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1)화(21/171)
데니사와 세벨리아가 잠시 헤어지기로 한 건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였다.
누군가가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뒤를 캔다면 당연히 데니사를 가장 먼저 찾을 테니까.
“그럼 한 달 뒤에 뵈어요.”
“응. 사실 더 있다 와도 되는데…….”
세벨리아의 말에 데니사가 쌍심지를 켰다.
“제가 가족과 지낸 시간보다 아가씨와 함께 한 시간이 더 많다는 건 알고 계시죠?”
“……알지, 그럼.”
세벨리아가 멋쩍은 미소와 함께 데니사를 껴안았다. 사실 그녀는 내심 불안한 상태였다. 수도원에 버려진 적 빼고는 이토록 오랫동안 데니사와 떨어진 적이 없으니까. 세벨리아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데니사에게 당부했다.
“그래도 너무 일찍 올 필요는 없어. 수도에서 그간 못 본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그러고 와.”
“그건 아가씨도 마찬가지예요.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도착한 뒤에 바로 편지 보내시고요.”
“알았어.”
세벨리아는 먼저 떠나는 데니사를 배웅한 뒤 집으로 돌아와 짐을 챙겼다. 비록 잠시뿐이지만 세벨리아는 이곳에 머무르며 진짜 ‘집’이라는 게 어떤 건지 실감했다.
“이제 나도 돌아가고 싶은 집이라는 게 뭔지 알아.”
그녀는 어딘지 뿌듯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창을 닫고 문을 잠갔다.
그리고 데니사가 가르쳐 준 대로 합승 마차를 타고 동부로 향하는 길을 떠났다.
“동부에는 내 친척이 한 사람 살지. 사람 살기 좋은 곳이야. 재해가 잘 나타나지 않는 곳이니.”
맞은편에 앉은 중년부인과 말을 튼 게 바로 십 분 전인데, 세벨리아는 어느새 그녀와 십 년 지기 친구가 된 것 같았다.
‘붙임성이 좋으시네.’
“자, 이거 좀 먹어요. 아가씨는 너무 말랐어.”
“감사합니다.”
세벨리아는 기꺼이 반질반질 윤이 나는 사과 한 알을 받아 들었다.
‘첫 시작이 좋네.’
데니사의 걱정과 달리 아무래도 좋은 일만 생길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동부에 도착할 때까지 쭉 이랬으면.’
세벨리아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작게 미소 지었다.
가끔 병 때문에 피를 토할 때가 있었지만…….
힐렌드를 떠난 뒤 하루하루가 꿈만 같았다.
* * *
어두운 밤의 저택은 우울했다. 미쳐 버린 공작이 저택을 불태우는 거로도 모자라 사람까지 태워 죽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으으…….”
하인들이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몇몇은 퀭한 눈을 끔벅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룻밤 사이에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
사람들이 저마다의 악몽에 시달리는 동안, 정적에 감싸인 동관을 조심스럽게 나아가는 사내가 있었다. 라이언이었다. 그는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차분한 검은 눈이 사방을 빠짐없이 훑었다.
어느 순간 그의 걸음이 멈췄다.
“라이언 경.”
“루센.”
순찰을 맡은 기사 한 명이 그에게 목례해 왔다. 라이언은 아무렇지 않게 그에 응수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라이언은 잠시 의아했으나 곧 연유를 깨달았다. 루센은 플로라의 명령에 따라 라이언을 붙잡으려던 기사 중 한 명이었다.
“그럼 수고하게.”
그러나 라이언은 그 일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가문의 평기사란 때때로 자신의 의지와 반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디하트의 상태가 온전치 않은 지금, 그런 사사로운 일로 은원을 따지기엔 여유가 없었다.
“그, 라이언 경.”
그러나 루센이라 불린 이는 그에게 볼일이 있는 듯했다. 라이언이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무슨 일인가.”
“……그렌 부인께서는 오늘 밤 플로라 아가씨의 곁에 계신다고 합니다. 아가씨께서 계속 불안해하셔서 혼자 두실 수 없다고.”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에 라이언이 그를 강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루센은 우물쭈물하다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전 마저 순찰하러 가겠습니다.”
루센은 뒤돌아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라이언은 그의 뒷모습을 짧게 응시하고 어딘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은 동관에 급히 마련된 그렌의 침실이었다.
* * *
라이언이 허둥지둥 움직이는 그렌의 모습을 본 건 우연이었다. 그는 디하트를 겨우 제압한 뒤 안전한 곳에 던져 놓고, 몸을 씻으러 가던 길이었다.
“저건…….”
그런데 분명 하녀와 의원들에게 둘러싸여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어야 할 그렌이 본관에서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땐 분명 기절해 있던 것 같은데.’
그 짧은 사이 정신을 차리고 다른 곳도 아닌 본관으로 갔다고.
라이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사이 검게 그을린 건물에서 튀어나온 그렌은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 무언가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후우…… 하.”
일순간 그렌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머물렀다 사라졌다. 그리고 퍼뜩 고개를 들더니 주변에 누가 있나 살피는 듯했다.
라이언은 바로 몸을 숨겨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자세히 보니 그렌은 뭔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작은 보석함 같아 보였다.
‘저것 때문에 아직도 불씨가 남은 건물에 들어갔다 왔다고?’
하인이나 기사를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갔다 올 정도라니.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콧대 높은 그렌 부인이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손수 할 리 없으니까.
라이언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멀어지는 그렌을 바라보며 결심을 굳혔다.
‘쓸모가 있겠군.’
일련의 사건을 통해 라쉬와 그렌이 세벨리아를 교묘히 괴롭히고 마지막엔 죽이려 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 그였다.
이제 라이언의 마음속에서 그렌과 라쉬는 섬겨야 할 대상이 아닌, 디하트를 고통에 빠트린 주역 중 하나였다. 그러던 참에 우연히 알게 된 적의 약점이라니. 이건 신이 준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라이언의 검은 눈동자 위로 서늘한 빛이 스쳤다.
* * *
어슴푸레한 빛이 유리창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디하트는 불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
잠시 기억을 더듬어 나가는 것 같았던 그는 이내 괴로운 듯 얼굴을 손에 묻었다.
로만의 외침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를 불태우던 분노가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세벨리아를 극단까지 몰고 간 그들을 벌주고 싶었다. 너희들이 이렇게 고통받는 건 그녀 때문이라 일깨워 주고 싶었다. 그러나 디하트는 본인도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깨달았다.
‘아니, 나는 일부러 그 사실을 인지하려 하지 않은 거야.’
깊은 우울감이 그를 잠식했다. 나 자신이 죄인이었다. 내가 그녀를 그 지경으로 몰고 갔다. 감히 누가 누구를 단죄하겠는가.
“내가 어리석어서…….”
누군가가 지금 자신의 꼴을 본다면 어처구니없어할 게 분명했다.
로만이 말했듯, 그녀가 먼저 배신했다며. 당신은 그에 걸맞은 처분을 내린 거라며 정신 차리라 닦달할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정의와 올바름, 처벌과 형벌 따위는 지금 제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당신이 이곳에 없잖아.”
당신을 내 곁에 주저앉힐 수 없잖아. 다른 생각 따위는 일절 하지 못하고 나만 바라보게 만들 수 없잖아.
“그러니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위선적인 마음이었다. 모두가 그의 본심을 알고 나면 경악할 게 뻔했다.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단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뿐이다. 세벨리아의 배신이 밝혀진 순간, 그녀를 영원히 제 곁에 묶어 둘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겉으로는 몹시도 분노하였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전율하던 자신을.
“아…….”
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불타오르던 금안이 텅 비어 있었다.
분노가 잿더미가 되어 스러지자 그 자리를 공허함이 채웠다. 온몸을 덮는 무기력함에 그는 질식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이대로 죽어도 되는 걸까?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죄인이 감히 편안한 죽음을 맞이해도 되는 걸까.
“하, 하…….”
메마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감싼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한참이나 고통에 신음하던 그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협탁 위에 놓인 환각초에 불을 붙였다.
“그래. 처음부터 믿지 않았었는데 이제 와서…….”
왜 이제 와서, 사실은 평범한 사랑을, 행복한 가정 따위를 바랐다는 듯 후회하고 있는가. 디하트는 모든 걸 잃어버린 사람처럼 텅 빈 웃음을 흘리다 침대 위로 나동그라졌다.
“세벨리아.”
더는 붙잡을 수 없는 그녀가, 그리하여 자신이 망가트릴 수 없는 완벽한 그녀가 신기루처럼 그의 앞에 나타났다.
* * *
동이 터오고 있었다. 어둠은 아쉬운 손을 흔들며 물러나고, 태양이 고개를 들었다. 만신창이가 된 저택 위로 공평한 햇살이 드리웠다.
“으…….”
여기저기서 앓는 신음과 함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잠에서 깨어났다. 힐렌드 홀의 낯선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투정과 불만 섞인 아침 인사를 한 귀로 흘리며 라이언은 빠르게, 그러나 은밀하게 이동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복도에 들어섰다. 복도 끄트머리에는 디하트가 머무는 방이 있었다.
라이언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공작님.”
환각초의 짙은 향내가 코를 찔렀다. 라이언은 외투 아래 숨긴 것을 놓치지 않게끔 조심하며 호흡기를 막았다.
침대 가까이 다가가자 넋을 놓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디하트가 보였다.
‘젠장.’
고민은 짧고 실행은 빨랐다. 그는 무뚝뚝한 사죄의 말부터 올렸다.
“죄송합니다.”
퍽-!
“크윽……!”
몸 전체를 울리는 둔중한 타격이었다. 가슴팍을 부여잡은 디하트가 크게 뜨인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미친…… 라이언.”
번뜩이던 금안은 상대를 확인하자마자 빠르게 식었다.
“잔소리를 하러 온 거라면 그대로 꺼져. 나는 지금 이 상태가 가장 완벽하니.”
그는 다시금 환각초에 손을 뻗으려 했다. 그러나 라이언이 그보다 빨랐다.
“너!”
환각초를 바닥에 던져 짓밟은 그가 디하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공작님.”
“도대체 뭘 하자는 거냐.”
불타오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디하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디하트, 한때 나의 희망이었던 당신에게.]그건 분명 없다던 세벨리아의 유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