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7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70)화(170/171)
외전 2-7
“벨라. 여기 있었구나.”
살짝 긴장한 얼굴의 발라크가 그녀를 데리러 왔다.
“공작도 함께 계셨군요.”
“당연한 말씀을.”
디하트의 말에 발라크는 눈썹을 움찔했으나 평소처럼 맞받아치지는 않았다. 디하트도 거기서 더 발라크를 자극하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세벨리아가 긴장한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럼 잘 다녀와요.”
하얗게 질린 세벨리아의 손끝에 입 맞춘 디하트가 그녀를 발라크에게 인도했다.
“이따, 봐요.”
세벨리아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겨우 움직여 디하트에게 인사했다. 삐거덕거리는 목이나, 데굴데굴 구르는 눈동자나 여러모로 바짝 긴장한 게 보였다.
그 모습을 잠시간 바라보고 있던 디하트는 돌연 손을 들어 올렸다.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그가 세벨리아의 뺨을 슬쩍 매만졌다.
“아!”
“이제 좀 평소 같네. 어서 가 봐요.”
웃음기 서린 목소리가 귓가로 떨어져 내렸다. 세벨리아는 간지러운 느낌에 귓불을 매만지다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올게요.”
놀란 탓일까, 창백했던 얼굴에 혈기가 돌자 아까보다 훨씬 보기 좋았다. 디하트의 장난에 긴장이 풀린 그녀는 생기 어린 눈으로 인사를 고했다. 디하트는 그녀를 기꺼이 보내 주었다.
세벨리아는 발라크와 함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가는 길이 익숙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어제 보았던 별채로 향하는 산책로였다.
곧 회색 벽돌에 푸른 지붕을 가진 건물이 나타났다. 어제와 달리 유독 뚜렷하게 느껴지는 존재감에 세벨리아가 침을 삼켰다.
문 앞까지 도달하자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전을 거세게 때렸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가운데, 발라크가 손을 들어 문을 노크했다.
안에서 로스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구나.”
열린 문틈 사이, 로스엘의 뒤편으로 화사한 색감의 복도가 보였다. 안쪽에서부터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에 세벨리아는 그대로 정신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들어오렴. 아까 전부터 널 기다리고 계셨단다.”
끼이익, 문이 완전히 열리고 로스엘이 그녀를 이끌었다.
할 일이 있다며 떠난 발라크를 뒤로하고 두 사람은 문턱이 없는 응접실과 무거운 문을 떼어 낸 정찬실을 지나 자그마한 정원과 맞닿아 있는 침실 앞에 섰다. 그때쯤 세벨리아는 하늘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정신 끄트머리를 겨우 붙잡은 상태였다.
똑똑, 로스엘이 문을 두드렸다. 숨이 멎을 만큼 짧은 공백 뒤, 안쪽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
머리보다 먼저 심장이 움직였다. 벌컥 열어젖힌 문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빛보다 아름다운 광경 속에서 세벨리아는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엘레나는 두 팔을 벌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어머니.”
저도 모르게 내뱉은 부름에 그녀가 미소로 응답했다. 아주 짧은 순간, 세벨리아는 어린 날 꿈꾸었던 환상 속에 있는 기분이었다.
“이리 오렴.”
호수 같은 눈동자는 수십 년이 지났음에도 총기로 반짝였다. 미소를 머금은 입술은 건강 탓인지 조금 창백했으나 두 뺨은 기쁨으로 빛났다.
세벨리아는 조금씩 그녀에게 다가갔다. 똑 닮은 두 쌍의 눈동자가 서로를 쉴 새 없이 훑었다.
마른 팔다리와 아직 지우지 못한 병색. 세월의 흐름을 피하지 못해 조금은 주름진 눈가와 입매.
어린 시절 꿈꾸던 어머니의 모습과는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젊고 아름답고 완벽한 어머니라는 이상향과는 한참이나 먼 모습이었다.
하지만 세벨리아는 그 모습에 실망은커녕 벅차오를 뿐이었다.
“어머, 니.”
“그래.”
“어머니…….”
자신을 향해 뻗어진 팔에 안기며, 세벨리아는 전율했다. 그녀의 등 뒤로 가벼운 무게가 실렸다. 엘레나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안녕, 아가. 엄마가 널 정말 오래 기다렸단다.”
꼭 안긴 세벨리아를 품 안에 넣고 아이처럼 어르며 그녀가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말 예쁘구나. 내 딸 이렇게 예뻐서 어쩜 좋니. 성인식 때 예쁜 드레스를 맞춰 주려고 했었는데. 발라크와 로스엘은 자기가 너와 첫 춤을 출 거라며 싸웠었어.”
“…….”
“얼굴 좀 보자꾸나, 응? 눈동자가 바다처럼 푸르구나. 머리카락은 꼭 엄마를 닮았네. 이렇게 키가 클 줄은 몰랐는데, 일어나면 엄마보다 더 크겠다. 그치?”
갓 태어난 아이처럼 우는 세벨리아를 연신 쓰다듬으며, 엘레나가 미소 지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단다.”
가슴속 어딘가가 부풀어 오르는 감각에 세벨리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영원히 해소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갈증이 조금씩 풀리는 감각. 필요 없다며 무시했던 공간이 점점 채워지는 느낌에 그녀는 어쩔 줄 몰랐다.
날 버린 어머니는 필요 없다며, 날 키워 준 유모 한 사람으로 충분하다며 굳세게 외면해 왔던 텅 빈 공간에 어디서 시작된 건지 모를 물줄기가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이내 끝없는 허무를 순식간에 채우고 경계 위로 넘쳤다.
속이 꽉 막히고 숨이 찼다. 무거운 무게에 숨결이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고 수면 아래를 헤맸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열병을 앓는 아이처럼 끙끙대는 그녀를 어르며 엘레나가 속삭였다.
“엄마라고 한 번 불러 주렴, 아가. 응?”
부드러운 간청에 세벨리아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목이 멘 탓에 처음 몇 번은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부모의 말을 따라 하는 아이처럼 엄마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다 끝내 성공했다.
“엄마, 엄마…. 엄마.”
나지막한 부름과 동시에 엘레나가 있는 힘껏 세벨리아를 끌어안았다. 아직 힘이 없어 겨우 단단히 둘러맨 정도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그래, 엄마 여기 있어.”
세벨리아는 눈을 꼭 감고 그녀를 마주 안았다. 아, 이거였다. 자신은 이 품을 원했다. 손을 뻗으면 언제든 마주 안아 주는 이 온기를, 애정을, 안정을 원했었다.
“사랑한단다, 내 딸. 엄마는 널 만나기 전부터 아주 오랫동안 널 그리워하고 사랑해 왔어.”
촉촉한 단비 같은 목소리가 세벨리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눈물로 넘쳐흘렀다.
“내 작은 태양, 모두에게 사랑받을 내 아이, 내 세벨리아.”
자장가 같은 목소리가 방 안을 넘실거리는 가운데, 로스엘은 천천히 문을 닫고 벽에 등을 기댔다.
두 사람에겐 나눠야 할 이야기가 많았다.
* * *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도록 세벨리아는 돌아오지 않았다. 디하트는 쓸쓸한 기분으로 저녁 식사를 끝내고 혼자 훌쩍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클로드가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현관을 지나 별채가 있다는 산책로를 걸었다. 들어갈 생각은 아니고, 그냥 소화 운동 겸 겸사겸사 주변을 둘러볼 셈이었다.
발 걸리는 곳 하나 없이 잘 정돈된 산책길은 곳곳에 등불이 밝혀져 있었다. 벨크람 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순도 높은 마력석 등불에 잠깐 옛 생각이 난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두 발은 거침없이 길을 따라 움직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둠 속에 파묻힌 희미한 외관의 별채가 보였다.
차가운 색감의 건물에선 믿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고 따스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창을 가리는 커튼만 아니었다면 안쪽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였다.
디하트는 가로수에 등을 기댄 채 창을 응시했다. 가끔씩 세벨리아로 보이는 그림자가 창문 앞을 가로지르곤 했다.
그때마다 디하트는 부푼 가슴을 꺼트리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만족할 만큼 시간을 보냈다 싶어, 그는 기댔던 몸을 바로 세웠다.
별채의 문이 열린 건 그때였다.
“…….”
“…….”
시선이 마주친 순간, 푸른 눈동자가 살포시 휘었다. 한 발짝, 그리고 또 한 발짝. 사뿐한 걸음걸이가 이어질 때마다 주변을 채운 어둠이 흩어지는 착각이 일었다.
“마중 나온 거예요?”
어서 잡아 달라는 듯 그녀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디하트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깨달은 듯 매끄러운 입꼬리를 휘어 웃고 하얀 손을 힘주어 맞잡았다.
“하도 안 오길래.”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왜 당신이 해요?”
깍지 낀 손을 흔들며 세벨리아가 되려 디하트를 탓했다. 돌연 난처한 입장에 놓인 디하트가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이게 내 탓이 된 겁니까?”
“일찍 일찍 데리러 왔어야죠. 청승맞게 그림자 속에 숨어서 그러고 있을 게 아니라.”
“아니…….”
뭐라 대꾸하려던 디하트는 이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내저었다. 살짝 들린 그의 입꼬리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내 잘못입니다.”
순순히 항복하는 그의 태도에 세벨리아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디하트는 가당찮다는 듯 눈매를 좁혔으나 입매에 매달린 웃음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그녀를 가로등 아래로 이끌며 짓궂게 말했다.
“일찍 와서 당신 눈에 얼음찜질이라도 해 줘야 했는데. 당신 눈이 이렇게 붕어처럼 퉁퉁 부은 걸 클로드가 보면 뭐라고 놀릴지 걱정되네요.”
“어? 그렇게 심해요?”
당혹스러운 얼굴로 세벨리아가 제 눈가를 더듬었다. 빨갛게 부푼 눈매에 손이 닿자 몹시 쓰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