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3)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3)화(3/171)
라쉬는 제 손을 움켜쥔 디하트의 악력이 점점 강해지는 걸 느꼈다. 라쉬는 입술을 떨었다.
“……디하트, 나는 그저 네가 걱정되어서.”
“그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손으로 부모님 대신 직접 절 키우신 분이니까요.”
이윽고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니 다른 걱정 마시고, 부디 제가 무탈히 잘 돌아올 수 있도록 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래.”
위압 서린 목소리와 노기 섞인 눈빛에 라쉬는 입을 다물었다.
* * *
결국 라쉬는 디하트를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뒤편으로 내내 두 사람을 지켜보던 집사가 다가섰다.
“라쉬 님.”
“이걸 린 포스트에 보내게.”
라쉬는 디하트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집사에게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발신인이 적혀 있지 않은 그 편지는 그의 아내인 그렌이 준비한 것으로, 곧 인버네스를 위한 결단을 대신 내려 줄 것이다.
‘네가 못하면 우리가 해야겠지.’
라쉬는 시야에서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다 등을 돌렸다.
그의 눈에는 굳은 결의가 새겨져 있었다.
* * *
노을이 커튼 새로 손을 뻗었다. 삭막한 방에 붉은빛이 어렸다. 이윽고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디하트의 마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틈새로 밖을 엿보던 세벨리아는 곧 자리로 돌아와 창백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예쁘고 고운 손이었다. 그 누구의 손도 맞잡을 수 없고, 가벼운 꽃 하나 꺾어서도 안 되는 무용지물인 손.
‘그게 내 처지지.’
세벨리아는 쓰게 웃으며 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는 결국 떠났다. 단 한 순간도 제게 곁을 내주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 어떤 기회도 내려 주지 않았다.
“참 신기하지.”
세벨리아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냉혹하고 자비 없는 태도가 이렇게 속 시원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니.
세벨리아는 자리로 돌아와 데니사가 남긴 말을 떠올렸다. 그녀에게 자유를 향한 새로운 문을 열어 준 그 말을.
[아가씨에겐 환영 술사의 능력이 있어요.]데니사의 비밀스러운 속삭임에 세벨리아는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아버지의 지속적인 폭력에 잊어버려야만 했던 기억을.
[어릴 적 아가씨가 헛것을 본다며 후작님께서 항상 화를 내셨잖아요.]외롭던 방을 가득 채워 주던, 그녀의 반짝이는 친구들. 그리고 밤이 무서워 덜덜 떨 때마다 허공을 아름답게 수놓아 준 푸르고 붉은 새들.
[그건 아마도 아가씨의 어머님께 물려받은 능력일 거예요.]데니사는 확신하듯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후작이 그렇게까지 세벨리아의 능력을 지우려 애쓰지는 않았을 거라고. 세벨리아도 그녀의 의견에 동의했다.
“부정한 악마의 능력이라고 했었나….”
아버지는 항상 그렇게 말하며 세벨리아를 벽장에 가두고, 나무에 묶어 두었다.
“너무 오래되었나 봐. 어떻게 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힘을 발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일까.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제발, 난 이 집에서 나가야 해.’
내게는 이 힘이 필요하다고.
간절한 마음으로 세벨리아는 누구인지 모를 이에게 간절히 기도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
시야가 어질해지는 증상과 함께 뜨거운 기운이 쑥하고 뽑혀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대로 쥐었던 손을 폈다. 그 순간, 손안에서 작은 새 한 마리가 불꽃 같은 날개를 퍼덕였다. 의심할 바 없는 환영 술사의 능력이었다.
“다행이다.”
세벨리아는 종종거리는 새를 가만히 바라보다 공중으로 날려 보냈다.
삐이-
새끼처럼 작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솜털이 푸른 새는 작고 볼품없었다. 그 많은 기운을 쏟은 것치고는 너무 작았다. 그러나 새를 바라보는 세벨리아의 눈에는 기쁨이 어렸다. 성공했어.
이건 그녀에게 주어진 기회였다.
세벨리아라는 사람이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
“이 능력으로 죽은 내 모습을 만들고 떠날 거야.”
그녀는 환영으로 죽음을 가장할 계획이었다. 데니사의 말대로 아무 계획 없이 도망친다면, 후에 웨든에서 그녀를 추격할 가능성이 있었다. 남편은 뭐. 그가 따라올 거라는 생각은 해 보지도 않았다.
화가 난 시가 사람들이나 추적에 나서려나.
“하지만 내가 진짜로 죽어 버린다면.”
눈앞에서 시체를 관에 넣고 장례식을 치른다면.
어쩌다 그들과 마주친다 해도 쉽사리 동일 인물이라 믿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 손으로 내 장례를 치렀으니까.’
그 순간을 상상하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장례식은 보통 사흘 동안 거행되니까……, 그 시간을 버텨 내야 해.’
푸른 새 한 마리를 더 만들어 낸 세벨리아는 오랜만에 즐거워졌다.
이게 삶의 의지라는 걸까. 아니면, 원동력?
‘죽을 때가 되어서 느끼다니, 우습네.’
세벨리아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식사도 잊고 연습에 몰두했다.
밤이 새도록 그녀의 방문을 두드린 사용인이 단 한 명도 없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마차 안에서 고요히 눈을 감고 있던 디하트는 갑자기 발작하듯 기침을 뱉어냈다.
“제길.”
뇌를 후벼 파는 듯한 고통과 동시에 무언가가 머리를 바짝 조이는 감각이 밀려왔다. 동시에 팔다리가 저릿하더니 심장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그냥 지나가는 날이 없군.”
디하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텅 빈 웃음을 몇 번 흘렸다. 그리고 품 안에서 약병을 꺼내 입에 대충 털어 넣었다.
“하루도 잊지를 못하게 하다니, 참 다정한 가족이야.”
자조하듯 말한 그는 들고 있던 약병을 세게 움켜쥐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이윽고 쨍그랑 소리와 함께 약병의 파편들이 바닥 위로 쏟아져 내렸다.
“큿……!”
엉망이 된 입술 사이로 고통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지긋지긋한 병은 끔찍한 가족사로부터 비롯되었다.
일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한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괴롭히는 익숙한 고통.
그의 병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주치의는 죄책감에서 비롯한 병이라 말했으나 디하트는 그를 부정했다.
‘이건 저주야.’
홀로 살아남은 걸 원망이라도 하듯 그의 꿈에는 언제나 죽은 가족이 나타났다.
피를 흘리고,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언제나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살려 달라고, 함께 해 달라고, 이곳은 춥고 외롭다고…….
“젠장.”
디하트는 마른세수를 하다 제가 입술을 물어뜯었다는 걸 깨달았다. 상처투성이인 손 위로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핏물 밴 손을 노려보다 벽에 머리를 쾅 하고 들이받듯 기댔다.
“하…….”
슬슬 약효가 돌고 있었다. 그는 몸의 감각이 둔해지는 걸 느끼며 느리게 호흡했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그의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지기만 했다. 그리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할 말이 있어요.]제기랄. 디하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 얼굴을 한 거야.’
잘못한 건 당신이잖아. 날 먼저 배신한 것도, 거짓으로 내 신뢰를 얻으려 한 것도…….
디하트는 이를 꽉 깨물었다. 망막에 달라붙듯 새겨진 세벨리아의 낯선 얼굴을 지워 내려 애썼다. 등 뒤로 핀 백합처럼 고고히 서 있던 그 여인의 위로 기어코 어둠을 끼얹으려 했다. 그러나 고통을 지워 낼 수 없듯 세벨리아 또한 그의 머릿속에서 몰아낼 수 없었다.
[내가 넬리아였어도 당신은 똑같았을까요?]건조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동시에 평소에는 느껴지지도 않았던 목걸이가 제 목을 죄이는 것 같았다.
옛날, 그녀가 건네준 푸른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쯧.”
그는 이내 목걸이를 풀어내려 했다. 그러나 거친 손길에 오히려 상처만 생길 뿐이었다.
“이런.”
창문에 비친 모습을 본 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이런. 마치 잘린 목을 이어 붙인 것 같은 형상이 아닌가.
“잘 어울리네.”
피식 웃던 디하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은 손에 들린 십자가에 닿아 있었다.
언젠가 그녀와 진짜 부부가 될 수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한 적도 있었다.
제게는 주어지지 않을 그런 꿈같은 미래가, 달콤한 환상이 실제가 될지 모른다는 꿈에 부풀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지.’
그녀의 배신, 차갑고 날카로웠던 그 배신의 날.
그날, 디하트는 열었던 마음의 문을 다시 굳게 닫아 버렸다.
“당신이 먼저 날 버린 거야.”
그 순진한 눈으로 날 믿게 하고, 그 아름다운 미소로 날 현혹시키고, 그렇게 해서…….
“거짓으로 내 마음을 얻어 내고선 날 기만했지.”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창문이 열렸다. 세찬 바람이 마차 안을 휩쓸고, 목걸이의 은색 줄이 쨍강거리며 창틀을 때렸다.
“…….”
디하트의 금빛 눈 위로 어둑한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그는 천천히 십자가를 쥔 손을 뒤로 당겼다. 마치 아이가 물수제비를 던지기 직전 취하는 자세처럼. 그리고 이내 굉음과 함께 마차가 흔들렸다.
쾅!
놀란 말의 울음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울렸다. 디하트는 벽에서 주먹을 떼어 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마부의 물음에 이어 기사 두어 명이 그에게 다가오려 했다.
“됐다.”
디하트는 손을 저어 그들을 돌려보내고 다시 창문을 닫았다. 뭉개진 십자가 끄트머리가 그의 손안에서 둔탁하게 빛났다.
스스로가 한심했다.
‘넬리아였다면 결혼기념일을 같이 보냈겠냐고.’
그는 답하지 않은 물음을, 답할 가치가 없던 그 질문을 다시 곱씹으며 한숨을 삼켰다.
‘웃기는 소리.’
디하트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차라리 악몽이 다시 찾아오길 바라면서.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의 부모는 끝끝내 그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과거의 꿈으로 빠져들었다.
* * *
결혼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밤이었다.
디하트는 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서 있었다. 이대로 들어갈까, 아니면 돌아갈까 고민하면서. 그러나 그의 고민은 금세 먼지처럼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세벨리아가 문을 열었다.
“아.”
“…….”
시선이 맞부딪혔다. 두 사람은 경계심과 옅은 호기심을 품은 채 서로를 탐색했다. 세벨리아는 고양이처럼 목을 움츠린 채 그를 올려다보다 문을 조금 더 밀었다.
“들어오세요.”
디하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긴장한 듯 창백해진 두 뺨, 살짝 떨리는 손끝과 물기 어린 두 눈. 결국 그는 무뚝뚝한 음성으로 내뱉고야 말았다.
“난 잠버릇 고약한 사람은 질색입니다.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바로 떠날 테니 알아 두세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동그랗게 뜬 푸른 눈이 휘어졌다. 그녀가 제 소매를 붙들고 스스럼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으니까.”
“……난 진심이에요, 부인.”
“저도 진심이에요.”
한 차례 시선이 오가고, 그렇게 두 사람은 손끝 한 번 닿지 않은 채 첫날밤을 보냈다. 서먹하고 별거 없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렇기에 평범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시작이었다.
비록 그 끝은 그가 예상했던 배신으로 귀결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