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3)화(23/171)
내 마지막 비명이 당신의 귓가에 닿기를.
그건 사랑하는 남편의 손에 죽어 가던 벨리타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이었다.
“너무 감상적이었나.”
세벨리아는 초대 인버네스 공작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덮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의원에게서 진찰을 받은 뒤 돌아오는 길.
편지지를 사기 위해 들린 잡화점에서 하필이면 ‘저주받은 공작 이야기’라는 작은 책을 집어 든 게 문제였다. 벨리타의 마지막 유언을 일부러 유서 마지막에 빌려 쓴 사실이 새삼 그녀의 양심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으음…….”
세벨리아는 붉게 달아오른 귓가를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 생각하니 너무 감정에 흠뻑 젖어 유서를 썼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의 자신을 말릴 수 있느냐 물으면 아마 아니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게 내 진심이었으니까.”
손바닥만 한 책으로 입가를 가리며 세벨리아는 쓰디쓴 미소를 가렸다. 정말로 저주를 받아 미친 여자라면 유서 같은 건 쓸 정신도 없었을 것이다.
‘펜이나 제대로 쥘 수 있을까. 아마 벽에 피 칠갑을 하고 목매달아 죽었겠지.’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서란 세벨리아 인버네스로서 남기는 마지막 글이자 의지였으니까. 그래서 그냥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남기기로 했다.
그동안 한 번도 토로할 수 없던 원망과 슬픔, 그리고 분노를.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떠난 뒤 거짓으로 슬퍼할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충격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것도 조금 과했던 것 같아.’
애초에 그들이 제 유서를 보고 후회한다는 보장도 없을뿐더러…….
유서 내용만 본다면 마치 자신이 벨리타처럼 유령이 되어 다시 그들을 저주하러 나타날 것만 같지 않은가.
“좀 더 담담하고 차분하게 쓸 걸 그랬나.”
세벨리아는 마치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을 바라보는 어른의 심정을 느꼈다. 문제는 여기서 그 청소년이 본인의 과거라는 점이지만.
“하아…….”
한숨을 내쉰 세벨리아는 책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편지지가 놓인 매대를 향해 걸었다. 데니사에게 슬픈 소식과 기쁜 소식이 반반 섞인 기묘한 일을 들려줘야 했다.
병이 더디지만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과 혹시 모를 치료법을 찾을 수도 있다는 얄팍한 기대를.
* * *
아침이 밝자마자 저택의 공기가 요동쳤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불안한 눈으로 서로를 힐긋댔다.
힐렌드 홀이 폐쇄되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힐렌드 홀의 폐쇄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공작의 기행을 예측할 수 없어 두려움에 기가 죽었다. 그러나 더욱 뜻밖인 것은 그 이후로 그들에게 아무런 명령도 하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우리는 이대로 우리 할 일만 하면 되는 건가?”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따로 지침이 내려온 것도 아니니…….”
그러나 모두 은연중에 큰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렌 부인의 신경질적인 모습과 대기를 떠도는 불온한 공기가 그것을 반증했다.
“라이언 경이 하인들 몇몇을 데리고 가서 무언가를 묻고 계신다던데…….”
“공작님께서 더 이상 난동을 부리지 않으시는 건 다행인데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어.”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나날이 지나고 마침내 항구에 머무르고 있던 기사들이 돌아왔다.
“저건……!”
“아, 세상에.”
긴장에 한껏 억눌려 있던 이들 사이에서 안도와 절망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그건 더 이상 이름 모를 공포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심이면서 동시에 공작이 제 가족을 향해 칼을 빼 들었다는 깨달음이었다.
“공작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건가.”
항구에서 돌아온 기사들이 초췌한 모습의 라쉬를 포박한 채로 데려왔다.
* * *
“디……하트…….”
라쉬가 간절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런, 편안한 여행은 아니셨나 봅니다.”
그의 말처럼 라쉬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가문의 웃어른으로서 언제나 품위를 유지하던 라쉬는 시궁창의 생쥐마냥 볼품없었다. 디하트는 그 모습이 그에게 퍽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두 팔을 벌려 그를 맞이했다.
“죄송합니다. 숙부님을 챙기기에는 제가 제정신이 아니었어서 말입니다.”
피식 웃음을 흘리는 모습이 퍽 밉살맞아 보였다. 라쉬 또한 그렇게 생각했는지 붉어진 눈매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디하트는 정말로 그를 내도록 잊고 있었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인데, 마음이 상하셨나 봅니다.”
부인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제 등에 칼을 꽂은 숙부 따위를 어떻게 신경 쓴단 말인가.
“당연히 용서해 주시리라 믿겠습니다. 애초에 절 이렇게 몰아붙인 당사자시니까.”
자신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올려 보는 라쉬와 시선을 맞추며 디하트가 가늘게 웃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숙부님. 없던 동정심이 생기려 하잖습니까.”
“디하……트. 네가 드디어 미쳤…….”
“그럴지도 모르죠.”
시가에 불을 붙인 디하트가 창을 열며 나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런데 미친 사람을 상대로 그런 망언을 일삼고 본인은 괜찮을 거라는 자신감은 어디서 유래한 걸까.”
돌아선 얼굴엔 어느새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유전인가?”
정교하게 빚어낸 도자기 인형처럼 싸늘하고 아름다운 얼굴 위를 장식한 것이라고는 냉정한 광기뿐.
라쉬는 그제서야 이곳까지 끌려오며 들은 소식들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저주가 발현되어 미쳤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라쉬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흐음…….”
한편 디하트는 냉정한 얼굴 아래, 당장이라도 모든 걸 불태워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었다.
‘왜 숙부를 이제껏 잊고 있었는지 알겠군.’
자신은 무고하다는 그 눈과 마주친 순간 디하트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이대로 죄다 불태우고 망가트린 뒤에 자신도 죽어 버리고 싶다는 이기적이고 강렬한 욕망.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린 건가.’
디하트는 영악하기 짝이 없는 제 머리에 찬사를 보내며 시가를 깊이 들이마셨다. 세벨리아가 죽은 뒤 때때로 불길을 닮은 고통이 가슴 속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후우…….”
그리고 그 불길은 스스로를 새카맣게 태우는 거로도 모자라 힐렌드 전체를 집어삼키길 원했다.
그녀가 없는 모든 곳을 잿더미로 만들기를, 그녀를 괴롭힌 모든 이들이 고통에 신음하기를 원했다.
“아니, 아냐. 아직은 안 되지.”
그건 세벨리아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그건 너무 쉬운 결말이야.”
디하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집무실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라쉬는 그 모습을 경악 서린 눈으로 응시했다.
* * *
한편, 호시탐탐 힐렌드 홀에 입성하려던 웨든 후작은 낭패감에 젖었다.
“이런.”
그는 혀를 차며 장원 부지에 있는 인버네스의 묘역을 떠올렸다.
“그걸 열어 봐야 확실해질 텐데…….”
웨든 후작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네이튼이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사일러스의 눈이 네이튼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의 재치에 감탄하는 눈치였다.
“그 사생아의 유모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제가 책임지고 알아내겠습니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덧붙였다.
* * *
라쉬가 끌려왔다는 소식이 힐렌드 홀 전체에 퍼진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맙소사, 어떻게 이런 짓을!”
기다리던 남편의 소식을 들은 그렌이 드디어 모습을 보였다. 디하트는 내내 생쥐같이 도망 다니던 그녀를 잡은 것에 기뻐해야 할지 잠깐 의문이 들었다.
“라쉬, 이게 무슨 꼴이에요.”
그렌이 라쉬를 묶은 줄을 풀어내며 그에게 물었다.
“당신, 괜찮아요?”
라쉬가 감격에 찬 얼굴로 그렌을 올려다보았다.
“여,여보.”
“세상에 당신이 이런 고초를 겪게 만들다니…… 믿을 수 없어.”
그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라쉬의 뺨을 감싸고 그의 이마에 입맞춤하며 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분노가 담긴 눈동자로 디하트를 노려보았다.
“네가 이제는 가족마저 몰라보고 천둥벌거숭이마냥 날뛰는구나. 림스 경이 이 일을 아신다면 어찌 나오실지 두렵지도 않니?”
“숙부의 꼴이 사람 같지 않아 알아보기 힘들다는 건 저도 인정합니다, 숙모님.”
디하트가 여유롭게 그렌의 말을 비꼬자 그녀의 부릅뜬 두 눈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조카가 숙부를 집으로 데려온 일이 잘못이던가요?”
“네가 그를 죄인처럼 묶어 데려오지 않았어!”
“그래, 그러니까.”
디하트는 예의 바른 어투를 일순간 내던졌다. 그렌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형편에 맞는 대접을 해 줬는데 뭐가 문제냐 이 말입니다.”
“……이 이상은 참아 줄 수가 없구나.”
그렌이 모멸감에 치를 떨며 말했다.
“네 멋대로 장원을 폐쇄하고 집안을 들쑤시는 것까지는 용납했다. 하지만 이제 한계야. 우리 가족은 이대로 힐렌드 홀을 떠나겠다.”
실은 힐렌드 홀이 폐쇄된 내내 생각하던 계획이었지만, 그렌은 마치 방금 떠올린 것처럼 말했다.
“자식처럼 길러 온 네게 이런 취급을 받다니. 더 이상은 견디지 못하겠구나.”
그렌은 상처 입은 부모인 양 라쉬와 함께 퇴장하려 했다.
속셈은 전혀 달랐지만.
‘디하트는 지금 예측 가능한 상태가 아니야. 일단 몸을 피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어.’
계속 미치광이처럼 날뛰도록 그냥 내버려 두자. 그러면 그의 평판과 위신은 알아서 깎일 테니까.
훗날 디하트의 능력에 대해 의심을 가지는 이들이 나타나는 날.
‘그날이 바로 내가 다시 등장해야 하는 날이야.’
계산을 끝낸 그렌은 마지막까지 어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며 가식을 떨었다.
“잘 있거라, 디하트. 혹여나 나중에라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그렌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달칵, 달칵.
“……?”
그러나 집무실의 문은 이미 밖에서 걸어 잠근 지 오래였다.
그걸 확인한 그렌이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태연한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는 디하트가 보였다.
“네가…….”
“어딜 그리 급히 가시려 하십니까, 숙모님. 나흘 내내 눈치만 보며 절 피하셨잖습니까.”
“디하트, 제발 날 불쌍히 여겨다오. 이제 이야기할 기력도 없단다. 나는 상처 입고 병 든 내 가족을 돌봐야 해.”
그렌이 라쉬를 감싸 안으며 부탁하는 듯한 눈빛으로 호소했다.
“우리를 그냥 보내 주렴.”
그러나 디하트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군요.”
책상 한편에 놓인 새장을 바라보며 디하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게도 저는 남은 가족이 숙모님네뿐이라 쉽게 놓아드릴 처지가 못 되어서 말입니다.”
빈정거림보다는 진심을 말하는 것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자, 이렇게 오신 김에 세벨리아가 죽기 전에 어떻게 지냈는지 저와 추억이라도 되짚지 않으시겠습니까.”
금색의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발하며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죽기 전, 내가 모르는 그 마지막 며칠이 무척이나 궁금해서 말입니다.”
그 서늘한 금안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렌은 그가 자신을 쉽게 놔주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