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8)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8)화(28/171)
그리고 전후 사정 설명 없는 단도직입적인 편지를 받은 세벨리아 또한 어쩔 도리가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가 갑자기 데니사를 찾아왔다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세벨리아는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으나 곧 불가능한 일임을 받아들였다.
“도대체 디하트가 데니사를 찾아갈 일이 뭐가 있단 말이야.”
북부, 특히 인버네스 가문의 이야기를 꺼리는 동부에서는 힐렌드 홀에 관한 가십에 중앙처럼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때문에 세벨리아는 자신의 장례식 이후 힐렌드 홀의 분위기가 안 좋아졌다는 것까지만 알지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세벨리아는 데니사의 쪽지에 해가 서쪽에서 떴다는 말을 들은 것처럼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런 접점이 없잖아.”
하지만 아무리 현실을 부정해도 편지에 적힌 글자는 한 글자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
세벨리아가 머리를 짚으며 신음했다. 연유는 몰라도 어찌 되었든 데니사는 디하트로부터 시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시달림이 자신에게까지 뻗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떠나라고 요청하는 거고.
‘상황은 모르겠지만 일단 데니사의 말대로 하자.’
세벨리아는 옷장 문을 열어젖히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위기 상황에 닥치니 평소보다 머리가 더 잘 굴러가는 것 같기도 했다.
‘데니사가 편지를 보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디하트가 그녀를 구금하거나 고문하지는 않았다는 소리야.’
전남편을 상대로 하기에는 흉악한 추측이었지만,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다.
“하지만 목적지를 변경하라는 건…….”
세벨리아의 미간에 작은 골이 파였다. 본래 세벨리아와 데니사는 동부 끄트머리의 작은 소도시에 정착하기로 했었다.
그곳에 미리 집까지 봐 두었는데, 이제 와서 목적지를 변경하라는 말은 하나밖에 되지 못했다.
“구금되어 있지는 않지만,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거나…… 아예 내게 오기 힘들어진 거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세벨리아는 머리가 쪼개지는 것 같았다.
‘동부에 집을 사 둔 것까지 들킬 수 있는 상황이니 다른 곳으로 가라는 거겠지.’
그렇게까지 심각한 상황인 건가.
“……하.”
갑작스럽게 터진 일 때문일까. 심장이 빠르게 뛰고, 스트레스로 인해 눈앞이 아찔했다.
“어지러워.”
마치 힐렌드 홀을 떠나기 직전, 주술사를 보았을 때와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아직 불안하기만 한데, 상대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듯한 끔찍한 기분.
“……하지만 결국 성공했잖아.”
그 차갑고 냉정한 곳을 떠나 자유로워졌잖아. 세벨리아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그녀의 시선이 가방 안에 놓인 소견서 봉투로 향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생각지도 못한 미래를 안겨 줄지도 모르는 그 미약한 기대의 총체.
그걸 바라보는 세벨리아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사라졌다. 그리고 홀가분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쩌면 이렇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몰라.”
무의식중의 일이었다. 세벨리아는 스스로 말해 놓고도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의원소를 나오기 전 보았던 지친 눈빛이 아니었다. 안개가 개인 듯한 푸른 눈동자는 일견 만족스러워 보였다.
마치 고민하던 일이 바라던 방향으로 해결된 것처럼 기분 좋은 듯한 눈빛이었다.
“아.”
깨달음이 번개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수치심에 뺨이 붉어졌다.
“……또 이렇게 등을 떠밀리는 상황에 처해서야.”
위기가 목전에 와닿아서야 나는 내 얄팍한 욕망에 솔직해지는구나.
“믿을 수가 없네.”
씁쓸한 미소와 함께 세벨리아는 여행 가방을 닫았다.
살고 싶다는 욕망, 안전한 죽음이 아닌 불확실한 미래를 기대하는 소망은 분명 얄팍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벨리아는 한평생 스스로의 욕망에 대해 솔직해져 본 적이 없었다.
원하기 전에 선택의 가능성을 빼앗겼고, 무언가에 호감을 드러내면 바로 그 취향을 경멸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스스로를 위해 떠나면서도 한동안 자괴감에 몸부림쳐야만 했다.
“나란 사람은 어디까지 부족한 건지…….”
그리고 그런 그녀와 비슷하지만 다른, 디하트 또한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비록 다른 층위의 고통이었지만.
* * *
“큭…….”
의자에 기대듯 앉아 있는 디하트는 상의를 벗어 던진 채였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그의 허리에는 큼지막한 푸른 멍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끔찍하게도 점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기사가 디하트의 허리에 약재를 붙이고 새 붕대를 두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시퍼런 독설이 쏟아졌다.
“이게 괜찮아 보이나? 그런 것도 눈이라고 달고 다니다니 믿을 수가 없군. 차라리 길거리에 나가 필요한 이에게 적선이라도 해.”
숨이 막힐 듯한 독설임에도 기사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는 디하트가 그래도 아직 제정신이란 걸 확인하고 물러났다.
혼자 남은 디하트는 말없이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무감한 얼굴 가운데 두 눈동자만이 번뜩였다.
“그래, 그 정도는 해야 감히 모시던 주인을 해코지할 생각을 하는 거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의 안에서 데니사는 이미 세벨리아를 배신한 가증스러운 하녀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 판단에는 데니사가 그의 뒤통수를 치고 도망간 것이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미 꼬리는 잡혔어.”
디하트는 손안에서 구겨진 편지를 내려다보며 덤덤하게 말했다. 데니사의 집에서 가져온 편지였다.
“……이번에야말로 놓치지 않을 거다.”
무심한 듯한, 그러나 끈질긴 집착이 서린 음성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밖에서 대기하던 기사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에휴…….”
그는 도망친 여인에게 닥칠 끔찍한 미래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오래 못 갈 텐데 왜 그런 짓을 했대.’
기사는 한숨과 함께 이 일의 원흉이 된 날을 떠올렸다.
* * *
그러니까…… 처음에는 모든 게 다 순조로웠다.
“공작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디하트가 그녀를 감시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가며 설득 같은 협박을 한 결과, 데니사는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저도 불미스러운 일로 한순간에 목숨을 빼앗기는 처지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요.”
담담히 말해 오는 데니사의 모습에 디하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 생각한 것만큼 어리석지는 않군.”
그렇게 디하트는 데니사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그녀를 제 거처로 데려왔고, 며칠에 걸쳐 심문 아닌 심문을 시작했다.
“내가 가장 궁금한 건 내가 떠난 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다.”
물어뜯은 흔적이 남은 손톱이 책상을 툭툭 내리쳤다.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떠난 날, 그리고 그 후……. 그녀가 죽기 전까지의 일. 그 시간 동안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야겠어.”
말을 하면서도 목이 메이는지 그는 이따금 헛기침을 내뱉었다.
데니사는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응시하다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공작님도 아시겠지만, 마님은. 아니, 아가씨라고 부르겠습니다.”
“좋을 대로 해.”
“아가씨께서는 생각하신 것만큼 실망하시지도, 상처받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뭐?”
디하트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책상을 내리치던 손이 그대로 허공에 굳었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그를 앞에 두고 데니사는 묵묵히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보답받지 못하는 애정에 이미 오랜 기간 지쳐 있으셨지요. 그러니 결혼기념일을 함께 보내지 못하는 일은 그분의 굳어 버린 피를 더 단단하게 만들 뿐, 그 이상의 상처는 내지 못했습니다.”
그건 디하트의 생각보다 더 끔찍한 이야기였다.
“그대 말은…… 그러니까.”
갈라지고 튼 디하트의 입술이 수차례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했다.
“그녀가 이미 나를 포기했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예.”
데니사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디하트의 금안은 빙하처럼 얼어붙었다.
“이미 아가씨는 공작님께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보내신 상태였습니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그녀가 내게 가진 죄책감이 얼마나 큰데. 내게 입힌 상처가 얼마나 끔찍한데.
그런 날 두고 그녀가 먼저 내 곁을 떠날 리가…….
“……!”
디하트는 무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몸서리를 쳤다.
이미 한 번 그녀를 잃어 놓고, 또다시 그런 추하기 짝이 없는 생각에 사로잡히다니.
창백하게 굳어 말을 잇지 못하던 디하트가 이내 손을 내저었다.
“한 시간 뒤에 다시 와라.”
속이 울렁거렸다. 디하트는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뻗어 약병을 열었다.
그렇게 비슷한 나날이 반복되었다. 디하트는 세벨리아의 죽음에 대한 진상을 캐내기는커녕, 생전의 그녀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자신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했는지만 여실히 깨닫고 말았다.
‘나는……, 난.’
그러다 가끔씩 데니사는 그렌과 플로라가 세벨리아에게 가한 괴롭힘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플로라 님이 아가씨의 지참금에 마음대로 손을 댄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추후에 증거로 쓰기 위해 따로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그렇게 협조적인 날이 이어지던 가운데 어느 날, 데니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세벨리아 님이 몰래 쓰시던 일기장이 있습니다.”
“그걸 왜 이제 서야 밝히는 거지?”
디하트가 날카롭게 물었으나, 데니사는 덤덤하게 그의 추궁을 흘려보냈다.
“그날의 감상을 짧게 적은 메모 같은 일기니까요. 허나 공작님께는 도움이 될 것 같아 말씀드리는 겁니다.”
“위치를 말해라. 기사들에게 가져오라 이르지.”
“아뇨. 그분이 제게 직접 남기신 유품입니다. 다른 이의 손에 맡길 수 없어요.”
디하트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데니사를 보았으나 이내 허락했다.
그도 제 물건이 타인의 손을 타는 걸 무척 싫어하는 성격이었으니까.
그렇게 디하트는 데니사를 끌고 몇 명의 기사와 함께 엘라드 스트리트로 향했다.
“너희는 이곳에서 수상한 자들이 지나가지 않는지 확인해라.”
디하트는 데니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갔고, 빌어먹게도 그곳에서 그녀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용서하세요, 공작님.”
멍든 옆구리를 정확하게 찔러 들어오는 날카로운 감각에 그는 신음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망상이 잘못되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너, 지금 이게…….”
뚝, 뚝.
예리한 펜촉 끄트머리에서 검푸른 수면독이 뚝뚝 흘러내렸다.
“제발 이대로 그분을 놓아드리세요.”
안타깝게도 속삭이는 말은 디하트의 귓가에 닿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