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0)화(20/171)
로만이 도착했을 때 화재는 얼추 진압된 뒤였다. 그러나 그는 황망한 눈으로 검게 그을린 저택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말도 안 돼.’
인버네스는 북부의 자랑이자 그의 자긍심이었다.
이 대째 인버네스에 헌신해 온 그에게 장엄한 저택의 위용은 그의 자존심의 토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다니!
그는 몹시 분노했고, 그 화는 당연히 범인에게로 향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까.”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와 붉게 달아오른 얼굴. 로만은 마치 범인이 눈앞에 있다면 한 대 치기라도 할 기세였다. 그로스는 그런 그의 모습을 딱하다는 눈으로 보고선 한숨과 함께 말했다.
“……공작님일세.”
“…….”
그로스는 갑자기 말수가 적어진 로만을 데리고 화마를 빗겨 난 동편 건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마주치는 하인들의 얼굴엔 긴장과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로스는 그들을 근엄한 얼굴로 응시하며 로만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도 요 근래에 저택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
로만이 그로스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로스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아마 오래된 저주가 다시 나타나 그분에게 악영향을 끼치는 모양이야. 그래서 그렌 부인이나 내가 드리는 말씀도 듣지 않으시고…… 이상해지셨지.”
그 대목에서 그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그의 주인은 이상해졌다. 그 말 이외에는 무슨 단어로도 그를 설명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 발로 불길 속에 갇혀 죽기를 원하지 않을 테니까.
[우스운 표정이군, 그로스. 가서 네가 성심껏 모시는 숙모님이나 걱정하지 그래. 연기를 꽤나 들이마신 모양이던데.]귓가를 울리는 목소리에 그로스는 이를 악물었다.
[나가자니,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이곳이 내가 있을 곳이야.]점점 무너져 가는 방 안에서 텅 빈 웃음을 터트리던 디하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 세벨리아. 부인. 그래요.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내게 행운이란 결코 가질 수 없는 머나먼 희망 같은 거지…….]그와 동시에 그는 몸을 돌리며 어딘가로 손을 뻗었다. 아마 불길 속으로 들어가려던 것 같았다.
[너, 뭐……윽!]그리고 틈을 보던 라이언이 바로 그를 덮쳐 기절시켰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했다.
‘주인님은 완전히 이성을 상실하신 게 틀림없어.’
인버네스 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 강한 힘을 가진 자를 광기에 휩싸이게 하는 케케묵은 그 저주. 그게 나타난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디하트가 제 발로 그 화마 속으로 뛰어들려 할 리 없었다. 그가 아는 디하트는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기절하며 속삭이던 그 음산한 말이라니.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었군요, 부인.]‘착란에 빠져서 아무 말이나 늘어놓으신 거야.’
그로스는 세벨리아를 그리워하는 듯한 디하트의 발언들을 애써 무시하며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렸다.
그녀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다. 사라지는 게 디하트와 가문 전체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겨우 그녀 하나가 죽었다고 인버네스가 흔들려서는 안 됐다.
‘그래. 분명 저주가 그분을 괴롭히고 있는 거야.’
그로스의 신념은 그만큼 단단했으며 아주 협소하고 편협하기 그지없었다.
주인의 고통을 외면할 만큼.
“다 왔군.”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다. 그로스는 문을 열고 로만에게 의식을 잃은 디하트를 보여 주었다.
“……심각하군요.”
등 부분에 큰 화상을 입은 것뿐만 아니라 연기를 너무 오래 들이마신 탓에 기도와 폐가 손상되어 있었다.
심각한 얼굴이 된 로만이 진료기구를 꺼내는 동안 그로스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랫마을에 새 의원이 자리 잡은 모양이던데. 오늘은 일을 하지 않나 보더군.”
“예?”
“페터 한슨이라는 자 말일세.”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에 로만이 까칠하게 반응했다. 그의 손에 들린 약이 디하트의 환부를 스쳤다. 그로스는 제가 다 고통스러운 눈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다친 하인들이 많아서 자네 말고 다른 의원들도 불러야만 했네. 그런데 새로 왔다는 그 의원이 자리에 없더군. 같은 동료기에 알 줄 알았지.”
같은 일을 하면 동료라니. 그딴 논리가 세상에 어디 있나. 편협한 사고를 그대로 드러내는 발언에 로만은 짜증이 났으나 일단 참았다.
“새 의원이 왔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그런가? 그럴 리 없는데. 아마 자네가 너무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모양이야.”
로만은 제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뒤이은 말에 그는 가슴이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그 의원이 돌아가신 마님의 사망확인서를 작성했거든.”
“……예?”
“그날 자네가 유령의 저주가 두렵다며 거절하지 않았나.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른 의원을 데려와야 했지.”
무심하게 읊조리는 말들은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졌다.
로만은 제가 생각 없이 저버린 의무가 갑자기 덫이 되어 나타났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 수고하게. 공작님의 치료가 끝난 뒤에는 플로라 님에게 찾아가고.”
공황에 빠진 그의 등을 두드리고 그로스는 자리를 떠났다.
‘제길, 왜 그때 이야기를 꺼내서.’
로만은 술렁이는 가슴을 내리누르며 제 일에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형형히 빛나는 금빛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는 제 얄팍한 희망이 산산조각이 났음을 깨달았다.
“……그래. 가문의 주치의께서 저주가 두려우셨다고.”
“고, 공작님.”
“천천히 설명해 보게, 로만. 그대의 아버지가 내게 봉사해 온 시간만큼의 기회를 자네에게 주지.”
낮고 서늘한, 금방이라도 목을 베어 버릴 듯한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 * *
그리고 그 결과는 바로 이것이었다.
“사, 살려…….”
로만은 디하트에게 멱살이 잡혀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그의 두 발이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이해할 수가 없어. 아, 아니지. 그래, 애초에 내가 자네를 이해할 이유가 없지.”
번뜩이는 두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며 혼잣말하는 디하트는 혼이 빠질 만큼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저주로 미쳤다더니……!’
로만은 집사에게 그 말을 들은 순간 바로 뒤돌아 나왔어야 했다며 후회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디하트가 로만의 귓가 가까이에 속삭였다.
“내 부인은 마지막 가는 길마저 모욕을 당했군. 그깟 저주 때문에 별채로 쫓겨나서 외로이 죽은 그녀를 그대들은 끝까지…….”
빠르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강물처럼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제발 정신을……컥!”
“아니야, 로만. 자네가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니지.”
로만을 바닥에 집어던진 디하트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건조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사과해야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려서…….”
‘땅에 파묻혀 썩고 있을 시체에게 사과라도 하란 말인가?’
로만은 이제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상대가 공작이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이미 이 유서 깊은 저택을 불태우고 제 의무를 내던진 순간부터, 그가 존경하던 인버네스 공작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리하여 로만은 디하트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을 때, 참아 왔던 본심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래봤자 중앙의 첩자일 뿐 아닙니까!”
끓어오르던 공기가 일시에 가라앉았다.
“제가 아닌 다른 이였다 하더라도 똑같이 했을 겁니다. 그분은 이미 우리가 모실 분이 아니라 감시해야 할 대상이며, 배반자일 뿐이니까.”
디하트의 머리를 뿌옇게 가리던 안개가 순식간에 흩어졌다. 멈칫한 그의 기색을 읽은 로만이 기세를 이어 나가며 외쳤다.
“그 사생아가 먼저 인버네스를 배신했습니다. 당신을 속였어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홀대하시지 않았습니까!”
얼어붙은 디하트를 앞에 두고 로만은 그의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제 와서 왜 이러십니까. 그 사람은 동정할 가치조차 없는 배반자입니다. 그 여자가 어떻게 공작님의 기대를 배신했는지 잊으셨습니까?”
“…….”
“그래도 그 정도면 명예로운 죽음입니다. 그러니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인버네스를 모시는 우리의 자긍심을 그만 짓밟으십시오……!”
그건 다른 하인들도 함께 느끼는 감정이었다.
“…….”
디하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로만의 목을 틀어쥐려 뻗어 나가던 손끝이 미약하게 떨렸다.
‘내가…… 내가 이들을 이렇게 생각하게끔 만들었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는 세벨리아의 배신에 크게 상처 입고 모든 이들이 제게 동조하게 만들었다.
그녀를 무시하고, 외면하고 권리를 빼앗아 방치했다.
그렇게 이 널따란 저택 안에서 홀로 고립되도록 만들었다.
자신에게 기댈 수밖에 없도록, 이 광활한 저택 안에서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하게 하도록.
‘그게 당신을 위기의 순간에 낭떠러지로 떠밀었단 말인가.’
만일 그녀가 사랑받는 공작부인이었다면, 초대 공작부인의 저주가 나타난 순간 모두가 저주를 풀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택의 하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과 하나가 되어 그녀를 경시하고 홀대했으니까.
이제 와 후회해 봤자 그녀의 마음은 풀리지 않을 테니까.
“아…….”
그가 차곡차곡 쌓아 온 죄가 머리 위로 우르르 떨어져 내렸다. 차갑고 날카로워 그대로 심장까지 찔러 들어오는 죄들이었다.
디하트는 다시 한번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세벨리아.’
내가 당신에게…….
디하트는 그대로 가슴을 부여잡은 채 그 자리에 쓰러졌다.
“공작님!”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 *
태어나 처음 타보는 합승마차는 무척이나 신기하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세벨리아는 시시각각 바뀌는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에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때때로 그녀의 시선을 느낀 사람들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때마다 세벨리아는 몸을 움찔하면서도 수줍게 인사를 건넸다.
‘신기하다.’
마차는 이제 마을을 빠져나가 황금빛으로 물든 들판을 지나가고 있었다. 때마침 맞은편에 앉아 있던 중년 부인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물었다.
“아가씨는 어디까지 가요?”
“아.”
그녀는 자신에게 건넨 말인 줄 모르고 당황해 있다가 마주 웃으며 답했다.
“동부로 가는 길이에요.”
깊게 눌러쓴 모자에 달린 리본이 바람에 살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