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화(2/171)
‘남은 시간은 6개월.’
스물일곱 해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세벨리아는 여행용 가방 안에 잘 개켜진 옷을 내려다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보란 듯이 침대 밑에 넣어 둔 가방. 그러나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어차피 공작가의 사용인들은 제 방을 청소하러 들어오기는커녕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없으니까.
‘내가 사라지고 한 달 정도 지나면 알아차릴까.’
한 공간 안에 있음에도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로 일관하는 인버네스의 사람들. 이곳에서 세벨리아는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게 바로 무관심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마치 자신의 남편처럼.
“하…….”
그녀가 가방을 닫고 다시 침대 밑으로 밀어 넣은 순간이었다.
똑똑.
낯선 두드림에 그녀는 놀라 신경을 곤두세웠다. 둥지를 습격당한 작은 새처럼 솜털이 삐쭉 솟았다. 그러나 이어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웅크렸던 어깨를 풀었다.
“아가씨.”
이 삭막한 저택에서 그녀를 아가씨라고 부르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세벨리아를 이리도 친근하게 부르는 사람은 그녀뿐이지만.
“들어와도 돼, 데니사.”
문이 열리자 푸근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저택의 하인들과 달리 제복을 입지 않은 그녀는 어릴 때부터 세벨리아를 돌봐 준 유모인 데니사였다. 또한 공작 가로 시집온 그녀를 따라온 하인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고.
“어쩐 일이야. 퇴근할 시간은 지나지 않았어?”
모종의 일로 인해 그녀는 저택 밖에서 숙식 중이었다. 이 또한 차별 중의 하나였으나, 세벨리아에겐 항의할 힘조차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래, 이번에도 누가 이상한 소리를 해?”
어딘지 불안함이 서린 그녀의 물음에 데니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세벨리아의 손을 끌어다 쥐었다.
“끝까지 말씀 안 하실 생각이셨죠.”
“무슨 말이야, 갑자기.”
데니사가 세벨리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세벨리아는 바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데니사의 그 다정하고 슬픈 눈빛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알아 버렸구나.’
세벨리아는 속이 울렁이는 감각에 급하게 숨을 집어삼켰다.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 세벨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초췌한 낯의 의사를 떠올렸다.
유모가 어렵게 데려온 의사는 그녀에게 병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 치료가 의미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그 순간 세벨리아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이것이었다.
‘데니사가 알면 안 돼.’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 같은 사람이었다. 이 먼 북부까지 자신을 따라와 준 하나뿐인 사람이었다. 괄시받는 제 처지에 매번 눈시울을 붉히는 여인이었는데, 시한부라는 소리를 들으면 기절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의사에게 비밀을 지켜 달라 신신당부했다.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 되었지만.’
세벨리아가 차마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자, 데니사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게 다 공작님 때문이에요.”
그녀가 차가운 바닥과 환기가 되지 않는 방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이런 곳에서 지내면 분명히 병이 날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니 제발…….”
그녀가 더듬거리며 세벨리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저희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했잖아요.”
“그럴 수 없었다는 거 알잖아.”
세벨리아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이 방을 선택한 건 자신이었다. 디하트의 곁에서 자신을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견딜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날 저택에서 쫓아내 사용인과 함께 머물게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간…….”
인버네스와 대립 중인 중앙 귀족에게 꼬투리 잡을 기회를 주게 된다.
촘촘하게 얽힌 정치적 역학관계.
그 속에서 사생아인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폭풍에 휘말리지 않게 납작 몸을 엎드리는 것뿐.
“그래도 난 다행이라고 생각해.”
“도대체 뭐가요? 허구한 날 괴롭힘만 당하다 개만도 못한 놈에게 시집오신 게?”
데니사는 눈앞에 디하트가 있다면 그의 목을 따 버릴 기세였다.
“죽어서 지옥에 가야 마땅한 놈들 같으니라고.”
세벨리아는 그녀의 당찬 기세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러나 그건 절로 우러나온 웃음이 아니었다. 웃음을 흉내 낸 것에 가까웠다.
“쿨럭.”
억지로 웃던 그녀의 입가로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에 데니사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아가씨.”
“너무 걱정하지마. 생각하는 것만큼 괴롭지 않으니까.”
세벨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피를 닦아 내며 말했다.
“정말이야. 슬퍼하지 마. 난 괜찮아. 의외로 버틸 만해.”
데니사가 자신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 일부러 험담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옛날이었다면 그녀의 험담에 동조해 나쁜 놈이라 읊조리며 기분을 풀었겠지.
“하아…….”
하지만 왜일까. 지금은 무얼 해도 덧없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세상과 유리된, 한 겹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는 느낌.
세벨리아는 자신을 걱정스레 바라보는 데니사를 껴안고서 말했다.
“나 도망칠 거야.”
“……예?”
“남은 시간만이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침대 밑에 있는 가방을 가리키자 데니사의 얼굴이 일변했다.
“출발일은 일주일 뒤야. 그러니 오늘 이후로 저택에 찾아오지 마. 혹여나 내가 떠난 뒤 데니사를 괴롭힐 수도 있으니까.”
세벨리아가 거기까지 말하자, 데니사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데니사?”
세벨리아가 그녀에게 대답을 종용했다. 그러나 데니사는 대답은커녕,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고 말했다.
“아가씨.”
“응?”
“제 부탁 한 번만 들어주세요.”
데니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덧붙였다.
“아니. 당연히 들어주셔야 해요. 같이 살자는 청을 그렇게 무참히 거절하셨으니까.”
“하지만-”
“떠나기 전에 불쌍한 늙은이, 마지막 소원 한 번 들어준다 생각하세요.”
데니사는 어깨를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대로 떠나면 분명 웨든 가에서 아가씨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맞는 말이었다. 그녀는 중앙과 북부의 화합을 위해 보내진 포로였으니까. 도망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아버지는 분명 화가 나 사람을 풀겠지.
“도망자 신세로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으시잖아요.”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세벨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아무 대책 없이 떠났다가 오히려 손쉽게 잡힐 가능성이 많은 게 지금의 제 처지였다.
‘난 가진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데니사가 힘없이 늘어진 세벨리아를 끌어당기더니,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사실 아가씨에겐…….”
세벨리아는 헛숨을 삼켰다. 혼란스럽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 위로 얇은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 * *
그녀가 떠나고 난 뒤 디하트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던졌다.
후드득.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살에 핏물로 젖은 가시가 번뜩였다. 디하트는 엉망진창이 된 온실 바닥을 내려다보다 기가 차다는 듯 고개를 추켜올렸다.
금빛 눈에서 차디찬 안광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듯 한참이나 허공을 노려보던 디하트는 이내 온실을 박차고 나왔다.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던 발걸음을 막은 건 그의 숙부인 라쉬였다. 일순간 그의 눈에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숙부님.”
“또 온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구나.”
철없는 어린아이를 나무라듯 찌푸린 얼굴을 내보인 라쉬가 디하트의 팔꿈치에 묻은 흙 부스러기를 손수 털어 냈다.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어서 올라가라.”
무뚝뚝한 목소리가 그를 질책했다. 디하트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내려다보다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냐.”
라쉬가 흐트러진 그의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손등으로 가슴팍을 툭 두드리며 물었다. 디하트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를 강렬히 갈망하듯 라쉬의 뒤편, 세벨리아의 방이 있을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제 발로 들어간 저 빌어먹을 감옥 같은 방을.
사시사철 짙은 회색 커튼이 쳐져 있는 그 삭막한 방을.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알아차린 라쉬가 아, 하고 감탄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매에 곤란함이 서렸다.
“그 애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게다.”
꺼림칙한 기색을 알아차린 디하트가 몰아붙이듯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일 년 중 저택에 머무르는 날이 지극히 적은 그였다. 그러니 중대한 사건 외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가 추궁하듯 묻자 라쉬는 머뭇거리다 답했다.
“……웨든 가의 여자, 아니. 세벨리아와 관련해 불쾌한 소문이 돌더구나.”
“불쾌한 소문이라 하면.”
“내 입으로 이야기하긴 그렇다만, 요즘 그 애가 방에 남자를 들인다는 소문이 있어.”
평온했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더니 유리처럼 깨졌다.
“허튼소리였군요.”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디하트가 말했다. 금빛 눈에는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은 실수라 생각하고 넘어가 드리겠습니다만……,다시는 제 앞에서 그녀를 웨든 가의 여자라고 칭하지 마십시오.”
디하트는 재고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매몰찬 태도로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라쉬가 그를 붙잡았다.
“숙부님.”
“잠자코 들어!”
경고하듯 나온 음성에도 불구하고 라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또렷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너도 알겠지만 그런 소문은 근거 없이 나오지 않아. 그 애가 인버네스에 녹아들지 못한 건 너도 알지 않느냐!”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섬뜩한 시선이 라쉬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는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리다. 가문의 평판을 위해서…….”
“이런, 숙부님.”
디하트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가늘게 접힌 눈매 사이로 금빛 눈동자가 서슬 퍼런 빛을 뿜었다.
“저보다 더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디하트는 벼락처럼 번쩍이는 금빛 눈을 곱게 휘며 제 소매를 잡은 라쉬의 손을 떼어 냈다.
“제 부인의 정숙함을 의심하는 버러지들이 감히 내 안뜰을 휘젓고 있다는 소리를 이 이상 얼마나 더 심각하게 받아들일까요.”
으르렁대는 목소리가 섬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