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6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69)화(169/171)
외전 2-6
서늘한 무언가가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분명 저택에 머무르는 다른 애쉬렌트는 없다 했었는데. 로스엘의 어머니 또한 어릴 때 돌아가셨고, 이런 약을 먹을 사람이 있을 리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눈앞이 하얗게 반짝였다.
진실을 깨닫기 무섭게, 그녀가 로스엘의 팔을 붙잡았다.
“어머니죠?”
세벨리아의 정직한 물음에 로스엘은 난감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가 뭐라 말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이는데 세벨리아의 침착한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정말로 어머니군요.”
팔을 붙잡은 손에 점점 힘이 가해졌다. 로스엘은 작은 한숨을 삼키며 세벨리아의 손을 제 손으로 감쌌다.
“진정하렴.”
나지막이 말하자, 세벨리아의 어깨가 들썩였다. 정제되지 않은 숨을 몇 번 내쉰 그녀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말을 내뱉었다.
“혹시나. 혹시나 제가 착각한 거라면 말해 주세요.”
세벨리아는 조용히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나지막한 목소리 대신 불안정한 침묵만이 두 사람 사이를 넘실거릴 뿐이었다.
이윽고 로스엘이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손으로 이마를 짚은 그가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모님께서는 한 달 전에 정신을 차리셨다.”
워츠와 클로드는 단순히 조사 겸 여행 차 러크우드에 온 게 아니었다. 그는 일찍이 러크우드가 아닌 타국 출신 의원에게 관심을 두고 있던 로스엘의 눈에 들어 엘레나 애쉬렌트의 진료 차 러크우드에 입국했다.
“네가 앓고 있던 가시나무 병과 벨크람의 황제까지 치료한 인재이니, 혹여나 도움이 될까 해 불렀지.”
폐쇄적인 러크우드 안에서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모조리 동원한 상태였다. 남은 건 러크우드 밖의, 새로운 시각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도움뿐.
그렇게 로스엘은 워츠에게 엘레나의 치료를 요청했고, 워츠와 클로드는 벨크람의 약재와 더불어 러크우드 각지를 돌아다니며 병에 대한 정보와 새 약재들을 그러모았다.
그렇게 몇 달이 흘러, 여러 사람의 노력이 모여 엘레나는 기적처럼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건, 고모님이 복용하시는 약이 얼마 남지 않아 방금 워츠 씨에게 받아 온 참이었다. 네게 들키고 싶지 않아 새벽을 골랐던 건데. 일이 이렇게 됐구나.”
“그런…….”
세벨리아의 얼굴이 기쁨과 충격으로 하얗게 질렸다. 어머니가 정신을 차린 건 다시 없을 행운이었다. 하지만, 왜 그 일을 자신에게 숨긴 걸까?
‘설마 나를 만나기 싫어서.’
안 좋은 생각이 습관처럼 떠오른 찰나였다.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은 걸 알아차린 로스엘이 그녀를 붙들고서 말했다.
“벨라, 고모님께서는 재활 중이시란다.”
“네?”
“너를…….”
하아, 한숨을 내뱉은 로스엘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입술을 깨물다 결국 진실을 토했다.
“너를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너에게 그분의 소식을 숨길 수밖에 없었어.”
멍하니 입을 벌리는 세벨리아를 보며 로스엘이 말을 이었다.
“네게 아픈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구나.”
귓가로 차분하게 떨어져 내리는 목소리는 마치 빗방울 같았다. 수면까지 차오른 호수에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
“어머니는 네게 의지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라, 네가 기댈 수 있는 굳센 사람이어야 하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더구나.”
그리하여 마침내 아슬아슬 한계까지 차오른 호수를 넘쳐흐르게 해 버리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가늘게 떨리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가냘프기 그지없는 몸을 받아 내며, 로스엘이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진작 말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품 안에서 헐떡이는 소리가 길게 이어지고, 잔잔히 떨리던 몸이 겨우 멈췄다.
“만나고 싶어요.”
“벨라, 그건.”
“만나게 해 주세요.”
또렷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굳센 의지가 담긴 목소리에 로스엘이 시선을 맞추자, 그녀가 다시 한번 제 의사를 표명했다.
“어머니가 어떤 모습이시든지 상관없어요.”
“…….”
“전 그분의 딸이고, 그분은 제 어머니니까.”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을 겨우 추스르며 세벨리아가 말을 이었다.
“아픈 모습을 보인다고 제가 기대지 않을 거라니. 그런 바보 같은 착각이 어디 있어요? 전 그렇게 어른스러운 사람이 아니에요.”
“그래?”
“네. 얼굴을 보자마자 투정 부릴 생각이에요.”
왜 더 일찍 일어나지 않았느냐고, 왜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냐고 따질 거라 말하자 로스엘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반응이 제 생각보다 유하자, 그녀는 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질릴 때까지 응석 부리고, 매일같이 기댈 테니까 만나게 해 주세요.”
새벽빛이 밝아 오는 복도 바닥에서, 푸른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그렇지 않으면 오라버니만 결혼식 초대장을 받지 못할 테니까, 잘 생각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살 떨릴 정도로 무서운 협박에 로스엘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너털웃음을 지은 그가 세벨리아를 붙잡아 일으켰다.
“알았으니 일단은 눈 좀 붙이렴.”
뚱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세벨리아의 눈매를 가볍게 쓸어내린 로스엘이 그녀를 침대까지 이끌었다.
“고모님이 아무리 열심히 재활을 하고 계신다 하더라도, 아침에는 약하시거든.”
“…….”
“정오는 지나야 만날 수 있으니 그렇게 노려봐도 소용없단다, 벨라.”
세벨리아는 그제야 퉁명스럽게 빛나는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조용히 이불 속에 자리 잡았다. 그 모습이 꼭 사춘기 나이대의 소녀 같아 로스엘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복도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도 그렇지만, 어쩐지 어릴 때 꿈꿨던 일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렇게 티격태격거리고 화해하고, 그렇게 지내고 싶었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너를 두고 그런 날을 꿈꿨었어. 로스엘은 머나먼 옛날 같기만 한 그때를 떠올리며 세벨리아의 이불을 좀 더 꼼꼼히 여몄다.
“내일 보자꾸나.”
이불 속에서 세벨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잘 자요, 오라버니.”
“그래, 너도.”
왠지 모르게 간지러운 마음이 되어 로스엘은 방을 나섰다. 이제 자신도 슬슬 눈을 붙여야 할 것 같았다.
* * *
“또 딴생각.”
아침을 먹고 난 뒤, 세벨리아와 함께 정원을 거닐던 디하트가 돌연 불만스러운 얼굴로 내뱉었다. 그와 팔짱을 끼고 멍하니 걸음을 옮기던 세벨리아가 고개를 틀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디하트.”
“다른 생각 하느라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저기 가지치기하는 정원사가 뭐라고 한 것 같기는 한데.”
“보이지도 않는 사람 목소리를 어떻게 들어요?”
“나야 모르죠. 곁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못 듣는 사람이 멀리 있는 사람 목소리는 귀신같이 알아차릴지도 모르고.”
“아이참!”
“그렇게 예쁘게 노려봐도 난 모릅니다. 약혼자를 방치하는 사람에게 해 줄 말은 없다고요.”
디하트는 일부러 그녀와 시선을 맞추지 않고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세벨리아가 팔짱 낀 팔에 몸을 기대 왔다.
“미안해요, 화났어요?”
“…….”
“일부러 내버려 둔 거 아니에요.”
“흠.”
“정말인데.”
손을 뻗어 디하트의 뺨을 감싸자 그제야 그가 눈을 맞춰 왔다. 햇빛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자꾸만 방치해 두고, 같이 산책 나가자고 해 놓고선 다른 생각만 하고. 난 이제 잡은 물고기 취급입니까?”
타박하는 목소리엔 옅은 서운함이 묻어 나왔다. 내리뜬 눈이 퍽 침울해 보였다. 세벨리아는 두 팔을 벌려 그를 앞에서 감싸 안았다.
“미안하다니까요, 정말로.”
“교활해라.”
“내가요?”
“이러면 내가 아무 말 못 할 거 알고 이러는 거잖아요.”
디하트는 퉁명스레 말하면서도 기쁜 내색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마주 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세벨리아가 작게 키득거렸다.
“그래서 뭐라고 했는지 말 안 해 줄 거예요?”
“알면서 일부러 묻는 거죠?”
“음, 반쯤은?”
칭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평소보다 붕 떠 있었다. 예상보다 더 흥분한 그녀의 모습에 디하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 무슨 일 있던 겁니까?”
나지막한 목소리 밑엔 습관적인 걱정이 깔려 있었다. 세벨리아는 가만히 숨을 내쉬다 발꿈치를 들어 올려 그의 어깨에 턱을 갖다 댔다.
“있잖아요.”
“네.”
조심스레 말문을 연 그녀의 등을 디하트가 가만히 쓸어내렸다. 마치 겁먹은 어린아이를 토닥이는 듯한 손길이었다.
용기를 북돋워 주는 따스함에 세벨리아는 그를 껴안은 팔에 힘을 주고선 빠르게 속삭였다.
“어머니가 깨어나셨대요.”
등을 쓰다듬던 팔이 멀어지고, 디하트가 고개를 뒤로 뺐다. 놀란 듯 커다래진 금빛 눈동자에 세벨리아가 웃어 보였다.
“이따가 만날 거예요.”
“잘됐어요. 정말로.”
떨리는 숨결과 함께 내뱉은 디하트가 다시 그녀를 바짝 안았다. 발꿈치를 들어 올린 탓에 심장의 위치가 맞닿았다. 쿵쾅거리는 소리는 자신만큼이나 시끄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두 사람은 쑥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응시하다 다시 사이좋게 손을 잡고 후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잠시 뒤, 세벨리아를 찾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