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7)화(17/171)
‘언제부터였을까.’
디하트는 턱에 손을 괴고 맞은편에 기절한 채 앉아 있는 라쉬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세벨리아를 제거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을까.’
빛 한 점 들지 않는 방 안에서 디하트는 내내 그 질문에 매달려 있었다. 갑자기 생긴 계획은 아니겠지. 디하트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입술을 짓씹었다.
그래, 분명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일일 터였다. 왜냐하면…….
“얼른 일어나세요, 숙부님.”
디하트는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의자에 포박된 라쉬를 응시했다. 그의 등 뒤에서 감히 같잖은 수작질을 부린 그의 가족을.
“이리도 완벽한 상황, 최적의 시기라니. 누가 봐도 오랫동안 준비한 일이지.”
디하트의 금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저택에서 홀로 고립된 세벨리아의 처지, 갑자기 떠돌기 시작한 낭설. 결혼기념일에 맞춰 자신을 떠나게 만든 내부 사정까지.
“하.”
디하트는 짧게 웃었다. 그리고 조금씩 움찔거리기 시작하는 라쉬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라이언을 보낸 뒤, 디하트는 발버둥 치는 라쉬를 기절시켜 바로 이곳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모든 문을 걸어 잠그고 창문에는 두꺼운 커튼을 내렸다.
이 안에서 그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알 수 없도록. 그렇게 디하트는 사냥감이 움직이길 기다리는 맹수처럼 라쉬가 깨어나길 기다렸다.
새벽이 지나 태양이 몸을 일으켰다. 어느 순간 라쉬의 몸이 거칠게 요동치더니 곧 그의 눈이 갑작스레 열렸다.
“……!”
그러나 라쉬의 눈에는 오직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디, 디하트. 디하트?”
가라앉은 목소리로 라쉬는 재차 디하트를 불렀다. 디하트는 눈을 감은 채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감상하다 눈꺼풀을 열었다.
“숙부님.”
동굴을 울리는 듯한 저음에 라쉬의 어깨가 굳었다.
“내가 다 설명할 수 있단다.”
그는 제 앞의 사내가 더 이상 만만한 조카가 아님을 깨달았다. 가족이라는 정에,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라는 그림자에 기대어 제게 매달리는 불안한 아이가 아님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러나 동시에 라쉬는 그가 인버네스를 중요하게 여기리라 끝까지 믿었다.
세벨리아라는 중앙 출신 사생아보다 가문을 더 위하리라는 마지막 신념. 그게 라쉬의 입을 열게 만들었다.
“……너도 알아차렸다시피 나와 그렌은 일찌감치 이 결혼을 반대했었지.”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점점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마침내 라쉬가 메마른 기침을 토해 내며 이야기의 끝을 알렸을 때.
콰앙-!
충격에 흔들리는 커튼 사이로 들어온 눈부신 빛이 어둠을 갈랐다.
“두 분이 저지른 짓이 무슨 의미인지 지금 아시는 겁니까.”
어둠 속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의 등이 차디찬 빛에 딱딱하게 굳었다.
“감히 그녀를 속이는 거로도 모자라 나를……!”
“디하트,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에게 내 부모님을 죽인 자를 도우라 말한 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디하트의 두 눈이 새하얗게 불타올랐다. 굉음이 지축을 울렸다. 그날 마을 사람들은 수십, 수백 개의 벼락이 땅을 때리는 광경에 숨죽여 몸을 떨었다.
* * *
정신을 차리고 나니 길 위였다.
“아.”
디하트는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느새 쏟아진 빗줄기가 그의 몸을 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타고 온 말을 나무에 묶어 두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빌어먹을.”
디하트는 방금 전까지의 상황을 기억하려 애썼다. 마구간에서 말을 데리고 도시 밖으로 뛰쳐나온 것까지는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 이전의 기억은….
“…….”
디하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마치 목이 졸린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충격에 잠겨 있던 기억이 다시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그렌이 그 아이를 설득했다. 그렇게 하면 네 환심을 살 수 있다고 했지.]숙부 부부는 가문을 위해서라는 그들의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세벨리아를 이용했다.
[원래 내쳐졌어야 할 아이를 네가 억지를 부려 안고 갔으니, 우리는 가문을 위해 최선의 행동을 한 것뿐이다!]자신이 분노할 걸 알면서, 상처받을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그들은 일부러 그녀에게 동부의 피해 지역을 도우라고 부추겼다.
“내가 그녀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만들기 위해서겠지.”
디하트는 욱신거리는 눈을 가리며 텅 빈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들의 예상대로 자신은 세벨리아를 밀어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의 난 거의 이성을 잃은 지경이었으니….”
귀부인들의 구제사업은 보통 피해주민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는다.
그들은 간단한 파티나 야유회를 열어 후원회를 조직하고 그 기금을 피해지역의 영주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세벨리아가 접촉하려던 자는 바로 칼레 대공이었다.
그의 부모를 살해했다고 여겨지는 막내 삼촌의 주요 공범 중 한 명이자, 사고 장소 수색을 거절한 인물.
‘내 부모를 죽인 이를 돕겠답시고 돈을 퍼 주려는 아내를 누가 고운 눈으로 볼 수 있을까.’
심지어 그녀는 이미 제 기대를 배신한 전적이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분명 주제 파악을 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그래서 자신은 더욱더 날카롭고 야멸차게 그녀를 대했다. 아직 마르지 못한 물방울이 그의 턱 밑으로 뚝뚝 흘러내렸다.
“하…….”
디하트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비바람이 그의 등을 때렸다.
[첫 번째는 실수였다 치고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은 도저히 넘어갈 수 없군요.]그때 그녀의 표정이 어떠했던가. 자신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렇게 흥청망청 줏대 없이 돈 낭비를 하고 싶은 거라면 그대가 먹고 마시며 쓰는 돈에서 충당하도록 하세요.]“그래, 그때부터였지.”
세벨리아는 그 후로 공작부인의 방에서 나가 제 발로 그 빌어먹을 골방에 틀어박혔다.
[제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겠어요.]제가 공작부인을 홀대한다는 소문을 내고 싶은 거냐며 빈정거리는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면서.
콰광!
거대한 벼락 하나가 맞은편에 서 있던 나무에 내리꽂혔다.
“…….”
디하트는 어둑해진 금빛 눈동자를 들어 검게 타들어 가는 나무를 응시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었다.
“하하…….”
그래, 다 알고서 그녀를 꼬드겼다 이 말이지.
바보같이 순진한 세벨리아는 내게 속죄하기 위해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고.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심하다는 말도 아까웠다.
“정말 멋진 가족이로군. 이보다 더 근사할 수가 없어.”
잔뜩 비틀린 말을 내뱉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디하트는 흐린 눈으로 점점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을 꿰뚫고 내려온 햇살이 부드럽게 땅을 적셨다. 그 찬란한 광경 앞에 그의 불행은 더욱 뚜렷한 형체를 그렸다.
“공작님!”
그 순간, 저 멀리서 간절한 부름이 들렸다. 디하트가 무거운 감정에 얼룩진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그림자 속에 묻혀 있던 금안이 점점 커졌다.
“……라이언.”
힘겹게 말을 몰고 오는 그는 피투성이였다. 심지어 아직도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곳이 있었다. 결국 디하트가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라이언은 말 위에서 혼절하고 말았다.
“제길!”
디하트는 곧장 달려 나가 땅 위로 떨어져 내리는 그를 받아 들었다. 어느새 먹구름이 완전히 걷혀 있었다.
* * *
“으윽…….”
“응급처치는 끝났는데…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군.”
디하트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누워 있는 라이언을 보며 눈살을 구겼다.
“체온이….”
혈색을 잃어버린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디하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비가 그친 지 얼마 되지 않은 터라 공기가 많이 차가웠다. 그는 제 분풀이 겸 벼락에 희생당한 나무로 다가가 멀쩡한 나뭇가지를 줍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라이언은 출혈과 고열로 인한 악몽 속을 헤매고 있었다. 시작은 그가 플로라와 맞닥뜨린 순간부터였다.
“거기 서! 너는 당장 연락을 넣어서 문을 봉쇄하라고 해!”
기사들을 겨우 따돌리고 도망치는 그의 뒤로 플로라가 소리 질렀다.
어찌나 분에 차 있던지, 다시 떠올려도 뒷목이 쭈뼛할 정도로 섬뜩한 목소리였다.
“이대로 돌파해야 해.”
우편국에 들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라이언은 그대로 고삐를 잡아 쥐고 저택을 뛰쳐나갔다. 그렇게 그는 상처를 치료하지도 못한 채 디하트와 헤어졌던 교역 도시로 향했다. 문제는 라이언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그곳에 디하트가 없었다는 점이지만.
“……젠장!”
어찌된 일인지 방 안은 온통 검게 그을려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탄 내가 가득한 방 한가운데는 라쉬가 정신을 잃은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이를 악문 라이언은 일단 라쉬를 포박하고 지하실에 그를 가두었다. 그리고 그가 저택의 문을 나서기도 전에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벼락이 내리쳤다.
콰앙-!
그건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디하트를 보필한 라이언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 벼락이 내리친 곳으로 향했고, 디하트를 만날 수 있었다.
그가 그렇게까지 한 이유는 당연히 하나뿐이었다. 바로 디하트에게 세벨리아의 죽음을…….
“허억.”
그 순간,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라이언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그의 시야에 반쯤 불탄 나뭇가지를 들고 그를 향해 걸어오는 디하트가 보였다.
“아…….”
“한심한 꼴을 하고 있군, 라이언.”
자신 못지않게 황폐한 얼굴을 한 주제에 피식 웃는 주인을 바라보며 라이언은 손끝을 말아 쥐었다.
‘젠장.’
그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그리고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설마 내상이라도 입었나?”
디하트가 가까이 다가오는 걸 느끼면서도 라이언은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의 외투 안쪽, 얇은 종이에 적힌 단 두 줄의 문장.
오직 그걸 전하기 위해 왔으면서, 막상 디하트를 앞에 두자 라이언은 우습게도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공작님.”
그러나 떨리는 손끝은 기어코 그 얇은 종잇장을 끄집어냈고.
“어서 돌아가십시오.”
디하트는 결국 그 끔찍한 비보를 받아 들고야 말았다.
밝은 대낮, 먹구름이 모두 걷힌 화창한 오후.
갑자기 내리친 수백 수천 개의 벼락이 도시 인근의 숲을 모조리 태워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