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1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19)화(19/171)
풀썩.
긴 머리카락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세상에, 진작 이럴 걸 그랬어.”
한결 가벼워진 어깨에 세벨리아는 가뿐한 미소를 지었다.
“깔끔하네.”
머리를 한 번 털어낸 그녀가 바닥을 훑었다. 오랫동안 길러 온 머리카락들이 실타래마냥 늘어져 있었다. 새삼 세벨리아는 그게 자신에게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너무 많이 자르셨어요. 어깨 위까지 자르시다니 이건…….”
세벨리아는 실의에 빠져 있는 데니사를 뒤로 하고 빗자루를 들었다. 그녀에게 이 참혹한 광경을 곱씹을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머리카락은 시간을 먹고 자란다잖아.”
세벨리아가 머리카락을 쓰레기통에 털어 넣으며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과거를 버린 내게 고통으로 키워 낸 머리카락은 필요 없어.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 데니사.”
그녀는 진심이었다. 웨든에서의 기억도, 인버네스에서의 시간도 더 이상 그녀에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예전에도 한 번 자르려고 했잖아. 뭐, 사람들이 반대해서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때를 떠올리며 세벨리아는 쓰게 웃었다.
인버네스로 거취를 옮긴 뒤 세벨리아는 지금처럼 머리를 자르려고 했었다. 디하트의 그 말만 아니었어도, 분명 그러했을 것이다.
[북부는 당신 상상과는 다르게 갑자기 추워집니다.] [네?]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디하트는 진중한 눈빛이었다.
[북부인들에게 머리카락은 방한용이나 다름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묶고 다니면 목이 차가워지지 않습니까.]탐탁지 않은 눈빛으로 다가온 그는 직접 제 머리끈을 풀고선 살짝 빗어 넘겨주었다.
[그래요. 이쪽이 훨씬 안심되는군요.]웃음기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어느 순간 정신 차린 세벨리아는 제 귓가에 작은 핀이 하나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결국 그녀는 머리카락을 자르는 걸 포기했다.
‘그런 때가 있었지.’
세벨리아는 이제는 돌이킬 필요가 없게 된 추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예전에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디하트와 다시금 관계가 회복되기를 꿈꿨었다.
“하지만 이젠 아냐.”
과거의 세벨리아 인버네스는 죽었다.
이제 디하트와는 관계없는 새로운 삶을 살 차례였다. 그러니 그 시간을 먹고 자라난 머리카락을 짐처럼 달고 다닐 이유 따윈 없었다.
“에휴…….”
그래도 데니사는 아까운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하긴 이십여 년간 길러 온 머리를 단번에 자르는 게 보통 결심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겠지.’
세벨리아는 머리카락을 목숨만큼 아끼던 넬리아를 떠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버려 두면 길어지는 게 머리카락이잖아. 한숨은 그만 쉬고 염색하는 것 좀 도와줘.”
세벨리아가 어린아이처럼 데니사의 소매 끝을 붙들었다.
“어릴 때 데니사의 머리카락을 얼마나 부러워한 줄 알아? 나 같은 창백한 색과는 비교도 안 되게 예뻐 보였다고.”
세벨리아가 약품점에서 사 온 갈색 머리 염색약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말은 참 잘하시네요.”
“이제 공작부인도 아닌데, 말이라도 잘해야 데니사가 날 신경 써 주지.”
그녀의 구김살 없는 태도에 데니사는 하는 수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세벨리아는 데니사에게 머리를 맡기고 책장을 넘겼다. 뭐가 들었는지 모를 약품 냄새가 은은하게 코를 건드렸으나 크게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그녀를 가장 신경 쓰이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어느 순간 자신이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 읽고 있다는 걸 깨달은 세벨리아는 책을 덮고 데니사에게 물었다.
“아버지께서…… 장례식에 참석하셨다며.”
아주 짧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데니사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귀족이 아니기에 장례식장에 참석할 수 없었다. 그러나 떠나기 전 들은 이야기는 있었다.
“크게 상심한 얼굴이셨다고 들었어요. 물론…… 진심은 아니셨겠지만.”
“그래. 당연히 그러셨겠지.”
아버지가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셨다면 어떻게 감히 내 장례식에 얼굴을 내보이셨겠어.
“웃기네, 나, 새삼스럽게 기대라도 했었나 봐.”
세벨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차가워진 손끝을 문질렀다. 웨든 후작이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건 당연하다 못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네 어미가 너에게 그 더러운 피를 물려줬구나.] [한심한 것, 반쪽이나마 웨든의 피가 흐르기에 기대했건만.]그가 자신을 어떤 식으로 취급했든 대외적으로 웨든 후작은 사생아 출신 막내딸을 제법 아끼는 이미지였으니까.
[네가 보내는 편지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구나. 내가 널 이용해 북부의 정보를 빼돌렸다고? 어렸을 때부터 피해의식이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선을 넘는구나.]비록 그의 진짜 모습은 자식을 이용하고 그대로 후회 한 점 없이 비참하게 버리는 냉혹한 자였지만.
‘그래도 막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그게 구체적인 현실이 되는 건 많이 다른 느낌이구나.’
세벨리아는 눈에 띄게 가라앉은 제 상태를 깨닫곤 의자에 몸을 기댔다. 혹시라도 그가 제 죽음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을까, 아주 미약한 기대를 했었는데.
‘그럴 리 없지.’
가능하다면 그에게서 물려받은 이 피의 절반을 긁어내고 싶다고 생각하며 세벨리아는 눈을 감았다.
* * *
한편, 적지 않은 원망의 대상인 웨든 후작은 한가롭게 살롱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북부의 유명 인사가 개최한 파티로 사일러스는 이곳에 참석하기 위해 꽤 많은 양의 와인을 사들여야만 했다.
‘그래도 헛된 지출은 아니었군.’
그는 자리에 앉아 귓가로 흘러드는 이야기를 들으며 잔을 들어 올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인버네스의 이야기가 화제에 올랐다.
“아직도 벼락이 내리치고 있다죠?”
“역시 공작이 좀 이상해진 모양이에요. 그 왜 있잖아요, 종종 나타난다는 저주가…….”
살롱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귀족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앞다투어 이야기꽃을 피웠다.
가장 뜨거운 화젯거리는 단연 인버네스 가문에 관한 것이었다. 유령의 저주로 자살한 공작부인에 이어 피에 흐르는 저주가 깨어났다는 공작이라니. 나태한 귀족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사건의 연속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힐렌드 출신 하인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것 같더군요. 무서워서 더 이상 못 살겠다나 뭐라나.”
“세상에, 그렇다면 꽤나 믿을 만한 소문이네요.”
“무서워라, 사람을 하나둘씩 미치게 만드는 저주라니. 이러다 공작도 부인을 따라 자살하겠어요.”
작은 웃음소리가 터지고, 이야기를 듣던 사일러스의 입가에는 기묘한 미소가 번졌다.
‘자살이라.’
그 사생아가 과연 자살을 할 만한 아이던가.
사일러스는 그녀의 핏줄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천한 출신답게 삶에 대한 집착과 집요한 생명력을 가진 아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계집애가 능력을 깨우친 게 틀림없어.’
분을 이기지 못한 얼굴로 돌아와 제가 당한 일을 일러바치던 네이튼을 떠올리며 사일러스는 잔을 비웠다.
[그게 미친 게 틀림없습니다. 어디서 괴이한 짓을 배워 왔는지 거미를 부리고 있었어요!]사일러스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세벨리아를 확인했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미 장례식은 치러졌고, 세벨리아는 저 관 속에 있든가 아니면…….
“도망치고 있겠지.”
그는 세벨리아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런 식으로 제 뒤통수를 치고 달아났으니까.
“두 번은 당하지 않지.”
텅 빈 잔 위로 사내의 비열한 얼굴이 비쳤다.
* * *
거울 앞에 선 세벨리아는 짧아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겼다. 잘 익은 헤이즐넛처럼 짙은 갈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단발머리의 여인. 어딜 봐도 창백하고 기운 없는 세벨리아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음에 드네.”
세벨리아는 오랜만에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스스럼없이 미소 지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푸른 눈동자는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머리카락이라도 바꾸니 정말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겨우 머리카락 색만 바꿨을 뿐인데 정말 다른 분위기야.”
처음부터 이랬다면 사람들은 조금 더 날 좋아해 줬을까.
세벨리아는 무심코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나 바로 지워 냈다.
‘그럴 리 없지.’
웨든 후작가의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에 다시 없을 만큼 아름다웠더라도 무슨 이유를 대서라도 미워했을 것이다.
‘난 날 버린 어머니의 딸이니까.’
집안에서 인정받지 못한 사생아란 그런 것이었다.
“……됐어. 이제 모두 지난 일이야.”
결연한 표정을 지은 세벨리아가 외투를 걸쳐 입었다. 이제 단장도 모두 끝냈으니, 새 마을로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데니사, 짐은 다 챙겼어?”
데니사를 부르며 세벨리아는 가볍게 몸을 돌렸다. 열린 창틈으로 들어온 햇살이 복도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 뒤를 파랑새가 종종거리며 따랐다.
“이리 와.”
포르르 날아오른 작은 새가 그녀의 어깨 위에 앉았다.
기분 좋은 출발의 시간이었다.
* * *
장례식이 끝난 저택은 보통 침울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마련이었다.
떠나간 이를 추억하고, 차마 보내지 못한 기억들을 정리하며 다들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벌써 삼 대째 인버네스 가의 주치의를 맡아 온 로만은 있는 힘을 다해 목소리를 쥐어짰다.
“고, 공작님. 조금만 침착하시고 이성적으로…….”
“침착하고 이성적이게 대해 달라.”
로만의 멱살을 틀어쥔 디하트가 소름이 돋을 만큼 차분한 눈으로 그를 직시했다. 잘 갈아 낸 금괴처럼 표면이 반질거리는 눈동자는 그 자체로 섬뜩했다.
“그건 그대가 의원으로서 가져야 할 덕목이지. 감히 내게 들이댈 윤리가 아니지.”
“커, 커헉…….”
“그래서 그대는 의원으로서 지나치게 이성적이라 내 부인의 마지막도 제대로 보지 않고 하잘것없는 동네 의원에게 떠맡겼나?”
스산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로만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침을 삼켰다.
‘젠장, 젠장, 젠장!’
그는 두 눈을 꽉 감고 제 처지가 왜 이렇게 됐나 떠올렸다.
그건 저택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불려간 뒤에 생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