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30)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30)화(30/171)
눈을 떴을 때는 아직 새벽이 밝아 오기도 전이었다.
디하트는 식은땀을 훔치며 정갈하다 못해 수수한 방 안을 훑었다.
“……현실이군.”
디하트는 마른세수를 했다.
꿈속에서 그는 끝끝내 온실의 문을 열지 못했다.
혹시나 온실의 저편에 그녀가 있을까 봐.
그 끔찍한 순간을 되풀이하게 될까 봐 두려워 도망치고 말았다.
“한심하군…….”
버석거리는 웃음을 흘린 디하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안 되는 창가에 다가가 어깨를 기대자 높이 솟은 언덕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일곱 개의 언덕은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손처럼 위를 향해 뻗어 있었다.
그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희게 빛나는 유적의 잔해를 바라보며 디하트는 밤을 새웠다.
몰락한 신의 도시, 서프레디에서 보내는 첫날이었다.
* * *
한때 고대인들이 믿던 신의 영광이 머물렀으리라 추정되는 도시. 순박한 도시라 의원이 몇 번이나 강조했으나, 세벨리아는 은연중에 숭고한 모습을 그렸다. 그래서였을까.
“……오.”
마차에서 내려 마주한 서프레디의 모습은 그녀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지금 저거 싸우는 건가……?’
노천카페에서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신성이니, 성역이니 하는 걸 보니 아마 서프레디에 머무르는 학자들인 것 같았다.
“학자들이 싸우기도 하는구나.”
학자라는 직업군을 만난 적이 없으니 얼떨떨했다. 연구실에 앉아서 열심히 책을 읽고 공부에 몰두하는 이미지라 굉장히 정적이고 차분한 줄 알았는데.
이런 데서 또 세상 물정 모르는 티가 난다. 세벨리아는 목덜미를 붉히며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얼시크의 의원이 추천해 준 사람을 만나려면 꽤 준비할 것들이 많았다.
* * *
느지막이 내려온 디하트를 향해 기사들이 목례했다.
“주인님.”
디하트가 테이블에 앉자 일레이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일전의 라이언처럼 신분을 티 내지 않기 위해 호칭을 변경한 상태였다.
“급히 상의드리고자 하는 일이 있습니다.”
꽤나 다급해 보이는 태도에 디하트의 눈썹이 올라갔다. 일레이가 고개를 기울여 속삭였다.
“밤새 고민했으나……, 도저히 주인님을 이런 수수한 곳에 모실 수 없습니다. 서프레디 남작님에게 따로 공관을 내달라 요청하겠습니다.”
헛소리였다.
‘역시 장래가 유망하다는 건 라이언 혼자만의 기대였군.’
하긴 저와 닮은 사촌 동생이 이런 놈이라면 자신이라도 부끄러울 만했다.
디하트는 바로 그를 무시하고 손을 까딱여 직원을 불렀다.
“여기는 뭐가 가장 내세울 만하지?”
추천메뉴를 달라는 말치고는 제법 오만했다. 직원의 얼굴이 일순간 괴상하게 변했으나 곧바로 그린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상대가 꽤나 기품 있는 귀족이란 게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저희 여관이 가장 자랑하는 메뉴는…….”
무시당한 일레이는 불퉁한 눈빛으로 항의했으나 디하트는 그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 결국 그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거리로 나왔다. 적어도 지금 머물고 있는 여관보다는 더 나은 곳을 찾고 싶었다.
그는 정신머리 나간 학자와 의원들로 가득 찬 노천카페 거리를 지나 광장 근처에 세워진 여관들을 하나둘씩 훑었다.
‘이 정도로 오래됐으면 호텔로 재건축을 할 법도 한데, 용케 버티고 있군.’
오래된 역사를 자랑으로 내세우는 도시라서일까.
옛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건물들은 일레이의 눈에 차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들린 여관은 광장으로부터 제법 거리가 먼 곳에 있었고, 그 때문인지 새로 지었다는 느낌이 탁 들었다.
“여기다.”
만족스러운 웃음과 함께 일레이는 여관 카운터에 몸을 기댔다. 때마침 선객이 있었는지, 머리를 어깨 부근까지 짧게 자른 여인이 그를 돌아보았다. 푸른 눈과 짙은 갈색 머리칼의 대비가 선명한, 신비로운 분위기의 여인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기사다운 위엄이 가득한 태도로 일레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어라.’
그런데 너무 근엄한 척을 해서였을까. 상대의 눈이 파르르 떨리더니 자신을 이리저리 훑는 게 아닌가.
‘설마 내가 잠옷 차림으로 나왔던가?’
눈을 부릅뜬 일레이는 제 차림새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상한 곳은 없었다. 인버네스의 상징이 박힌 제복도 아니고, 별다른 특징 없는 기사 정복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마치 도적 떼를 만난 가여운 상인처럼 그 자리에 굳어 있었다.
‘기사를 무척 무서워하나 보군.’
시골 출신이면 그럴 수 있지.
일레이는 일단 침착하게 무표정을 견지했다.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여인이 그대로 비명을 지를 것 같아서였다.
기사로서 여인이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겪도록 둘 수는 없었다.
“오래 기다리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이런, 다른 손님이 와 계셨군요.”
그리고 마침내 이 기묘한 대치상황을 끝내줄 인물이 나타났다.
“이를 어떻게 하죠. 죄송하지만 방이 없습니다. 앞에 계신 아가씨가 마지막 방을 가져가셔서요.”
열쇠를 들고 나타난 주인이 일레이를 보며 혀를 찼다.
“지금 머무르시는 분들도 장기숙박객이라 근시일 내에는 빈방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다.”
“이런……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여관이었는데. 아깝게 됐군요.”
일레이는 착잡한 마음으로 돌아서면서도 자꾸만 여인이 신경 쓰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주인에게서 열쇠를 받고 홀 안쪽으로 사라진 상태였다.
‘괜찮냐고 말 한마디라도 건넸어야 했나.’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담을 수는 없는 법.
일레이는 호쾌한 사나이답게 미련 없이 후회를 버리고 뒤돌아 숙소로 돌아왔다. 때마침 식사를 끝낸 디하트가 들어오는 그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어디 갔다 온 거지? 다른 이들은 모두 각자 임무를 성실히 수행 중이다. 심지어 린튼은 네가 말한 그 ‘남작님’에게 가서 협조를 요청 중이지.”
“숙소를 바꾸시는 겁니까?”
“생각이란 걸 하고 말해라. 당연히 그 의원 놈을 찾는 것에 대한 협조다. 미치겠군! 정말로 뭘 하다 온 거야.”
펜던트를 탁 소리 나게 닫으며 디하트가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 즉시 일레이는 당당하게 제 행적을 읊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는군.”
저게 정말 라이언의 사촌이란 말인가. 자신을 바라보는 디하트의 눈이 차갑게 식어 갔다. 그러나 일레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마음속에서 생각 하나가 꼬리를 마구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디하트가 매일같이 들고 다니는 펜던트 안에 그려진 초상화 속의 공작부인과 오늘 만난 여인이 어쩐지 닮은 것 같았다.
‘친척이라도 되나.’
일레이는 있는 대로 짜증을 내며 자신에게 당장 나가서 탐문이나 하라는 디하트에게 고개를 숙인 뒤 다시 거리로 나섰다.
‘괜히 공작부인과 관련해 말을 얹었다간 큰일 나겠군.’
그도 눈치라는 게 있는 사람이었다.
* * *
그대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세상에.”
방으로 올라온 세벨리아는 연신 ‘세상에’를 외치며 거실을 이리저리 가로질렀다. 한참을 그렇게 두서없이 돌아다니고도 진정이 되지 않아 그녀는 러그 위에 풀썩 주저앉았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마치 고막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았다.
“라이언이 날 잡으러 온 줄 알았어.”
문이 열리는 종소리에 뒤를 돌아본 순간, 세벨리아는 세상이 둘로 쪼개지는 줄 알았다. 색이 옅은 금발 머리에 무심한 회갈색 눈동자. 깔끔하게 다려 입은 정복과 언제나 허리에 매고 다니는, 무운을 상징하는 장신구까지. 그 모든 게 일순간 박혀 들어와 세벨리아의 정신을 쥐고 흔들었다.
‘하지만 아니었지.’
눈앞의 청년이 라이언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날 보고 당황하지도, 정색하며 달려들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상대가 라이언과 몹시 닮은 사람일 뿐, 그가 아니라는 걸 단숨에 깨달을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세벨리아는 다시 한번 청년을 주의 깊게 살폈고, 그의 머리카락 색이 라이언과는 달리 짙은 금발이라는 걸 확인했다.
‘햇살에 옅게 보였던 거야.’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그 순간에 십 년은 늙은 것 같았다.
“하아.”
세벨리아는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는 다리를 끌어안으며 무릎 위에 턱을 괴었다.
“이게 액땜이라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아도 서프레디에 도착하기 전 꾸었던 꿈 때문에 몹시 마음이 심란한 상태였다.
바로 힐렌드 홀에서 깨어나는 꿈. 두 번이나 연달아 떠나온 장소의 꿈을 꾸자 솔직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마치 자신이 그곳에 커다란 미련이라도 두고 온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장소가 달랐지.’
꿈속에서 정신을 차린 세벨리아의 앞에는 그녀가 힐렌드 홀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별채가 있었다. 어째서인지 기억보다 훨씬 더 노후하고 낡은 느낌이었지만, 분명 별채가 맞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세벨리아는 주변을 감싸는 안개에 당황했다. 마치 그녀에게 별채로 들어가길 강요하는 것 같았다. 세벨리아는 곧 체념하듯 별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본 적 없는 카펫과 이상하리만치 중후하고 오래된 양식으로 바뀐 실내장식에 눈을 깜빡였다.
‘정말 이상하네.’
기괴한 일은 연달아 이어졌다. 아무리 걸어도 복도의 끝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슬슬 깼으면 좋겠다.”
세벨리아는 제자리 뛰기도 해 보고 뺨도 꼬집어 봤다. 하지만 별다른 느낌이 없는 걸 봐서는 요원한 듯싶었다.
그렇게 지친 세벨리아가 차라리 창밖으로 몸을 던질까 고민하던 무렵, 드디어 그녀는 끄트머리에 다다랐다.
말문이 막혔다.
“……정말 당황스럽네.”
언제나 디하트와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듯 서 있던 높고 아름다운 유리문. 온실로 향하는 문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