꺼풀 진 눈에 나비 날개처럼 길고 풍성한 속눈썹, 그 아래 감춰진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당신과 이렇게 시선을 마주칠 날은 없겠죠.’
초상화 속 그녀의 눈동자는 자신처럼 푸르렀으나 지금에 와서는 알 길이 없었다. 원체도 몸이 약했던 그녀는 아버지에 의해 습격을 받고 고국으로 돌아온 뒤 자신을 낳고 그대로 정신을 잃었으니까.
“하아.”
한숨과 함께 세벨리아는 창가에서 몸을 떼어 냈다. 틈을 타고 기어들어 온 밤공기가 몸을 차갑게 만들었다.
침대 속으로 다시 파고들며, 세벨리아는 생각했다.
‘이곳 어디엔가 어머니가 있겠지.’
발라크는 그날 어머니에 대한 진실을 알려 주며 그녀가 아직도 애쉬렌트에 머물고 있다고 말했었다.
그 생각을 떠올리자 누군가 가슴을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뜨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세벨리아는 두 눈을 꽉 감은 채로 베개를 꽉 껴안았다.
어머니.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 어머니, 자신을 빼앗긴 줄도 모르고 깊은 잠이 든 어머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어머니.
그녀는 지금 이 시간에도, 자신이 돌아온 이 순간에도 깊고도 푸른 눈을 무거운 눈꺼풀 속에 감춰 둔 채 고요한 숨을 내뱉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돌아온 걸 모른 채.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얼굴을 덮은 이불이 돌연 들썩거렸다. 베개를 그러쥔 손등 위로 힘줄이 돋았다. 감상적인 생각을 더 이상 이어 나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은 도리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격렬하게 불러일으켰다.
그녀가 이곳에 있는데, 만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
고개를 든 세벨리아가 이불을 젖히고 나왔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이 반짝였다.
분명 교대 시간은 새벽 다섯 시 넘어서라고 했을 테다.
달칵, 조심스럽게 문을 연 세벨리아가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움직였다. 발라크의 말대로 기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흐음.”
짧은 숨을 들이마시고, 그녀는 복도에 줄지어 있는 방을 하나둘씩 확인했다. 다행히도 잠긴 방은 없었으나, 어머니가 있는 방 또한 없었다.
세벨리아는 한숨과 함께 모퉁이 뒤에 숨었다.
‘여기엔 안 계시는구나.’
커다란 장식 곁에 기대앉은 세벨리아는 팔짱을 끼고 고심했다.
‘어머니는 어디 계실까.’
가만히 넋을 놓고 있기를 한참. 혈기 오른 머리가 가라앉자 그제야 자신이 너무 섣불렀다는 감상이 들었다.
“하아.”
슬슬 돌아갈까, 하며 손으로 바닥을 짚는데 머리 위로 가느다란 빛이 비쳤다. 동이 터 오는 시간이라 당연히 아침 햇빛이겠거니 하며 몸에 힘을 주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벨라.”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다고 하던가. 온몸의 털이 쭈뼛 돋은 채로 세벨리아가 눈을 들어 올렸다.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겨우 시선만 올리는 모습에 로스엘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진짜로 너일 줄은 몰랐는데.”
“로, 로스엘 오라버니.”
“바닥이 차다. 자, 일어나.”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세벨리아는 로스엘과 함께 복도를 걷고 있었다. 교대가 끝난 건지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나타나 목례했다.
깜짝 놀란 그녀는 앞서가는 로스엘의 팔을 붙들었다. 조금 전의 일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그, 그게 말이죠.”
팔을 붙잡힌 로스엘은 붙들린 곳을 빤히 바라보더니 그녀의 손을 떼어 내고는 그대로 팔짱을 꼈다. 어라? 하는 사이 두 사람은 팔짱을 낀 채로 세벨리아의 방으로 돌아왔다.
“저기…….”
당황 섞인 목소리로 부르니 로스엘이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대충 알 것 같으니 괜찮아.”
발라크가 넌지시 이야기해 줬다는 그의 말에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게 아닌데. 오해를 샀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으나 진실을 말하기엔 용기가 부족했다.
목에 뭔가가 걸린 듯 우물쭈물하는 사이 세벨리아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을 사이에 두고 로스엘이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자렴.”
딱히 할 말도 없어 고개를 끄덕이자 로스엘이 머리를 쓰다듬어 왔다. 어린애 같은 취급에 살짝 당황했으나 뿌리치기엔 너무 다정한 손길이었다.
“좋은 꿈 꾸고.”
어딘가 뿌듯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와 함께 로스엘이 팔을 물릴 무렵, 바닥에 무언가가 떨어진 듯 작은 소리가 났다. 시선을 내리자 하얀 약이 잔뜩 들어 있는 투명한 용기가 떨어져 있었다.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세벨리아는 별생각 없이 허리를 숙여 약병을 주웠다. 생김새가 어딘지 익숙해 살펴보는데 용기 겉면에 자그마한 라벨이 붙어 있었다.
그곳엔 엘레나 애쉬렌트라는 이름이 낯익은 글씨체로 적혀 있었다.
“엘레나, 에쉬렌트…….”
가벼운 마음으로 쓰여 있는 글자를 읽어 내린 세벨리아가 확 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곤란한 빛을 품고 있는 연하늘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