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6)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6)화(26/171)
“제길.”
데니사가 이미 중앙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은 디하트는 낭패감에 젖어 있었다.
“떠난 걸 누구도 몰랐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갈라진 입술 사이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곁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라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자책하실 필요 없습니다.”
감정 상태가 파도를 치는 상관에 비해 그는 차분한 모양새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디하트를 말리는 걸 포기한 것뿐이지만.
“애초에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아무도 그녀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공작님만이 그녀를 기억하지 못한 게 아니라는 거죠.”
데니사라는 여인은 평소에도 존재감이 없는 편이었다. 디하트를 섬기는 라이언 또한 세벨리아와 함께 있는 그녀를 종종 보긴 했으나 그것뿐이었다. 사람들의 기억에 잘 남지 않는 평범하고 흔한 인상. 별다를 것 없는 유모 출신의 하녀.
“심지어 그 유모의 이름도 모르는 하인들이 대다수이지 않았습니까. 물론……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라이언이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이름을 모르는 존재는 부를 수 없다. 모습을 떠올릴 단서가 없으니 그대로 기억 속에 묻혀 버리는 것이다.
“그래. 그 녀석들은 그녀가 누구를 섬겼는지도 몰랐지, 젠장. 이 빌어먹을 저택의 그 수많은 하인 중 누구도!”
힐렌드 홀은 두 개의 사냥터와 구릉을 포함한 유원지, 호수와 들판이 있는 거대한 장원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 종사하는 이들은 매일 부대끼는 사이가 아니면 서로에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세벨리아의 죽음에 의문을 기하며 날뛰는 내내, 아무도 데니사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내가 그녀를 저택 밖으로 쫓아냈으니까.’
힐렌드 홀 밖에서 숙식하고, 출근해서는 세벨리아의 방에 콕 박혀 있는 게 일과의 전부인 데니사.
그녀는 당연히 그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힐렌드 홀 안주인의 하나뿐인 하녀이거늘. 누구 하나 기억을 못 한다는 게 말이나 되나!”
디하트가 자리에 주저앉으며 역정을 냈다.
“하나같이 오만해서는, 제가 뭐라도 된 것 마냥…….”
그러나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 대상이 바로 자신이라는 점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스스로가 어리석고 하찮게 느껴졌다.
“중앙에 파견한 이들에게 소식을 보냈고, 혹시나 해서 기사들을 새로 꾸려 추가로 보냈으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라이언이 정리된 서류를 그의 책상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그 유모라는 사람이 공작님의 의혹을 해결시켜 줄 만한 인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무심한 라이언의 말에 디하트가 그를 불쾌한 듯 노려보았다. 그러나 라이언은 낯빛 하나 바뀌지 않았다.
타인에 대한 의심과 불신이 극에 달해 결국 부인의 죽음이 타살이었다 믿는 상관과는 달리, 자신은 아직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으니까.
“일단 유모가 도착하면 겁주지 마시고,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녀와 마주 앉아 농담 따먹기라도 하란 말이냐.”
그 유모에겐 내가 천하의 개자식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을 텐데.
“날 보자마자 저주를 퍼붓지나 않으면 다행이겠군.”
디하트가 냉소하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모양인 듯싶었다.
“안 되겠다. 그녀가 북부로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너무 늦어. 내가 직접 가야겠다.”
“공작님.”
“숙부 부부의 일은 네게 위임하마. 너라면 내가 돌아올 때까지 할아버님들을 막아 낼 수 있겠지.”
빠르게 명령을 쏟아 낸 디하트는 순식간에 집무실을 벗어났다. 붙잡을 새도 없었다.
“이런.”
라이언은 긴 한숨을 내쉬다 자신을 바라보는 초록빛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항구에서부터 데려온 금빛 깃털의 새였다.
“……그나마 네가 여기서 가장 정상이로구나.”
북부에 도착한 뒤로 다시 노래를 부르지 않는 새를 바라보며 라이언은 한숨을 삼켰다.
* * *
세벨리아로부터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데니사는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처음 느낀 건 세벨리아에게 보낼 편지를 들고 우편국에 가던 날이었다.
‘꿈속에서 누군가 도망치라고 소리쳤던 것 같은데.’
그날 꾼 꿈 탓일까, 어딘지 께름칙한 기분을 느끼며 데니사는 집을 나섰다. 그리고 대로변에 접어든 순간. 그녀는 상점 유리창에 비친 낯선 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날 보고 있었어.’
머리털이 쭈뼛 섰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해 봤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공포가 차올랐다.
하지만 데니사는 태연을 가장하고 눈이 마주친 상대에게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길을 가다 우연히 시선이 마주친 상대에게 인사를 하듯이 말이다. 그러자 상대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데니사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상대는 곧 등을 돌려 다른 골목으로 사라져 버렸다.
데니사는 그제야 유리창으로부터 등을 돌려 그 자리를 빠르게 벗어났다.
“세상에.”
데니사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하마터면 눈이 마주친 순간 그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일단 우편국으로 가는 건 미루도록 하자.’
만약 자신을 미행하는 게 맞다면, 상대의 진짜 목표는 세벨리아일 게 뻔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데니사는 왔던 길을 돌아가려다 우뚝 멈춰 섰다.
‘집까지 알고 있을까?’
갑작스럽게 맞이한 상황에 데니사는 패닉에 빠졌다.
이대로 집에 돌아가는 게 맞는 걸까. 하지만 집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미행을 알아차렸다고 느낄 텐데.
‘지금 내 수중에 얼마가 있지? 아가씨가 있는 곳까지 갈 여비가 되나?’
데니사는 제 머리가 점점 엉켜 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니야, 일단 편지부터 보내자. 그래야 아가씨가 치료를 받으러 가실 테고…….’
억지로 생각을 이어 나가는 와중에도 눈앞이 막막했다. 가슴이 콱 틀어막힌 기분이 들었다.이럴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 제게 답을 알려 주면 좋을 텐데.
그 순간,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챘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건…… 크윽!”
데니사는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양산을 횡으로 휘둘렀다. 자신을 미행하던 이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허억…….”
“저리 꺼…… 헉. 어머, 세상에!”
그러나 정확하게 옆구리를 가격당해 비틀거리는 남자는 그녀가 상상도 못 해 본 사람이었다.
“……공작님?”
피멍이 들었을 게 분명한 옆구리를 내리누르며, 디하트는 눈을 치떴다.
‘이게 무슨 일이야.’
데니사는 순간 숨을 들이켰으나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일단 침착하자.’
심호흡을 한 그녀는 지극히 예의 바른, 그리고 거리가 느껴지는 태도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공작님. 헌데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신지요?”
흠잡을 데 없는 인사였으나 양산을 휘두른 것에 대한 사과는 없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저주를 퍼부을 거라는 디하트의 예측이 어느 정도는 틀리지 않은 셈이다.
“요새 힐렌드 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소식은 전해 들었습니다만…….”
데니사가 말끝을 흐리며 디하트의 차림새를 흘끗 눈으로 훑었다. 언제 빗었는지 완전히 헝클어진 검은 머리와 구색이라도 맞추려 대충 껴입은 고급 셔츠. 그리고 마치 사랑하는 이를 잃은 절망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동자라니.
‘설마 기사에 실린 내용이 사실이란 말인가.’
공작부인을 잃고 실의에 빠져 이성을 놓았다는 게, 사실이라고?
‘감히 이제 와서.’
그 얼토당토않은 모습에 데니사의 눈매가 점점 서늘해졌다. 디하트가 비뚤어진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위험해 보이는 것 같아 도와줬더니 감사 인사는커녕 옛 주인에게 폭력이나 행사하는 인물인 줄 몰랐군.”
제 말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데니사를 보며 디하트는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세게 눌렀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몹시 화가 났으나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나와 할 이야기가 있을 걸로 아는데.”
세벨리아의 죽음에 대한 진상에 가장 가까운 이는 데니사, 그녀 하나뿐이었으니까.
* * *
한편, 세벨리아는 꾸준히 진행되는 병세에 날로 수척해지고 있었다.
‘……음식을 먹을 수가 없어.’
힐렌드 홀에서 먹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영양가 높은 음식들을 앞에 두고도 그녀는 마른침만 삼켰다. 보기에만 좋은 이 음식들은 아마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돌덩이처럼 얹히리라.
세벨리아는 쓰게 웃으며 묽은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하…….”
담담히 내리깐 눈 위로 회한이 스쳤다.
‘그래. 이게 내 운명이지. 잠시나마 헛된 기대에 흔들릴 뻔했어.’
피식, 하고 체념의 기색이 담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걸린 병은 리히스 병이 맞았다.
세벨리아는 얼시크의 의원이 해 준 말을 떠올리며 천천히 미지근한 물을 들이켰다.
[지금은 내장기관이 천천히 움직임을 멈추는 단계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손발 또한 점점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게 될 겁니다.]바로 오늘 아침, 세벨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발목을 접질렸다. 겸사겸사 어깨와 허리도 조금 다쳤다. 그리고 이 비극적 사고의 원인은 자신의 비몽사몽 한 정신 상태도, 발밑의 푹신푹신한 러그도 아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어.”
바로 그 순간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 제 발과 손이 범인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세벨리아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뒤, 다시 만난 의원은 그녀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며 말했다.
[……리히스 병이라 하더라도 그 남자라면 어떤 방법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찾아가 보세요.]왜 그렇게 내가 살길 바라는 거지.
세벨리아는 일순간 의문이 들었다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깨달았다.
‘……나, 불치병이 아니길 바랐구나.’
푸른 눈동자에 어린, 지치고 낡은 절망을 들여다보며 세벨리아는 깨달았다.
실은 치료를 받고 싶었구나.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구나.
그리고 그 기대에 확신을 불어넣어 주길 바라며, 누군가 내 등을 떠밀어 줬으면 해서 데니사에게 편지가 오길 기다렸구나.
‘데니사라면 분명히 치료를 받으라고 할 테니까.’
나는 어쩜 이렇게 겁쟁이일까.
세벨리아가 사색에 빠져 있는 사이, 직원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204호에 머무르시는 손님, 맞으십니까?”
“네, 무슨 일이죠?”
“방에 계시지 않아서 찾아왔습니다. 손님 앞으로 속달 우편이 배달되어서요.”
직원이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흰 편지 봉투를 올려놓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