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I Died, My Husband Went Mad RAW novel - Chapter (31)
내가 죽고 남편이 미쳤다 (31)화(31/171)
금으로 조각된 고상한 손잡이와 남부국가에서 들여온 깨끗하고 맑은 통유리. 어딜 보아도 디하트의 온실로 향하는 문과 똑같은 생김새였다.
“하아.”
세벨리아는 문에 손을 댄 채 가까이 다가섰다. 손바닥에 눌린 유리창의 차가운 감촉이 손목 안쪽까지 저릿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온실의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야성적인 빛깔로 몸을 감싼 화려한 꽃들과 짙푸른 생명력을 내뿜는 초목들. 그리고 그 사이에 언제나 홀로 서 있던 남자를 찾았다.
“…….”
그러나 악몽이 으레 그러하듯, 꿈속에 그녀가 원하는 건 없었다.
세벨리아는 손자국이 뚜렷하게 남은 유리문에서 몸을 뗐다. 조금씩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 이내 등을 돌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이 잠에서 깨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 유쾌한 꿈은 아니었어.”
꿈을 회상하는 사이 몸의 떨림이 멎어 있었다.
세벨리아는 현관에 여행 가방을 내버려 두고 침실로 들어가 침대에 몸을 던졌다. 만일 그 안에 디하트가 있었다 하더라도 자신은 문을 열지 못했으리라.
“내가 온실에 초대받은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으니까.”
아버지의 계략으로 인해 누명을 뒤집어쓰기 전. 온실에서 즐기는 티타임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다는 그의 초청을 세벨리아는 거절했었다. 다름 아닌 아버지가 보낸 보석상과 만나기 위해서.
“하.”
헛웃음인지, 조소인지 모를 무언가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세벨리아는 그대로 몸을 굴려 이불 속에 얼굴을 묻었다. 갑작스러운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 * *
그 뒤 세벨리아는 한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외출했다. 라이언을 닮은 사내를 아무런 준비도 없이 다시 마주쳤다가 또 깜짝 놀랄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지만. 세벨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계산대에 물건들을 올려놓았다.
두툼한 겉옷과 튼튼한 신발, 불쏘시개 도구, 가벼운 침낭, 식료품. 그리고 왜인지 독한 술 한 병이 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아가씨도 거기 가나 보구만.”
잡화점 주인이 세벨리아가 골라 온 물건들을 바라보며 툭 말을 건넸다.
“예?”
세벨리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주인은 허허 웃더니 물건들을 다시 쓱 훑어보며 물었다.
“여섯 번째 길로 올라가려는 거 아니오?”
“제가 외지인이라 이곳 분들이 쓰시는 지명은 잘 알지 못해서요.”
세벨리아의 말에 주인이 아, 하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숨어 지내는, 아니 이건 좀 수상스럽게 들리는구만. 혼자 연구하는 걸 좋아하는 의원이 있다고 들었소.”
“워츠 씨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주인이 씨익 웃으며 물건들을 봉투에 담았다. 그제야 세벨리아는 얼시크 의원이 말한 [본래 사람을 들여보내 주지 않는 녀석]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했다.
‘어쩐지 준비물이라는 게 꼭 야영 도구 같더니.’
세벨리아는 보이지 않는 한숨을 쉬며 지갑을 꺼냈다. 불치병의 권위자라는 위명답게 아무래도 만나기 쉬운 이는 아닌 듯했다.
‘그래도 친분 있는 사람의 소견서가 있으니 다행이야.’
그 순간, 잡화점 주인이 세벨리아를 위아래로 훑더니 딱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가씨가 그 의원에게 뭘 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녹록지 않은 여정이 될 거요.”
“…….”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오. 기껏해야 다들 울면서 돌아오는 게 끝이더만…….”
잡화점 주인은 쯧쯧 혀를 차며 가게 반대편의 노천카페 쪽으로 눈을 흘끗했다.
세벨리아는 말없이 그를 따라 시선을 옮겼고, 그곳에서 대낮부터 울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발견했다.
“저 사람도 이틀 전에 아가씨랑 같은 걸 사 갔거든.”
“…….”
“아무튼 행운을 비오.”
방 안에 곱게 모셔져 있을 소견서를 떠올리며, 세벨리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제가 보낸 환자라면 들여보내 줄 겁니다.]‘……믿는 수밖에 없지.’
얼시크 의원의 당당한 태도와 신뢰 가득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세벨리아는 잡화점을 나섰다.
* * *
한편, 디하트는 서로 삿대질하는 미치광이로 가득한 광장의 계단 위에 서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있었다.
“페터 한슨, 이 빌어먹을 쥐새끼가 숨을 곳을 정말 제대로 골랐어.”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최근 서프레디 남작의 협조를 받아 페터 한슨을 찾으며 화병이라는 게 무엇인지 체감하는 중이었다.
“이 곰팡내 나는 도시에 무슨 놈의 의원이며 학자가 썩을 것처럼 넘쳐나는 건지.”
서프레디는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중소 도시였으나 그 속을 살펴보면 괴랄하기 그지없었다. 학자, 의원, 주술사, 마법사 등 정신적으로 미치기 쉬운 직업군이 과다하게 몰려 있었으며….
“게다가 왜 저런 다 쓰러져 가는 건물에 아직도 비비적대며 미련을 못 버리고 있는 거야.”
고대 건축물을 보존시키는 도시 특성상 오래된 건물과 그만큼 오래된 골목들이 즐비했다. 한마디로 도시 개발 계획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난립의 총체라는 것이다.
“여기는 언젠가 필히 싹 다 밀어 버리고 말겠어.”
지번 따위 존재하지 않는 건물 수십 개를 살핀 북부의 영주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를 더욱 짜증 나게 만드는 건, 지번도 없는 주제에 사람들이 제 이름도 제대로 써 놓고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마침 오늘 그는 한슨이라는 자가 묵고 있다는 여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가 로잔이라는 자의 얼굴만 보고 나왔다.
부글부글 끓는 속도 모르고, 일레이가 불쑥 나타나며 말을 건넸다.
“암시장이 열리기에 딱 좋은 조건입니다.”
“…….”
“비록 지금 이 마굴을 점령한 건 지식과 유적에 미친 미치광이들이지만요.”
“넌……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명령을 잊은 건가?”
“죄송합니다. 제가 입을 다물면 공작님께 보고를 올릴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무시했다는 소리였다.
디하트는 순간 벼락이라도 내리칠까 하다가 마음을 접었다. 그가 일레이로부터 다른 구역을 시찰한 보고서를 받아 드는 순간이었다.
“어라, 또 저러시네.”
“…….”
일레이는 디하트의 뒤편, 계단 아래 어딘가를 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번엔 물건도 떨어트리시고.”
디하트가 미친놈을 보듯 일레이를 응시했다. 그러자 일레이가 억울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저번에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는데, 실은….”
“뭐?”
“음……. 아닙니다.”
주저하는 일레이의 모습에 디하트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금빛 눈동자가 커졌다가 작아졌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동공이 마치 벽에 박힌 듯 한 곳에 고정되었다.
“이게…… 무슨.”
들고 있던 서류가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손안에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몸을 감싼 옷감 위로 수천 개의 번쩍임이 춤추듯 움직이고,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고, 공작님.”
당황한 일레이가 저도 모르게 그를 공작님이라 불렀다. 그 순간, 디하트는 마치 방금 전까지 목이 졸린 사람처럼 갈급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가, 내가 또 헛것을 보는 건가.”
그러나 내리쬐는 햇살은 너무도 선명했으며, 귓가를 괴롭히는 소음은 지독하리만치 따가웠다.
“그녀의 환영이, 아니. 유령이…….”
디하트는 컥컥대며 숨을 내뱉었다. 혼란스러움이 머리를 뒤흔드는 와중에도 그는 저 아래 보이는 그녀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창백한 얼굴, 둥그런 코끝, 부드러운 입매와 사슴처럼 유순해 보이지만 살짝 올라간 눈매.
그리고…….
‘갈색 머리?’
아, 그제야 강렬한 깨달음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이곳은 우중충한 날씨와 끈질기게 이어져 오는 저주로 가득한 힐렌드 홀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던 마지막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 않았다.
“저건 내가 만들어 낸 환각이 아니야.”
자신의 목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한 음성이 귓가에 닿았다. 몸의 떨림이 어느 순간 멎었다.
“세벨리아.”
부름은 짧았고, 행동은 단호했다.
그는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갔고, 순식간에 그녀의 지척에 닿았다. 흔들리는 푸른 눈동자. 뒷걸음질 치는 가녀린 몸. 디하트의 심장이 확신에 차 두근거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화악-!
마치 눈앞에서 꽃봉오리가 터져 나가는 것 같았다. 거센 기류가 그를 밀어냄과 동시에 무언가가 그의 몸을 미친 듯이 때리며 스쳐 지나갔다.
“윽……!”
디하트는 팔을 들어 앞을 가로막았으나 소용없었다. 겨우 눈을 떠 틈 사이로 살펴보니 그 정체는 푸른 날개가 아름답게 빛나는 수백 쌍의 푸른 새들. 자그마한 파란 새들은 허공에서 태어나 날개를 펴고 사방으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세벨리아!”
혼란 속에서도 디하트는 있는 힘을 다해 외치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에 잡힌 건 푸르게 빛나는 깃털뿐이었다.
* * *
일순간의 일이었다. 자신도 어떻게 된 건지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디하트였다. 왜 이곳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히 그였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발견했고, 순식간에 자신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고…….
“그 뒤에 어떻게 됐지?”
세벨리아는 광장을 벗어나자마자 골목에 숨어 뛰는 심장을 내리눌렀다. 능력을 썼나? 아니면 달려서 도망쳤나? 뒤죽박죽이 된 머리는 제대로 된 답을 내놓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이곳에 가만히 숨어 있을 수는 없었다. 세벨리아는 짐을 끌어안은 채 있는 힘껏 숙소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정말……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멍한 얼굴로 세벨리아는 혼잣말을 했다. 머릿속에서 계속 같은 장면이 되풀이되었다.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던 그 표정, 자신에게 손을 뻗던 디하트의 눈빛. 간절한, 어쩌면 절박하기까지 한 얼굴로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음성.
마치 과거처럼, 비극이 일어나기 전의 그때처럼, 그는 자신에게…….
“아니, 아니야.”
짜악-!
살갗을 내리치는 소리가 골목을 울렸다. 얼얼한 뺨 위에 손을 대며 세벨리아는 입 안을 세게 깨물었다. 그녀는 침착을 가장하고 숙소로 들어왔다. 다행히 아무도 그녀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내게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아니야.’
그래. 제게 중요한 건 그가 아니었다.
“그리고 난 더 이상 그때의 내가 아니야.”
자신을 그리워한 듯한 그 절박한 얼굴, 일그러지는 눈, 괴로운 음성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세벨리아 인버네스로서의 삶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어.”
외롭게 죽지 않기 위해서, 홀로 쓸쓸함에 몸부림치다 죽지 않기 위해서 버린 거야.
나를 믿지 않고, 밀어내고, 방치하며, 경멸받게 내버려 둔 그의 곁에서 죽지 않기 위해 도망친 거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되뇌며, 세벨리아는 문을 열어젖혔다.