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4)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4)화(24/171)
힐렌드 홀을 떠나온 지도 2주 가까이 되었다.
막 그곳을 떠나왔을 때 세벨리아는 고양감이 전신을 지배해 피곤한 줄도 몰랐었다.
그러나 긴장이 풀리자 피로와 수마가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덮쳐 왔다.
“으음…….”
오늘도 느지막이 잠에서 깬 세벨리아는 반도 뜨지 못한 눈으로 약을 찾아 삼켰다. 얼시크의 의원에게서 처방받은 약은 기존의 것보다 더욱 효력이 강한 약이었다.
“후우…….”
세벨리아는 점점 정신이 또렷해지는 걸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에 두 발을 딛고 섰다.
“아……!”
그러나 그녀는 바로 다음 순간 러그 위에 무릎을 꿇어야 했다. 갑자기 발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환자분의 증세는 리히스 병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이건 현재로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죠.]의원의 차분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내장기관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는 단계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발 또한 점점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게 될 겁니다.]이미 데니사가 데려온 의원으로부터 한 차례 들은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들을 때마다 속을 차갑게 얼리는 듯한 말이었다.
그게 바로 자신의 미래가 될 테니까.
‘그래서 떠나고 싶었어.’
천천히 굳어 가는 몸으로, 아무것도 못 한 채 다른 사람의 경멸을 받으며 그 싸늘한 저택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어.
세벨리아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며 눈꺼풀을 떨었다. 정오의 햇살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사실 이렇게 비관적인 말을 먼저 꺼낸 건…… 뒤이어 드릴 말씀에 너무 큰 희망을 품으실까 봐서입니다.]그 말을 한 뒤 의원은 쓰고 있던 안경을 벗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동자 위로 잠시 ‘이게 잘하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결심한 듯, 다시 안경을 쓰고 세벨리아를 향해 곧은 시선을 보냈다.
[정말 미약한 가능성이지만, 리히스 병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다수 환자는 피부병변을 동반하는 게 보통인데…….]의원의 눈이 세벨리아의 뺨과 목덜미, 드러난 팔목을 향했다.
그녀의 피부는 그 흔한 잡티 없이 깨끗하고 맑았다.
[환자분께서는 그런 증상이 보이지 않는군요. 게다가 병의 진행도 확실히 더디고요.]세벨리아는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무릎 위에 놓인 두 손에 힘을 주었다.
[일단 소견서를 써 드리겠습니다.] [네?]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사실 저도 리히스 병 환자를 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요.]의원은 무심한 태도로 서랍에서 편지지를 꺼내고 펜촉을 잉크에 담갔다.
[리히스 병을 비롯한 기타 희귀병에 대한 권위자 중 한 명을 알려 드리죠. 이전에 록터 병으로 오진되던 신규 질환을 밝혀낸 적도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의원이 펜을 내려놓고 작성된 소견서 위에 무언가를 뿌리고 밀랍으로 봉했다.
[본래 사람을 잘 받지 않는 녀석이지만 제가 보낸 환자라면 들여보내 줄 겁니다.]화악-!
녹빛 밀랍 인장 위로 빛무리 같은 것이 어렸다 사라졌다.
[자, 여기 소견서와…… 그곳까지 가는 방법, 그리고 준비물이 적힌 쪽지입니다. 이제 남은 건 환자분에게 달렸습니다.]세벨리아는 의원이 내미는 소견서와 작은 쪽지를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살고 싶다면,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가 남아 있다면 이걸 들고 찾아가 보세요.]그리고 다시 현재에 이르러, 세벨리아는 바닥에 주저앉아 의원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라…….”
세벨리아는 쓰게 웃으며 다리를 모았다.
의원에게서 어쩌면 병을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확인받는 순간. 기묘하게도 세벨리아는 기쁨보다 먼저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녀의 일상은 이미 죽음을 전제로 재정립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모든 걸 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어서였어.’
죽음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모든 것을 앗아 갈 테니까. 그래서 미련을 버리고 떠날 수 있었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손에 다시 선택지가 주어질 수 있다니.
‘기쁘지 않은 건 아니야. 하지만…….’
무릎 위에 턱을 괸 세벨리아는 가냘픈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이건 두려운 걸까.’
겨우 정립한 일상이 다시 밑바닥부터 흔들린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데니사는 분명 의원이 추천해 준 사람을 찾아가라고 하겠지.”
그녀가 데니사에게 보낸 기쁜 소식이자 슬픈 소식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병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으나, 어쩌면 불치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그녀의 삶이 이른 나이에 막을 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그런데 그 희망이 다시 한번 꺾인다면 어떻게 될까.’
피부병변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 리히스 병이라는 진단이 맞았다면?
그래서 조금밖에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게 될 뿐이라면?
“하아.”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세벨리아는 접었던 다리를 펴며 천천히 러그 위에 몸을 뉘었다.
‘일단 데니사의 답장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
어차피 답장을 받기 전까지는 얼시크를 떠날 수 없으니까. 세벨리아는 따스한 햇살 속에서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깊고 따뜻한 물 속에 잠기는 기분이었다.
* * *
한편, 중앙으로 돌아온 데니사는 친구, 가족들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라는 세벨리아의 당부를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타인의 비극을 지나치게 즐겼기 때문이었다.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어, 데니사. 모시던 분이 그렇게 가고…… 요새 많이 힘들지?”
“그냥 그래.”
“어머, 얘. 힘들면 그냥 힘들다고 말해. 나이 먹어서 솔직하지 못한 건 꼴사나운 거야.”
어떤 말을 해도 제멋대로 받아들이는 상대를 보며 데니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중앙으로 돌아온 후 이런 일이 도대체 몇 번째인지.
걱정을 빙자해 그녀의 처지를 깎아내리는 주변인은 이제 한 손으로 세기조차 힘들었다.
데니사는 상대가 마음껏 나불거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내 정신 좀 봐.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여자는 한참 동안 말을 쏟아 내다 눈을 크게 뜨고선 또 멋대로 작별인사를 건넸다.
“나중에 또 보자. 그땐 이렇게 우울하게 입고 다니지 말고.”
데니사는 깔끔하게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그래, 이게 바로 중앙이었지.’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음에도 데니사는 항상 중앙 특유의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지금쯤이면 아가씨께서 얼시크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세벨리아가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당도할 수 있도록 시선을 분산시킬 것. 그렇지 않아도 데니사는 그녀와 헤어지기로 한 선택이 잘한 선택이었다는 걸 요사이 체감하고 있었다.
‘자꾸만 누가 지켜보는 것 같단 말이야.’
데니사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평범하게 주위를 스치는 이웃 외에는 별달리 이상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주의할 필요가 있었다. 며칠 전에는 분명히 누군가 그녀를 따라오는 걸 느꼈으니까.
‘호신용품이라도 하나 사야 하나. 그런데 모시던 분이 죽어 우울에 빠진 하녀가 그런 걸 사도 괜찮은 걸까.’
수면독이 든 펜촉 같은 걸 판다던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아가씨에게도 하나 사다 드릴 것을.
데니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세벨리아에 대한 염려는 자연스럽게 미덥지 못한 친구에 대한 걱정으로 이어졌다.
“페터 그 녀석은 소식을 보낸다더니 왜 연락이 없지.”
페터는 세벨리아의 불치병을 진단한 의원이자 사망확인서를 작성한 이였다. 떠날 때 남쪽으로 내려갈 거라는 말은 들었는데 그 이후로 연락이 없었다.
“이상한 데서 고지식하고 엉뚱한 짓을 벌이는 놈이라 자꾸 걱정이 드네.”
그 성격 덕에 제발 좀 도와 달라 설득할 수 있었지만 말이야.
데니사가 한숨을 쉬며 골목을 돌았다. 그 순간, 신문 파는 아이들이 손바닥만 한 호외 수십 장을 흩뿌리며 그녀를 지나쳤다.
“호외요, 호외!”
“북부에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저주받은 공작이 드디어 미쳤대요!”
그 괴상망측한 외침을 들은 데니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공작이 미쳤다고?”
데니사는 의심 어린 얼굴로 허리를 숙여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나지막한 비명을 질렀다.
[……인버네스 공작은 공작부인의 장례식 이후 저택을 불태우는 등 기행을 벌여 온 것으로 알려져……(중략)
결국 며칠 전, 힐렌드 홀은 모든 장원을 폐쇄하였으며…… 사람들의 비명이 날마다 울려 퍼지고 있다고 한다.]
데니사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람.”
그녀의 두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 * *
힐렌드 홀에 모든 관심사가 쏠린 현재.
그곳의 주인인 디하트는 그렌을 앞에 두고 느긋하게 깍지 낀 손을 무릎에 얹었다.
“세벨리아를 추억하며 함께 담소나 나누자는 제 제안에 왜 그리 치를 떠시는지 모르겠군요.”
그는 구석에 몰린 초식동물을 상대하는 맹수처럼 그렌에게 여지를 주었다.
“제 아내이자 숙모님의 조카며느리이지 않았습니까.”
명징한 빛을 품고 있는 금안을 바라보며 그렌은 그의 절망이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세벨리아의 죽음에 사로잡혀 앞뒤 없이 행동했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복수를 위해 칼을 가는 사람 같구나.’
그렌은 금빛 눈동자 위를 스치는 새파란 불길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주눅 들지 않았다. 세벨리아의 죽음에 제가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었으니까.
‘당연하지. 내가 죽이지 않았으니까!’
그렌은 떳떳하다 못해 억울했다.
과거에 제가 세벨리아를 괴롭히고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모두 다 가문을 위한 일이었다.
게다가 죽이려 했을 뿐이지, 진짜로 죽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 사생아 년의 마음이 심약하고 배포가 모자라 저주에 휩쓸려 자살해 버린 게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고!’
그렌은 디하트를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몸을 엎드리는 게 나을 듯했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서 생각하자.’
정리를 끝낸 그녀는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덮었다.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한숨이 바닥을 덮었다.
“아, 디하트. 제발……네 망상과 의심이 지금 이 힐렌드 홀을, 이곳의 사람들을 어떻게 망가트리고 있는지 알고 있는 거니.”
“…….”
“그 아이는 자결했다.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은 게 아니야.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의심하는 바가 없어. 제발 내 말을 믿어다오.”
긴 침묵이 이어졌다. 그렌은 기대 어린 눈을 들어 디하트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헉!”
“그럼 이건 어떻게 된 겁니까.”
디하트는 두 장의 서류를 손에 들고 있었다.
하나는 그녀의 보석함에 들어 있어야 할 세벨리아의 유서였으며, 다른 하나는…….
“타다 만 서랍장에서 나왔더군요.”
그녀가 보내려다 만, 세벨리아의 살인을 교사하는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