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7)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7)화(27/171)
처음에는 데니사가 보낸 것인지 몰라보았다.
그도 그럴 게, 데니사는 그런 식으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으니까.
‘누가 보낸 거지?’
잘못 왔나 싶었지만 주소는 정확히 그녀가 머무는 곳으로 되어 있었다. 결국 세벨리아는 편지를 챙겨 방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레터 나이프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이건.”
자그마한 쪽지 하나가 그녀의 손 위로 떨어져 내렸다. 어디선가 찢어 낸 듯한 종이 위에는 휘갈겨 쓴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목적지를 변경합니다. 당장 떠나세요. 공작님이 찾아오셨습니다.]세벨리아의 푸른 눈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며 쪽지가 구겨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시간은 다시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
“나와 할 이야기가 있을 거로 아는데.”
디하트가 억누르듯 내뱉은 말에 데니사는 약간 당황했다. 결백한 상태로 힐렌드 홀을 떠났으면 모를까, 그녀는 그로부터 아주 큰 비밀 하나를 숨기고 있었으니까.
바로 세벨리아의 가짜 장례식을 도와줬다는 비밀을.
하지만 꼬리를 든 의심은 금세 기운을 잃었다.
‘아무 증거도 남기지 않았어.’
시체는 완벽했고, 사망 확인 또한 잡음 없이 처리되었다. 의원인 페터는 남쪽으로 내려간 지 오래고, 자신은 오래 모시던 주인을 잃고 실의에 빠져 고향으로 돌아왔다.
‘흠잡을 데 없는 시나리오지.’
자신감을 찾은 데니사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대는 알 거야. 알아야만 하고. 알지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크나큰 수치겠지.”
어느새 고통이 가신 건지, 디하트가 몸을 똑바로 세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태양을 등지고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금빛 눈동자는 섬뜩했다.
“자네는 끝까지 세벨리아의 곁을 지킨 하나뿐인 하녀이지 않나.”
데니사는 저도 모르게 오한이 일었다. 그녀는 뒷걸음질 치자 디하트가 성큼 그 거리를 좁혔다.
“말해 보게. 아무것도 모르는 일개 유모 출신 하녀가 왜 낯선 이들에게 쫓겨 다녔는지.”
전부 다 보았구나.
데니사는 목 뒤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죄송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하.”
디하트가 코웃음을 쳤다.
“무슨 일로 중앙까지 발걸음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원하는 바를 이루시고 가시길 바라겠습니다.”
“원하는 바를 이루라고, 참 감명 깊은 작별인사로군.”
“그럼 평안한 시간 되시길.”
그녀는 고개를 숙이는 동안에도 있는 힘을 다해 평정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말처럼 ‘일개 하녀’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운 상황이었으나 그녀는 가까스로 해냈다. 제 등을 불태워 버릴 것 같은 디하트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발걸음을 옮겼으니 말이다. 그러나 데니사는 머지않아 뒤를 돌아봐야만 했다.
“……힐렌드 홀에서는 세벨리아의 죽음을 타살로 보고 수사 중이다.”
“예?”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디하트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는 네가 부인의 유일한 측근으로서 쓸모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만…….”
검은 머리칼 사이로 섬뜩한 빛이 널뛰는 눈동자가 데니사를 훑었다.
“이리 수상하게 구는 꼴을 보니 생각이 달라지는군.”
데니사가 숨을 삼켰다. 디하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그래, 너도 내 아내를 배신했나?”
“무슨 소리를……!”
“아니라면 그녀가 죽기 전까지 어떤 모습이었지 말해 봐. 무슨 생각을 하고, 무엇을 보며 웃었고, 무슨 말들을 했는지 증언해 보라고.”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의식적으로 나오는 것들이 아닌 듯했다.
“숙모와 함께 있을 때의 그녀는 어땠지? 혹시 그녀를 만난 후 불안해하거나, 통증을 호소한 적은 없었나? 만약 그렇다면…….”
데니사는 아연한 눈으로 디하트를 바라보았다.
이해 못 할 질문을 내뱉는 그의 입은 괴로운 듯 일그러져 있었고, 냉정하게만 보였던 금빛 눈 위로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세상에나.’
데니사는 그제야 눈앞의 남자 또한 저처럼 가까스로 평정을 꾸며 내는 중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미쳤다고 떠들어 대는 기사들이 전부 과장은 아니었다는 데에 동의했다.
‘정말로 아가씨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믿고, 범인을 찾기 위해 날 찾아온 거라면…….’
그렇다면 그는 세벨리아의 죽음에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사이가 나빴던 부인의 죽음을 캐내겠답시고 일개 하녀를 직접 찾아올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왜?’
데니사는 혼란스러웠고 동시에 그가 원망스러웠다.
‘하필이면 왜 이제 와서.’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세벨리아가 한때 눈앞의 이 남자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웨든 후작 때문에 누명을 쓰고 그에게서 내쳐졌을 때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그리하여 결국 모든 걸 내려놓은 채 힐렌드 홀을 떠나며 얼마나 자유로워졌는지.
“나는 알아야만 해. 그녀가 죽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고 또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제대로 우는 방법도 모른 채, 그저 상대를 윽박지르며 제 상처를 드러내 보이는 남자 앞에서 데니사는 착잡한 숨을 내쉬었다.
* * *
제멋대로 힐렌드 홀을 맡겨 버리고 튀어 버린 주인 덕에 라이언은 바쁘고 골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도 당연히 그런 날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던 탓일까.
“공작께서는 어딜 가고 자네가 그 자리에 있는 건가?”
2대 전 공작의 형제이자 선대 공작의 삼촌인 림스 후작이 바야흐로 힐렌드 홀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문제는 그가 정말로 힐렌드 홀 저택의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후작님의 뜻이 워낙 강경하신 데다, 저로서는 도무지…….”
“됐습니다, 이제스.”
그렌과 같이 심문 중인 그로스의 후임으로 발탁된 젊은 집사는 확실히 기백으로 밀릴 상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림스 후작님. 공작님께서는 다망하시어 부득이하게 제가 손님을 맞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공작의 곁에는 이렇게 말만 번드르르한 녀석들만 있나.”
림스 후작이 탐탁지 않은 기색을 내보이며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허나 잘되었군. 꼴을 보아하니 공작이 힐렌드 홀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방임하고 있다는 건 아주 잘 알겠어.”
“후작님, 판단이 섣부르십니다.”
“일개 기사가 뭘 안다고 감히 내 말에 토를 다는 겐가.”
백발이 성성한 림스 후작이었으나 그 기백은 호시절의 기사들 못지않게 담대했다.
실제로 그는 무위에 있어 그의 형제였던 인버네스 공작보다도 뛰어났고, 그 덕에 북부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렇게 그 명성과 영광은 당대에까지 이르러 디하트 따위야 림스 후작의 눈에는 무르익지 않은 애송이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 놓고 힐렌드 홀의 문을 부쉈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문의 일이야. 아무리 공작이 그대에게 일시적인 대행을 맡겼다 하나 그 선이라는 게 있는 법!”
림스 후작은 난장판이 된 집안의 기치를 바로 세우겠다 나서고 있었다.
‘라쉬 경 부부를 빼내러 온 것이군.’
속이 뻔했다. 지난날, 라쉬 부부를 디하트의 보호자로 점찍은 게 림스 후작이었으니까.
라이언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림스 후작은 그답게 물러서지 않았다.
“……일단 방으로 모시지요.”
못마땅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림스 후작을 지나치며 라이언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공작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겠군.’
골이 다 아팠다.
* * *
머리가 뜨거웠다.
아니, 뜨거운 건 목구멍인 듯싶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다 보니 어느새 뱃속이 절절 끓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 이런 또.’
정신을 차린 디하트의 눈에 데니사가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중년의 여인에게서는 익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한낮의 나른하고 포근한 햇살 같은, 축축한 그림자를 밀어내는 부드러운 미풍 같은 분위기.
‘……그녀가 누굴 닮았는지 알 것 같군.’
어디를 봐도, 무엇을 해도 떠오르는 세벨리아에 대한 생각에 디하트는 미칠 것 같았다. 이대로 주저앉아 모든 걸 놔 버리고 싶다가도 그럴 순 없다며 뛰쳐나가 세상에 불을 질러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둘 다 안 되지.
‘안 되고 말고.’
세벨리아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캐내기 전까지 제게는 후회도, 용서도, 자포자기도 허락되지 않았다.
으득.
손목을 깨물어 상처를 내자 그제야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디하트는 미치광이를 보는 듯 저를 바라보는 데니사의 시선에 실소를 흘렸다.
“어차피 그대는 나와 함께 갈 수밖에 없어.”
“공작님, 도대체…….”
데니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안타까운 숨을 내쉬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원하시는 바를 들어드릴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세벨리아 님이 타살되었다고 생각하게 되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생각하고 계신 건 모두 오해예요.”
그녀는 디하트를 어르듯 말을 꺼냈다. 원한다면 그가 쏟아 낸 질문에 대한 답을 모두 해 줄 요량이었다.
“설사 제게 무슨 비밀이 있다 해도 그게 세벨리아 님의 죽음과 관계되었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디하트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그렇게 적선하듯 아무렇지 않게 받아 낼 수 있는 걸 원하는 게 아니었다.
“하…….”
한숨을 쉰 그가 고개를 숙여 데니사와 시선을 맞췄다.
“잘 듣게. 대각선 거리에 노천 카페 테이블이 보이나?”
“예?”
“대답하지 말고 들어. 그곳에 앉아 있는 다정한 커플이 자꾸만 너를 눈으로 쫓더군. 왜 그럴까.”
데니사의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디하트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방금 지나친 상점 뒷골목, 담배를 피우는 척 이십 분 넘게 앉아 있는 청년 셋.”
그제야 데니사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아, 엘라드 스트리트 231가 5-1번지 앞을 3시간마다 지나가는 여인이 있던데. 알고 있나?”
“…….”
“오늘 아침에는 그대가 늦잠을 자는 게 궁금했나 창문 안을 엿보던데.”
배려심 깊게, 다정한 태도로 알려 주는 이야기는 단 하나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누군가 나를 목표로 삼고 있었어.’
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건 제 신변에 아주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게 확실했다. 얼어붙은 데니사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디하트가 상냥하게 몰아붙였다.
“그래. 세벨리아와 관계되지 않은 그대의 사생활로 인해 납치되는 건 나도 상관하지 않지.”
유려한 말과 함께 금안이 호선을 그렸다.
“하지만 내 부인의 유모가 끔찍한 꼴을 당하는 걸 눈앞에서 보고도 방관하는 건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야. 그렇지 않나?”
데니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