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2)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2)화(22/171)
[이곳은 이국인들이 많이 사는 도시야.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지금은 잘 적응하고 있어. 마침 약이 떨어져서 내일은 병원에 가 보려 해…….]데니사에게 보내는 편지를 적다 말고 세벨리아는 기지개를 켰다.
“으음.”
너무 오래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그런가, 어깨가 뻐근했다.
그녀는 펜을 내려놓은 김에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한 잔 따라왔다.
“슬슬 점심시간이구나.”
창밖을 내려다보자 여관으로 삼삼오오 모여드는 이들이 보였다. 보통 여관의 일 층은 식당을 겸하기에, 식사 시간이 되면 건물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렇게 있으니 정말 평범한 사람이 된 것 같네.”
나른한 미소를 띠고 경치를 감상하던 세벨리아는 곧 입매를 굳히고 등을 돌렸다. 그녀는 뭔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사람처럼 창백하게 굳었다.
‘이런, 또…….’
조금의 시간이 지나 세벨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 앉았다. 별거 아닌 일로 자꾸만 이렇게 침착함을 잃는 게 몹시 속상했다.
동부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 얼시크. 이곳에 머무른 지 나흘째.
그리고 아버지를 닮은 남자와 마주친 지도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 * *
나흘 전, 세벨리아는 얼시크라는 도시에 도착했다. 앞으로 도시 네 개를 더 거치면 동부였지만 그녀는 이곳에 짐을 풀었다. 동행인 한 명 없고 병까지 앓고 있기에 무리한 강행은 금물이었기 때문이다.
“얼시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고마워요.”
데니사가 마련해 준 신분패는 유용했다. 세벨리아는 그녀의 능력에 감탄하며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피곤하다.”
세벨리아는 그대로 다음 날 아침까지 한 번도 잠에서 깨지 않고 숙면했다. 그리고 다음 날 점심이 되어 식당으로 내려와 메뉴를 훑는 도중이었다.
“하하, 그런 시답잖은 농담은 그만두게.”
호쾌한 웃음소리에 세벨리아는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를 목격하고 말았다.
“헉……!”
사일러스와 닮은, 아니. 어쩌면 사일러스일지 모르는 남자.
그건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세벨리아는 숨을 삼키고 몸을 움츠렸다. 벽 쪽으로 바짝 기대어 그림자 속에 숨으려 노력했다.
‘아버지, 아버지인가?’
뒷목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그녀는 두 손으로 무릎을 꽉 붙들었다. 만약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면 아무렇지 않게 당당하게 대하리라는 결심이 무색하리만치 겁먹은 태도였다. 그러나 상대는 예상처럼 그녀에게 다가오지도,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옆 테이블에서 일가족이 웃으며 떠드는 소리가 그녀의 주변을 공허하게 맴돌았다.
세벨리아는 어느새 온기가 돌아온 손을 무릎에서 떼며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아.”
그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눈매와 머리카락 색, 입가가 닮긴 했으나 그의 눈은 의심할 바 없는 주황색이었다.
“하.”
긴장이 탁 풀림과 동시에 수치심이 그녀를 찾아왔다.
‘과거의 세벨리아는 죽었다고, 이제는 지난 삶을 모두 끊어 내고 살겠다고 당차게 굴어 놓고서는…….’
데니사의 앞에서 걱정 말라며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던 게 부끄러웠다.
세벨리아는 붉게 달아오른 귓불을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굽은 등을 펴고, 숙였던 목을 꼿꼿이 세웠다.
“침착하자.”
상대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니, 그가 만약 웨든 후작이라 하더라도 자신은 떳떳해야 했다.
‘나는 더 이상 세벨리아 웨든이 아니니까.’
그러니 실제로 마주친다 하더라도 그는 더 이상 아버지라는 위명 하에 자신을 억압할 수 없었다.
“그럼 이만 가지.”
세벨리아가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사이, 사일러스를 닮은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벨리아는 그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했다. 그를 따라가려 하거나 붙잡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다만 이 상황이 몹시 공교롭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도망쳐 도착한 곳에서 아버지를 닮은 사람을 보다니.’
악몽에서 깬 순간, 그 현실이 사실은 또 다른 꿈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손님.”
고요한 눈으로 상대가 문을 열고 나갈 때까지 지켜보던 세벨리아는 곁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어느새 종업원이 테이블 옆에 서서 그녀를 향해 방긋 미소 짓고 있었다.
* * *
‘좀 더 의연해져야 해.’
호기롭게 과거의 자신은 죽었다고 소리쳐 놓고, 그렇게 굳어 버리다니. 의원실에 가기 위해 외투와 지갑을 챙기며 세벨리아는 부끄러움을 털어 냈다.
이제 슬슬 점심시간이 지났으니 의원실도 문을 열었겠지.
오늘은 바닥난 약을 새로 처방받기 위해 의원의 진찰을 받는 날이었다.
‘어차피 불치병이라는 진단은 같을 테지만…….’
데니사가 아직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세벨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는 소식을 전하는 건 언제나 괴로운 일이었다.
* * *
“……설명해라.”
세벨리아의 유서를 받아 든 디하트가 나지막이 말했다.
“분명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던 그녀의 유서가, 어떻게 네 손에 있는지.”
동굴을 울리듯 음산한 목소리였다. 라이언은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이 힐렌드 안에서 누가 또다시 나를 기만하고, 내 아내의 죽음을 모욕했는지 말해 봐.”
죄책감과 회한으로 얼룩져 있던 금안은 어느새 순정한 빛으로 차 있었다.
그건 분노일까, 아니면 배신감일까. 라이언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홀로 시들어 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모든 걸 버린 채, 그 자신마저 내던지려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라이언은 가장자리가 흰빛으로 물든 금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유서는 그렌 부인의 방에서 발견했습니다. 그녀가 불탄 방에서 가지고 나온 보석함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라이언의 말에 디하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유서를 받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숙모님이라.”
바스락.
그러나 그 얇디얇은 종이가 그의 손안에서 무참히 구겨지는 일은 없었다.
“놀랍지도 않군.”
디하트는 유서를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그는 유서의 첫 줄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아랫입술을 베어 물었다.
[디하트, 한때 나의 희망이었던 당신에게.]한때의 희망.
그녀에게 한순간의 희망이었을 자신은 어떤 의미였던 걸까.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었다.
디하트는 한숨을 삼켰다. 그리고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
마지막 줄에 다다라, 그의 투명한 금안 위로 시린 빛이 스쳐 지나갔다.
몹시 고통스러운 듯한 얼굴로 디하트는 고개를 숙였다. 라이언은 차마 그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디하트가 그를 불렀다.
“라이언.”
무섭도록 차분한 목소리였다. 라이언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섬찟했다. 마치 망자의 부름을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예.”
그럼에도 라이언은 바로 고개를 숙였다. 요동치는 공기만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죽은 부인의 환영을 보려 환몽 속을 헤매던 남자는 없었다. 라이언은 그의 속에 단단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자리 잡았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날이 밝자마자 힐렌드 홀을 폐쇄한다. 사냥터와 유원지를 포함한 장원 모두 사람의 출입을 통제하며,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해라.”
고저 없는 목소리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지금 저택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을 직위 해제, 당분간 근신상태에 둔다. 동시에 항구에서 대기 중인 기사들을 빠르게 복귀시켜 빈자리를 채워라.”
라이언은 그가 칼을 빼 들었음을 직감했다. 힐렌드 홀의 폐쇄와 그렌 부인이 수족처럼 부리는 기사들의 근신.
‘심한 처사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디하트는 애초에 거기서 멈출 생각 따위 없었다. 불타는 방에서 출구가 아닌 세벨리아의 환영을 택한 순간부터 그는 이미 극단을 달리고 있었다.
“세벨리아의 죽음이 살해일 수도 있다는 정황을 찾아내.”
“공작님.”
“하인들에게 굳이 말을 흘릴 필요는 없다. 그들을 공포 속에 밀어 넣고 원하는 바를 얻어 내라.”
라이언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디하트는 명령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 결정은 분명 그에게도 독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만에 대한 대가라 해도 상관없겠군.’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멍청한 길을 그 또한 걷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이건 공작으로서의 판단이 아닌 어리석은 남자의 복수심의 발로라 해도 무리 없었다.
아니면 정말 미쳤는지도 모르지.
디하트는 자신의 정신상태를 마치 남의 것처럼 비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 숙모와 숙부께서는 그녀와 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온갖 더러운 짓을 다 벌였지.”
그 말을 하는 순간 금안에 사나운 기색이 스쳤다 사라졌다.
“그런 자들이 죽음에 대한 사실마저 속였을지 누가 알까.”
“하지만 공작님, 마님께서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돌아가셨다고 의원이 확인서를 쓰지 않았습니까.”
“그 페터 한슨이라는 자 또한 매수된 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져.”
디하트의 서늘한 눈이 라이언을 응시했다.
“그런……!”
라이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거기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들이 벌인 중상모략이 내게 들켰다는 걸 깨닫고 다급히 그녀에게 죽음을 종용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게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들의 눈이 닿지 않는 별채로 쫓겨난 세벨리아, 그녀의 시신을 검진하고 홀연히 사라진 의원, 그리고…….
“그렇지 않으면 이런…… 내용의 유서를 숨겼을 리 없겠지.”
디하트의 목소리가 괴로운 듯 떨렸다. 그는 고개를 돌리며 핏기 잃은 손으로 유서를 내려놓았다.
[나를 절망에 빠트린 건 웨든이지만,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힐렌드 홀의 모든 이들입니다. 그렌, 플로라, 라쉬, 그리고 나의 희망이었던 당신.]단정하던 글씨는 마지막으로 갈수록 엉망진창이 되었다.
[내 마지막 비명이 당신들의 귓가에 닿기를.]누군가 그의 심장을 두 손으로 붙잡아 비트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