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29)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29)화(29/171)
디하트가 정신을 차렸을 땐 기사들이 그를 데리고 숙소로 돌아온 뒤였다.
“죄송합니다. 저희 모두 그 여자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
데니사는 자신을 찔러 놓고 태연한 얼굴로 나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작님께서 마님의 일기장을 혼자 읽고 싶다고 하셔서요.]기사들은 당연히 의심했으나 데니사가 먼저 그들의 의심을 해소시켰다.
[그 사이 잠시 우편국에 들릴까 하는데, 기사님들 중 한 분이 저와 동행해 주실 수 있나요?]예상하듯 그 기사 또한 데니사의 날카로운 펜촉에 당하고 말았다. 중년 여인의 기지에 건장한 두 남자가 맥도 못 추고 쓰러져 버리고 만 것이다.
“뭐라 드릴 말이 없습니다.”
가장 앞장서서 머리를 조아리는 기사의 옆에 붕대가 칭칭 동여매져 있었다. 디하트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웃음도 나오지 않는군.”
허탈함을 담은 금빛 눈동자가 눈꺼풀에 가려졌다.
“……아니, 차라리 잘되었다.”
허리를 숙인 기사들이 눈을 깜빡였다. 그들은 내심 정신을 차린 디하트가 한바탕 뒤집어 놓을 거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하트는 분노하지도,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그는 마치 안개로 가득한 미로 속을 헤매다 겨우 길을 발견한 사람처럼 보였다.
“지금 이 순간부터 데니사 로즈안을 공작부인 살해 사건의 공범으로 상정하고 추적한다.”
“그 말씀은 공식적으로 움직이란 말씀이신지요.”
“그래. 세벨리아를 그리도 지극히 아꼈다는 유모가…… 도대체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실을 밝히는 걸 꺼리는지 알아야겠어.”
자리를 털고 일어난 디하트는 이어 말했다.
“숙부 부부는 그녀가 인버네스에 ‘필요 없기에.’ 처리하고자 했지. 만약 그렇다면…… 그녀는 왜 그랬지?”
공허한 물음이 공기를 울렸다. 디하트의 눈은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그는 측근에게 배신당했을지도 모르는 세벨리아의 현실에 가슴이 아팠다.
“데니사의 개인사에 대해 추적해 봐라. 그녀의 가족이 최근 경제적으로 힘들어졌거나 중병에 걸렸는지 말이야. 난 다시 그 집으로 가야겠다.”
남기고 간 것 게 없나 찾아봐야겠어.
기사들이 쉬어야 한다며 말렸으나 말을 들을 리 없었다.
“난 멀쩡해.”
디하트는 망설임 없이 다리를 움직였고, 곧 끔찍한 통증이 옆구리부터 번져 나가는 걸 느꼈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상당한 고통이었다.
“젠장…….”
“기본적으로 수면독이지만 여러 가지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독에 당한 기사, 일레이가 창백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라이언이 디하트에게 직접 붙여 준 기사로, 라이언과는 사촌지간이었다. 라이언의 말로는 장래가 기대된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들었는데…….
이번 일을 통해 그의 장래는 그다지 기대받을 것이 아니란 게 판명난 듯했다.
“목숨에는 지장이 가지 않지만 상당한 고통을 유발하는 물질이 몇 가지 섞여 있다고 합니다.”
“…….”
“혹시 몰라 제가 먼저 치료약을 발라 봤습니다만, 효과가 괜찮더군요. 붕대를 풀고 약을 발라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라이언과 닮은 얼굴로 뻔뻔스럽게 지껄이는 그를 보며 디하트는 이를 꽉 물었다.
* * *
통증을 경감시키는 약을 바르고 일레이를 한 번 걷어찬 뒤, 디하트는 바로 데니사의 집으로 향했다.
‘겸사겸사 세벨리아의 물건이라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군.’
데니사가 세벨리아의 죽음과 관련해 꺼림칙한 연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그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으나……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치스럽게도 힐렌드 홀에 남은 세벨리아의 유품은 얼마 없었으니까.
아니, 얼마 없다는 걸 떠나 아예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내가 참 고상한 숙모님을 둬서 별일을 다 겪는군.”
그가 라이언으로부터 세벨리아의 부고를 듣고 미친 듯이 말을 몰고 있을 그 시간 동안 그렌은 착실하게 세벨리아의 흔적들을 지웠다. 저주받은 여인의 물건들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며 옷가지며 책 등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초상화가 그려진 펜던트 하나는 겨우 챙길 수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디하트는 뒤늦은 후회에 자책하며 골목을 돌았다.
그리고 때마침, 우편 배달부가 우체통에 무언가를 넣은 뒤 자리를 떠나는 게 보였다.
“…….”
운이 좋군. 디하트는 우편 배달부가 떠나는 걸 확인한 뒤, 아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우체통을 열었다. 손바닥만 한 편지봉투를 꺼내 든 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페터 한슨]“……하.”
숨을 참았다 터트리듯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오싹한 전율이 일었다.
페터 한슨. 그는 세벨리아의 사망확인서를 쓴 의원이었다. 한 장의 서류만 남겨 놓고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정체불명의 의원.
‘그런데 그 의원이 데니사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고.’
어쩐지 누가 그 의원을 데려왔는지 다들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하더니. 하인들의 증언을 떠올린 디하트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데니사가 세벨리아의 죽음과 관련하여 꺼림칙한 비밀을 손에 쥐고 있다는 게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
“그래. 이 정도로 속내를 알 수 없는 인물이라면 내가 멍청하게 옆구리를 내준 것도 이해가 가는군.”
어느새 냉소가 걷히고, 무감하게 돌아온 그는 편지봉투를 잡아 뜯었다.
애석하게도 그의 기대와는 달리 편지 내용은 너무 건전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여기 공기는 참 좋아. 최근에는 다른 의원들과 친해졌는데. 그들이…….]공기나 의원이 뭔가의 암호가 아니라면, 편지는 그저 친한 친구에게 보내는 안부 인사나 다름없었다.
“쯧.”
디하트는 한참이나 편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건질 게 없다는 건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높은 언덕과 산이 맞닿는 곳에 숨겨져 있다는 곳을 한 번 찾아보고자 해.]이상한 건 하나 있었지만.
그때, 묵묵히 그의 지시를 기다리던 기사 중 한 명이 다가와 말했다.
“공작님, 저희는 집 안을 수색하고 있겠습니다.”
디하트는 다시 편지봉투를 살피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기하던 이들이 곧장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을 돌리며 디하트가 말했다.
“마차를 준비시켜라.”
“북부로 돌아가십니까.”
“아니. 그리도 공기 좋은 남동부가 어떤 곳인지 한 번 보러 가야겠다.”
탁. 편지봉투를 손으로 튕기며 디하트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 * *
제국 남동부에 위치한 서프레디. 그곳은 높은 언덕들과 그 언덕 위에 세워진 고대 유적, 그리고 성역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하지만 그게 곧 사람들의 발길로 북적이는 관광지라는 뜻은 아니었다.
돌무더기뿐인 고대 유적과 심심하다 못해 초라한 성역을 보고 감탄할 사람들은 없었으니까.
“그래 봬도 조용하고 고즈넉해서 좋은 곳입니다. 주민들도 사제분들도 다들 다정하고 순박하시죠.”
마지막 처방전을 주며 의원이 넌지시 말했다. 마치 그녀의 선택에 힘을 불어넣어 주듯이.
“공기도 맑고 좋으니 분명 환자분의 건강에 도움이 될 겁니다.”
치료를 받겠다는 자신의 말에 감명을 받은 걸까, 의원의 눈동자 위로 물기가 비쳤다.
“참, 소개해 드린 의원을 찾아가는 방법과 준비물은 잊지 않으셨죠?”
세벨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아침에 일어나면 손끝의 감각이 무디고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없는 것보다는 나아.’
세벨리아는 의원소를 나오며 부드럽게 얼굴을 감싸는 햇살에 눈을 감았다.
“하…….”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그 감각에 온몸이 전율했다. 모순적이라 해도 좋았다. 이기적이라 손가락질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는 생각으로 모든 걸 버린 주제에 이제 와 살고자 한다는 비난을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살 수 있다면, 살고 싶었다.
육 개월이라는 시간이 끝을 알 수 없이 늘어나면 분명히 그만큼의 불행과 절망이 자신을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좋았다.
“내가 선택한 거야.”
힐렌드에서의 탈출이 자유로운 죽음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자유로운 삶을 위한 것이었다.
* * *
이건 꿈인가.
디하트는 흉측해진 저택 앞에 서서 물끄러미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세상은 희끄무레했고, 가녀린 안개 같은 것이 주변을 감싸고 있는 가운데.
오직 검게 그을린 저택만이 이질적인 뚜렷함을 지니고 있었다.
“꿈에 나올 정도로 그리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알다가도 모를 제 무의식에 의문을 표하며 디하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는 등을 돌려 몇 번 안개 속으로 발을 옮겼다. 그러나 여지없이 저택 앞으로 되돌아올 뿐이었다.
“하…….”
이 시원찮은 꿈은 제가 기어이 저택 안에 들어가길 바라는 것 같았다.
“가지가지 하는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그 순간, 그의 팔목에 걸려 있던 십자가 목걸이에서 푸른 빛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물론 어느새 성큼성큼 저택 안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한 디하트는 보지 못했지만.
“……가관이군.”
저택 안으로 들어온 디하트는 눈을 찡그렸다. 내부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다.
‘아무리 그래도 화마에 이렇게까지 부식될 리가 없는데.’
그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 복도를 걸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지가 내려앉은 구조물과 벽돌을 뚫고 들어온 담쟁이. 반쯤 내려앉은 천장과 삐걱거리는 복도는 어딜 봐도 폐가였다.
이쯤 되자 디하트는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힐렌드 홀을 그리워해서 꾸는 꿈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군.’
차라리 이렇게 망해 버리기를 무의식중에 소망하다 그게 구체화된 것이라 생각하는 게 합당했다.
디하트는 그렇게 끝이 없는 길을 걸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커다란 문 하나를 발견했다. 그건 아주 이상야릇한 문이었다.
“이건…….”
그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문을 위아래로 훑었다. 복도 끄트머리에 당당히 붙어 있는 문은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져 있었고 덕분에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건 온실로 향하는 문이었다.
“…….”
디하트의 눈이 격렬히 흔들리다 침잠했다.
“그리움도, 소망도 아니었군.”
이건 내 죄책감이 만들어 낸 꿈이었어.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오다 부서졌다.
세벨리아가 죽은 뒤, 그는 온실에 한 번도 발걸음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리라. 무심코 온실을 바라볼 때마다 그 안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으니까.
[내일이 우리 결혼기념일이에요.] [기억 못 하고 있었겠죠. 알아요. 탓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저 이번만은 꼭 함께 있어 줬으면 해요. 당신에게 전하고 싶은 게…….]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아직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유서에도 그것에 대한 말은 단 한 문장도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그날, 그녀가 제게 하고 싶은 말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분명히 냉대받을 거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내 거친 언사에 상처받을 거란 걸 알고 있었으면서.
“당신은 도대체 뭘 말하고 싶었던 거지.”
디하트는 차가운 유리문에 이마를 대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리고 그 순간, 도저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물살을 헤치고 들려왔다.
[이미 아가씨는 공작님께 마음속으로 작별인사를 보내신 상태였습니다.]그저 거짓말이라 믿고 싶은, 데니사의 담담한 말이 그의 가슴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