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7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71)화(171/171)
외전 2-8
“아야.”
“쯧. 조심해요.”
세벨리아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 내리며 디하트가 그녀의 눈가를 꼼꼼히 살폈다. 그냥 스치기만 했을 뿐인지 더 부풀어 오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기왕 살피는 김에 디하트는 세벨리아의 얼굴 구석구석을 어디 상한 데 없나 확인했다. 너무 울어서 부은 눈 빼고는 다 괜찮았다. 혈색 좋은 두 뺨도, 장밋빛 입술도, 가을 하늘처럼 맑은 푸른 눈동자와 총명한 눈빛도 그대로였다.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빠져들 만큼.
호수 같은 눈동자에 매혹되어 저도 모르게 넋을 놓은 찰나, 세벨리아가 그의 소매를 힘주어 붙잡았다.
“있잖아요.”
“응, 말해요.”
겨우 정신을 차린 디하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 한 번만 불러 볼래요?”
디하트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으나 순순히 그녀의 요구에 따랐다.
“벨라.”
“아뇨, 그것 말고.”
“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이는 디하트를 보며 세벨리아가 다시 한번 말했다.
“내 원래 이름이요.”
“…….”
그제야 그녀의 말을 이해한 디하트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갑작스러운 걸 떠나, 그녀가 제정신으로는 요구할 리 없는 일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그냥 한 번만 불러 봐요.”
“벨라. 벨라 애쉬렌트.”
밤공기 위로 묵직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그것 말고…….”
세벨리아가 재차 요구하자 그가 느리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붙잡힌 팔을 빼내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일단 저택으로 돌아갑시다.”
“디하트, 잠깐만…….”
“가서 따뜻한 음료를 마시고, 푹 쉬었다가 다시 이야기해요.”
어머니와 만난 경험이 생각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죽음을 가장하면서까지 버린 이름을, 그 증오스러운 과거에 붙은 이름을 다시 불러 달라고 할 리 없으니.
디하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꼼짝도 하지 않는 세벨리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으앗!”
졸지에 공주님처럼 안긴 세벨리아는 작게 소리를 질렀다가 그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내려 줘요. 내리고 내 말부터 좀 들어 봐요!”
“아야. 아픕니다. 그러다 멍들면 누구 손해인지 생각해 봐요, 벨라.”
“맞기 싫으면 내려 줘요.”
디하트는 입술을 꾹 다물고 묵묵히 산책로를 따라 저택까지 걸었다. 세벨리아는 몇 번이고 탈출을 감행했으나 단단한 두 팔은 결코 그녀를 놓치지 않았다.
결국 저택에 다다라서야 그녀는 탈출을 포기했다. 작은 목소리가 디하트의 고막을 간지럽혔다.
“내 이름…….”
“그래요, 벨라.”
일부러 벨라라는 이름을 강조하며 디하트가 현관 계단에 발을 올렸을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지은 게 아니래요.”
“…….”
“집사나 하인이 지은 것도 아니래요. 날 버린 이모부나 그 부하가 지은 것도 아니었어요.”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감정으로 반질반질 윤이 나는 푸른 눈동자가 그를 집어삼킬 듯 반짝였다.
디하트는 천천히 계단 위에 올린 발을 거두며 저택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자박자박, 돌길을 걷는 소리가 밤공기를 울렸다.
정원 한편에 마련되어 있는 가제보에 이르러 디하트는 그녀를 의자 위에 조심스레 앉혔다. 그리고 그 곁에 앉아 그녀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뺨에 닿은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술렁이는 마음에 디하트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럼 누가 지어 준 이름입니까?”
조금 전까지 잘만 말하던 세벨리아는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말없이 더운 숨을 뱉더니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디하트의 손을 가져다 깍지 꼈다.
겹쳐진 손가락 사이로 쿵쿵 뛰는 그녀의 맥박이 느껴졌다.
세벨리아는 그대로 그의 손등에 글자를 새겼다.
엘레나.
“내 이름은 어머니가 준 거였어요.”
한숨처럼 덧붙인 말에 디하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두 눈을 깊게 감았다 뜬 그가 습관처럼 그녀를 껴안았다.
그러자 막혔던 둑이 터진 듯 세벨리아가 줄줄 말을 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와 아직 연인이었을 무렵, 여자아이를 가지면 세벨리아라 이름 붙일 거라고 이야기했었대요. 아들이라면 세르빌, 여자라면 세벨리아. 그리고 태어난 난 여자아이였고…….”
외삼촌의 부하에 의해 아버지에게 버려졌다. 그 말인즉슨.
세벨리아가 뒷말을 잇지 못하고 망설이자 디하트가 대신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해 주었다.
“그렇다면 웨든 후작은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거군요.”
“어머니를 위해서는 아니었을 거예요. 절대로.”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린 가운데, 그 말만은 너무나 명료히 튀어나왔다.
“아마 무의식적으로 붙인 거겠죠. 어머니와 있었던 일이 기억에 남아, 무심코 떠오른 이름을 제게 준 걸 거예요. 하지만…….”
그 이름은 어머니가 자신을 생각하며 지은 이름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세벨리아는 자신의 이름에 덕지덕지 붙은 끔찍한 과거와 증오스러운 기억이 깨끗이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날 학대하고 이용한 가족이 아니라, 사랑하고 아껴 주는 어머니가 준 이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러니 불러도 좋아요. 아니, 한 번 불러 봐요.”
“벨라.”
“못 부르는 척하지 말고요.”
몇 번이고 졸랐지만 디하트는 묵묵부답이었다. 재촉할수록 자신을 감싸 안은 팔에 힘만 잔뜩 들어가자 결국 세벨리아가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가끔씩 당신이 꿈속에서 내 예전 이름을 부르고는, 일어나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거 알고 있어요.”
“…….”
“밤마다 어딜 그렇게 가는지. 처음에는 또 밤놀이를 갔나 놀라서 일레이 경한테 달려갔던 거 알아요?”
“무슨.”
“내가 정말 한 번도 깨지 않고 아침까지 곤히 잘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죠?”
못 당하겠다는 듯 디하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안았던 팔을 풀고 자세를 바로 하자 세벨리아가 바로 덥석 그의 손을 잡았다.
“불러 봐요.”
“하지만, 너무 오래되었고.”
“내가 허락하잖아요.”
어둠 속에서 금빛 눈동자가 곤란한 듯 이리저리 움직였다. 죄책감과 슬픔, 그리고 떨칠 수 없는 그리움을 한데 가득 담은 눈동자는 그렇게 한참을 방황하다 결국 세벨리아에게 향했다.
“디하트.”
또렷하게 마주 봐 오는 푸른 눈동자가 호수처럼 넓고 푸르렀다. 어서 뛰어들라는 듯, 반짝이는 물결이 그를 재촉했다.
디하트는 겨우 용기를 내 바싹 마른 입 안을 적셨다. 그립고 애달픈 이름을 떠올리며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을 들어 올렸다.
꿈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면 언제나 되돌아왔던 경멸과 분노에 심장이 쿵 내려앉다가도, 눈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세벨리아를 보면 두려움이 달아났다.
그는 목에 힘을 주고 붙잡은 손을 강하게 쥐었다. 아직 단어가 되지 못한 숨이 잇새로 새어 나가고, 세벨리아의 입꼬리가 조금씩 올라갔다.
이내 둥글게 말려 있던 혀끝이 달음박질치듯 달려 나가 부드러운 소리를 만들어 냈다.
“세벨리아.”
그리고 경멸 대신 행복이 그에게 주어졌다.
“응.”
활짝 웃는 얼굴의 세벨리아가 그의 부름에 답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광경이리라 생각했던 풍경을 앞에 두고 디하트는 숨이 멎었다.
“세벨리아.”
“응, 디하트. 나 여기 있어요.”
멀리서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다. 가제보 곁에 선 가로등의 불빛이 발치를 비췄다.
어쩐지 현실감이 없어, 디하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입 맞춰 줘요.”
그러자 입술에 부드럽게 닿아 오는 감촉에 그는 숨을 집어삼켰다. 달콤한 향기와 부드러운 체온. 이성을 잃은 건 한순간이었다.
끈질기고 집요한 입맞춤이 서늘한 밤공기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시끄럽게 울던 풀벌레들이 제풀에 지쳐 조용해지고 나서야 세벨리아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아…. 이 이상은, 결혼식 뒤에. 알았죠?”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훔치는 디하트를 밀어내며 세벨리아가 말했다. 그는 눈매만큼이나 부풀어 오른 세벨리아의 입술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대로 세벨리아를 안아 올려 가제보를 나섰다.
“당신, 또……!”
“참고로 난 당신을 안은 채로도 입 맞출 수 있어요. 계단을 오르면서 하는 건 일도 아니지.”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세벨리아가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자, 디하트가 싱긋 웃었다.
“그래도 결혼식 때까지는 참을 테니, 이 정도 어리광은 예쁘게 봐 줘요.”
고개 숙인 그가 세벨리아의 이마에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응? 세벨리아.”
대답 대신 제 목에 둘러진 팔을 느끼며 디하트는 걸음을 옮겼다. 행복했다. 다시 없을 만큼 완벽했다. 제 품 안에서 평온한 얼굴로 미소 짓는 그녀의 존재가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디하트는 확신했다.
이제 더 이상 악몽 때문에 그녀의 곁을 비우는 날은 오지 않으리라고.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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