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5)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5)화(25/171)
그렌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디하트가 건조하게 말했다.
“이래도 그녀의 죽음에 대해 결백하다 말할 수 있습니까?”
방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디하트는 그렌의 필체로 써진 살인 교사 편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반절 정도 타 버려 내용이 완전하지는 않으나 혐의를 확정 짓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끌고 가.”
“아니다, 정말 아니야. 내 한때는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건 시인하마, 하지만 억울하단다. 나는 정말로……!”
“추하군요.”
그렌이 뒤늦게 항변했으나 이미 늦었다. 디하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항의를 마지막 발악쯤으로 여기는 태도였다.
“디하트!”
“그렌 부인을 탑으로 모셔라. 혹여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귀하게 대접하고.”
라이언이 그녀를 끌고 나갔다. 그렌은 몸부림쳤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라쉬 또한 이어 끌려 나갔다.
반 시간 뒤, 힐렌드 홀에 라쉬 부부가 탑에 연금되었다는 소식이 퍼졌다.
* * *
“이걸로는 부족하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머지않아 두 분은 다시 풀려날 겁니다. 아마 림스 경 같은 가문의 중역들이 그렇게 만들겠죠. 그리고 그때가 오면 단순히 가족 간의 불화라며 덮을 수 없을 겁니다.”
라이언이 나지막한 어조로 경고했다. 디하트는 무겁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죽였다는 증거가 되기에는 부족하지.”
디하트는 라이언의 말이 반절은 맞고, 반절은 틀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었다는 가정에 확신을 더하기에는 충분해. 그리고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거다.”
디하트는 내뱉듯 말하며 불에 타 삐걱거리는 본관 복도를 거닐었다.
“그녀의 죽음에 더러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그 의심,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의혹. 나는 그게 필요해.”
라이언은 그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때때로 부서지다 만 건축자재가 떨어져 내릴 때면 그가 몸으로 막아서면서.
“웨든이 그녀를 나락에 빠트리고, 이 대단하신 힐렌드 홀이 그녀를 죽였다고 했지.”
텅 빈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디하트는 정처 없이 걷다 라쉬의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렇다면 어떻게 죽였는지, 그녀는 죽어 가며 어떤 고통을 받았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나.”
디하트가 문틀만 남은 방으로 들어서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명색이 내가 그녀의 남편이었는데 말이야.”
라이언이 부서지고 그을린 방 안을 뒤지기 시작하는 디하트를 향해 말했다.
“제게 맡기십시오.”
“됐다. 내 눈이 비록 진실이나 거짓은 가려내지 못해도 바로 앞에 있는 건 구별할 수 있으니까. ”
디하트는 그을음이 얼굴과 손에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를 들쑤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바라던 것을 손에 넣었다.
“불이 때로는 도움이 될 때도 있군.”
복잡하게 얽힌 잠금쇠가 녹아내린 금고 안에는 라쉬가 세벨리아의 평판을 떨어뜨리기 위해 벌인 공작의 증거가 들어 있었다.
“살아 있을 때 이 사실을 알았다면…….”
금빛 눈동자가 흔들리고, 거친 목소리가 힘겹게 쏟아졌다.
“그랬다면 저 악마 같은 이들을 감옥에 처넣고 내내 홀로 상처받았을 그녀를 위로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세벨리아는 이미 죽었고, 그의 손에 남은 건 이 역겨운 서류 더미였다.
“공작님…….”
“됐어.”
디하트는 금고 안에 들어 있던 서류들과 패물 몇 가지를 라이언에게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호화롭기 그지없던 방은 화마에 휩쓸려 흡사 지옥도 같은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인버네스 가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힐렌드 홀의 진짜 모습이었다.
“……참으로 얄궂지.”
그을음으로 뒤덮인 손을 내려다보며 디하트가 읊조렸다.
“그녀가 내게 시집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그건 이미 선대에 결정된 일이었습니다.”
중앙과의 사이를 돈독히 하기 위한 정략결혼. 그건 디하트의 아버지인 선대 공작의 의지였다.
“그래. 그분은 언제나 그 같잖은 평화를 사랑하셨으니.”
디하트가 냉소했다. 라이언이 그의 곁에 다가서며 다급히 말을 얹었다.
“세벨리아 님이 힐렌드 홀에 오신 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닙니다. 그저 상황이 그러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잘 굴러가지도 않는 혓바닥으로 용케 위로하려 애쓸 필요 없다, 라이언.”
디하트가 건조한 눈으로 라이언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누가 내게 왔든 결과는 똑같았을 테니까.”
“그런…….”
“그녀는 운이 없었던 거야.”
디하트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검은 머리칼 아래, 지친 금빛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리어졌다.
‘하필이면 나 같은 걸 남편으로 맞이한 게 그녀 인생의 가장 큰 불운이었지.’
디하트는 탁한 눈으로 중얼거리다 책장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책 무더기를 이리저리 헤쳤다.
그래, 애초에 그녀가 제게 시집오지 않았다면 중앙의 첩자 짓을 할 이유도 없었으리라.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디하트는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을 회상하며 뻑뻑한 두 눈을 겨우 감았다. 그때 차라리 이딴 결혼 따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며 강짜를 놓을 것을. 당신 같은 사생아는 믿지 못하겠다며 다른 이를 데려오라 역정이라도 낼 것을.
“나는 그때 왜 그녀의 손을 잡아서…….”
디하트가 형체조차 남지 않은 의자 위로 털썩 주저앉으며 얼굴을 감쌌다.
“하, 지치는군.”
불면에 시달린 지 벌써 사흘이 넘었다. 몸의 긴장을 완화시킨다는 약초도 불면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라이언은 고통에 신음하는 주인을 먹먹한 눈으로 응시했다. 이건 그가 함부로 손을 댈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만 가서 네 할 일을 하도록 해.”
디하트가 축객령을 내렸다.
“가서 숙모의 방을 추가로 조사하고 그분들의 하인들을 불러 모아 따로 취조해라. 그리고……. 그래, 그 페터 한슨이라는 자의 행방을 추적해 데려와.”
그자도 공범일 테니. 디하트가 덧붙였다.
라이언은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을 했다. 그러나 이내 굳게 다문 턱에 힘을 주고 고개를 숙였다.
“성과가 나오는 대로 보고 올리겠습니다.”
디하트는 답하지 않았다. 라이언은 천천히 뒤돌아 라쉬의 방을 나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본 모습은 디하트가 두 손으로 잿더미를 움켜쥐고 있는 장면이었다.
* * *
그 후로 한참이나 디하트는 불에 타 끔찍한 꼴을 하고 있는 본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공작님, 식사를……헉!”
하인들은 몇 번 그를 찾으러 들어갔다. 그러나 숨통을 조이는 살기에 겨우 도망칠 뿐이었다.
“이걸로는 부족해. 제대로 된 증거가…….”
제때 먹고 자지 못해 검게 가라앉은 눈 밑과 도드라진 턱선.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머리와 그을림에 더러워진 옷까지. 화마로 부서진 잔해를 뒤지는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미치광이였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말릴 수 없었다.
세벨리아가 살해당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찾고야 말겠다는 그의 집착은 이미 평범한 수준을 넘었으니까.
그렇게 다음 날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밝도록 디하트는 무너질 것처럼 삐걱거리는 본관에서 나오지 않았다.
“공작님!”
결국 참다못한 라이언이 수색에 나섰을 때 그는 라쉬의 방도, 그렌의 방도 아닌…….
“정신 차리십시오!”
자그맣고 답답한, 창고 같은 세벨리아의 방에서 정신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 * *
세벨리아는 간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힐렌드 홀의 작은 방에서 눈을 뜨는 꿈이었다. 마치 저택을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그녀는 자연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나 하루를 시작했다.
하녀가 문 앞에 내던지고 간 스프와 빵을 먹고, 소매가 반쯤 떨어진 옷을 다시 수선하고, 벽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그녀와 함께 이 방에 있다는, 그런 기묘한 위화감.
“……아.”
세벨리아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당황스러움에 몸을 일으켰다. 언제 열렸는지 모를 문가에 누군가 멍하니 서 있었다. 세벨리아는 주춤거리며 상대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세상이 일시에 뒤집혔다.
화악-!
온통 회색빛이었던 작은 방은 갑자기 불길에 휩싸였다. 검은 연기가 사방을 에워쌌다.
“이게 무슨……!”
세벨리아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상대와 자신 사이에 검은 불길이 솟아 있었다.
그제서야 세벨리아는 제 방에 찾아올 사람이 데니사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데니사, 데니사야?!”
그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기 있지 말고 어서 도망가!”
매캐한 연기가 코와 입을 가득 메웠다. 세벨리아는 점점 정신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통 속에서 겨우 쥐어 짜낸 듯한, 가녀린 울림.
“세벨리아.”
누구의 목소린지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부름이었다.
“헉!”
그녀는 눈을 떴다. 북부의 얼음처럼 투명한 햇살이 아닌, 부드럽고 따사로운 햇살이 뺨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아….”
꿈이었구나. 세벨리아는 아연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하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세벨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꿈이라서 다행이다.”
힐렌드 홀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데니사와 함께 불타 죽는 꿈이라니. 정말 너무하잖아.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닦으며 세벨리아는 흐린 미소를 지었다.
* * *
“허억!”
디하트는 물에서 건져 올려진 물고기마냥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정신을 차린 그의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세벨리아.”
그는 죽은 부인의 이름을 부르며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에도 세벨리아는 없었다. 마치 그가 본 게 신기루였던 것처럼,
“세벨리아, 어디 있어요. 부인…!”
그는 성치 않은 몸을 일으켜 방 안을 횡단했다. 쓰러지기 직전 보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건 ‘진짜’ 세벨리아였다. 그를 두려워하며 동시에 다가오려 애쓰던 생전의 그녀였다.
디하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가짜 세벨리아는, 환각초를 피워야지만 보이는 환영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만을 해 주고, 보고 싶은 모습만 보여 주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 마주친 세벨리아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고, 마치 독립된 자아를 가진 것처럼 행동했다.
그 순간, 세벨리아의 마지막 외침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데니사, 여기 있지 말고 도망가!]“데니사, 데니사. 데니사라……. 잠깐.”
방 안을 서성이던 그가 문득 자리에 멈춰 섰다. 그는 큰 소리로 라이언을 불렀다. 그리고 다급함을 지우지 못한 어조로 물었다.
“세벨리아의 유모라던 그 여자는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